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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몽골의 감시아래 흐느끼며 허물어야 했던 강화성벽의 흔적

“1259년(고종 49년) 6월 강도(강화도)의 내성을 헐기 시작했다. 몽골 사신이 급하게 독촉하자 군사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울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성을 쌓지 말걸 그랬다.’”(<고려사>)

고려와 28년간(1231~59년) 6차례의 전쟁을 벌인 끝에 강화협정을 맺은 몽골이 내건 조건 중 하나가 바로 강화도성을 허무는 것이었다. 몽골이 느꼈던 물에 대한 경외심과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강화 중성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방어시설. 외부 침입을 막는 시설인 치와 외황(마른 도랑) 등이 발견됐다. 특히 몽골과의 항쟁이 끝나고 강화협정을 맺은 후 몽골의 압력에 의해 성벽을 허문 흔적도 보였다. |한백문화재 연구원 제공

칭기즈칸이 13세기 초 제정한 법에는 “제4조=물이나 재에 방뇨하는 자는 사형이 처한다. 제14조=물에 손 담그는 것을 금한다. 물은 반드시 그릇으로 떠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오죽하면 1259년 쿠빌라이가 장강(양쯔강)을 건너려던 몽골군의 무섬증을 해소시키려고 호부(護符), 즉 부적을 붙이게 했을 정도였다.(<집사(集史)>) 싸우자는 것도 아니라 그저 도강하는 것 뿐인데 부적까지 붙일 정도다니…. 

게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선 고려는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에 이중삼중의 덫을 더 설치해놓았다. 바로 궁성에 해당되는 내성과 도성에 해당되는 중성, 그리고 강화도 전체를 아우르는 외성을 쌓은 것이다. 세계최강의 군대를 보유했음에도 ‘물’에 관한한 공포심을 갖고 있던 몽골에게 강화도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 때문에 30년 가까이 곤욕을 겪은 몽골로서는 강화도의 이중삼중 성을 허물어야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내성이 헐렸지만 몽골은 만족하지 않았다. 

몽골 사신 주고는 “외성이 남아있는 한 진심으로 복종했다고 할 수 없다. 외성까지 모두 허물고 돌아가겠다”고 다그쳤다. <고려사>와 <고려시절요>는 “내·외성이 허물어지는 소리에 거리의 아이들과 여염의 부녀자들이 슬피 울었다”고 전했다. 그때 내·외성의 가운데 도성을 구획한 중성 또한 헐렸을 것이다. 

바로 그 때 몽골의 압박으로 헐린 것으로 추정되는 목책으로 만든 치(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방어시설)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조사지역의 전경.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막으려고 강화도에 삼중의 성벽을 쌓았다. |한백문화재연구원 제공 

강화 옥림리 주택신축부지를 조사한 한백문화재연구원은 6일 고려시대 중성(길이 8.1㎞의 토성·강화군 향토유적 제2호)에서 모두 9기의 목책구덩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능선을 따라 1열을 이룬 목책구덩이는 성벽 외부로 돌출된 능선에 치를 만들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목책구덩이의 흔적이 심상치 않았다. 목책에 사용된 나무기둥을 뽑아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기둥자리를 파내고 흙을 다시 메운 상태였다. 

강형웅 한백문화재연구원 조사2팀장은 “이것은 몽골과의 강화협정 후 몽골 사신의 감시아래 허물었던 성벽의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주민들이 흐느끼는 가운데 목책을 허물고 그 자리를 흙으로 메운 뼈아픈 역사의 현장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이번 발굴에서는 목책 치와 함께 외황(外隍·외부 침입을 방해하려고 성벽 밖에 만든 마른 도랑)과 초소의 흔적 등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외황은 목책 치를 두겹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암반층을 L자와 U자로 파내고 바깥쪽을 돌과 흙으로 성벽처럼 다져 올려 도랑을 만들었다. 강형웅 팀장은 “이번 조사를 통해 고려 중성의 성벽 구조와 형태를 규명했다”면서 “앞으로 고려 도성의 보존·정비를 위한 새로운 자료를 축적한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 목책 치와 외황 등이 발견된 곳은 강화중성이 시작된 강화읍 옥림리 옥창돈대 부근이다. 문제는 지금 중성 주변에 전원주택 단지로 계속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 참에 강화도에 있는 고려 도성 전반의 보전·정비 대책을 세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