비명횡사한 개로왕을 위한 허묘일까, 제단일까, 아니면 석탑일까. 30년전 발굴조사 후 그 성격을 두고 설왕설래했던 유적이 있다.
무령왕릉으로 유명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정상부에 존재하는 3단 석축시설이다.
이곳은 1988년 고지자기 탐사와 이에 따른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구이다. 이를 두고 다양한 주장들이 오갔다.
공주 송산리고분군 정상부에서 확인도니 3단 석축시설. 30년전 확인된 유구지만 적석총인지, 제단인지, 석탑인지 그 성격을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올해 성격 규명을 위한 전면조사를 벌였지만 매장주체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문화재청 제공
먼저 돌로 쌓은 이 구조물이 특별한 시설을 갖추지 않았지만 구조적으로 서울 석촌동 2호·4호분 등의 적석총과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웅진백제 시절 ‘왕들의 무덤’인 송산리 고분군의 맨 위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한성백제 시대 서울 석촌동 적석총의 전통을 이은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특히 한성백제 마지막 임금인 개로왕을 위한 허묘 혹은 가묘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개로왕(재위 455~475)은 한성백제 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마지막 임금이다. 475년 고구려가 침공해서 한성을 포위하자 기병 수십명을 거느리고 아차산으로 도주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재위 475~477)은 신라에서 내준 구원병 1만명을 이끌고 돌아오다가 부왕의 승하 소식을 들었다. 문주왕은 부왕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채 웅진(공주)로 천도했다.
송산리 고분군 정상부의 3단석축시설에서 확인된 유물들. 쇠못이 출토됨으로써 이 유구가 계단식 적석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문화재청 백제왕도 추진단 제공
이에 송산리 고분군의 정상부에 존재하는 3단석축은 바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개로왕을 위한 적석총(가묘 혹은 허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다른 견해로는 이 석축구조의 입지와 구조로 보아 적석총일 가능성은 낮고 “489년(동성왕 11년), 임금이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에 따라 제단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와함께 이 석축시설을 석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송산리 고분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사찰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나왔다. 사비(부여) 시대 능산리 고분군 곁에 존재한 사찰(능산리 절터) 처럼 공주 송산리 고분군 지역에도 비슷한 성격을 지닌 절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갖가지 주장들이 나오자 문화재청 백제왕도 추진단은 올해 공주시와 함께 이 3단 석축시설을 정식조사했다. 문제의 3단 석축 규모는 1단 15m, 2단 11.4m, 3단 9.92m이며 전체 높이는 3.92m에 이른다.
하지만 올해 6월부터 6개월 동안 해당 석축시설을 조사했지만 그 성격을 명확하게 밝혀낼 유물이나 유구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송산리 고분군 능선에서 확인된 유물들.|문화재청 백제왕도추진단 제공
문화재청 백제왕도추진단의 용역을 받아 발굴조사를 담당한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이창호 책임연구원은 “매장주체부를 분명하게 확인하지 못했으니 유구의 성격을 규명할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다만 석축 시설의 남쪽에서 5.5m 간격으로 묶음을 이루는 기둥구멍이 확인되어 제단시설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설이 제단인지, 혹은 무덤 조성 전에 일종의 상량식이나 기공식을 거행한 흔적인지 알 수 없다. 또 유구 주변에서 쇠못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적석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물론 이 쇠못이 관을 짤 때 사용하는 관정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창호 책임연구원은 “석축시설 자체가 너무 훼손된 상태여서 성격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안타까워했다.
이해운 백제왕도추진단 학예연구관도 “유구 자체는 석촌동 고분과 흡사하지만 매장주체부가 없으니 뭐라 단정할 수 없다”면서 “이번 조사결과를 두고 학계논쟁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조사성과를 종합적으로 논의하는 학술세미나를 5일 오후 1시에 공주대 사범대 중회의실에서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이번 조사성과와 서울 석촌동 일대에서 진행되는 백제고분과 제의시설에 대한 조사성과, 충남 서천 봉선리 유적에서 출토된 3단 백제제사시설의 조사 성과 등을 비교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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