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경기 연천 장남면 호로고루 주변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를 실컷 보고 돌아왔습니다.
6만송이의 해바라기 밭에서 연신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도 북적댔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차 한대가 드나들 수 있는 좁은 도로를 겨우 지나가야 했는데요. 이번에 가보니 산뜻한 포장도로가 새롭게 마련된 주차장까지 뚫려있더라구요.
오는 10월4일까지 열리고 있는 행사가 ‘통일바라기 축제’인데요. ‘해만 바라보고 돈다’는 해바라기를 따서 ‘통일바라기’, 즉 통일을 바라는 축제’라 한 겁니다.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천이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니까, 다소 루틴한 발상에서 ‘통일’자를 붙인 것이 아니냐구요.
■해바라기와 통일바라기 축제
하지만 호로고루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호로고루(瓠瀘古壘)’, 그 이름부터가 낯설죠. ‘호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임진강의 구간 이름인 ‘호로하’에서 따왔구요. ‘고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았던 ‘옛 보루’를 뜻하죠. 보루가 있었다면 엄청난 요충지였겠네요.
원래 임진강과 한탄강은 강원 평강 오리산·검불랑 등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하천인데요. 용암이 굳어져 생긴 현무암 지대를 따라 형성된 높이 10m가 넘는 두 강의 단애(절벽)가 상류부터 끊임없이 펼쳐져 내려옵니다.
그 중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류지점(전곡 도감포)과, 칠중하(파주 적성의 임진강 구간), 호로하(연천 장남면의 임진강 구간) 등이 깎아지른 단애가 없고 수심마저 얕아 쉽게 건널 수 있는 몇 안되는 지점입니다.
이 호로하에서 약 500m 하류쪽으로 가면 한국전쟁 이전까지 가장 번성했던 고랑포구가 있었구요. 서해안에서 조류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새우·소금 배들이 파주·연천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던 콩·땔감·곡물 등과 교역했답니다.
이 고랑포가 교역배가 드나들 수 있는 마지막 포구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호로하, 즉 호로고루 지점이 임진강 하류 쪽에서 볼 때 배를 타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죠.
■북한군의 남침로, 무장공비 침투로
1950년 6월25일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1사단)가 개성에서 문산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20㎞나 우회한 곳이 바로 호로고루와 가까운 임진강이었습니다.
전차(탱크)가 수심이 깊은 임진강 하류를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죠. 북한군 1사단은 탱크를 앞세우고 이른바 호로하와 칠중하 쪽을 도하하여 문산~파주~고양~구파발 쪽으로 남침한 겁니다. 전쟁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1·12사태 침투로가 멀지 않구요. 1974년 11월 15일 발견된 이른바 고랑포(제1) 땅굴도 이곳에서 8㎞가량 북동쪽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요. 지형이 바뀌지 않은 이상 예전에도 삼국시대부터 한반도를 경영하려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충지였겠죠. 아닌게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고구려-백제, 백제-신라, 신라-고구려의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4~7세기까지 고구려-백제는 31차례(백제를 주체로 한 기록에는 33차례), 백제-신라는 29차례, 고구려-신라는 16차례에 걸쳐 피 말리는 전투를 벌였습니다. 총 76(혹은 78)차례의 접전을 벌인 셈이죠. 원래 이곳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린 백제의 영역이었을 겁니다.
최근 호로고루와 지근거리에 있는 파주 적성 육계토성이 늦어도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축조된 백제성이라는 발굴성과가 나왔는데요. 생긴 것도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닮아서 ‘리틀 풍납토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풍 장학리(북한)~연천 횡산리~삼곶리~삼거리~우정리 1·2호분~동이리~학곡리 적석총 등 기원후 1~2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적석총이 8기나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부터 이 땅은 고구려 영역으로 바뀌죠. <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 396년(광개토대왕 5) 남침작전을 벌인 고구려가 58성 700촌을 빼앗고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奴客·신하)으로 삼은 뒤’ 돌아왔습니다.
■고구려는 천자, 백제·신라는 제후?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되지 않았는데요.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백제 개로왕 21)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남침로도 바로 바로 이 호로하와 칠중하 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개성-장단-파주-고양루트를 선택하지 않았듯, 호로고루 쪽이야말로 고구려 주력인 기마병 부대가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었을테니까요.
그 뒤의 남하루트는 두 곳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의 감악산 남서쪽의 323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거나 혹은 37번 국도를 따라 적암리 쪽으로 우회한 뒤 368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 루트 등입니다. 고구려군은 의정부-상계동을 거쳐 아차산에 이르렀고 한강을 건너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을 7일간 공격한 끝에 개로왕을 죽였을 것 같습니다.
그 루트를 따라 조성된 임진강·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와 성이 38곳에 이르고 있거든요.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이 고구려 유적들은 대부분 둘레 400m 안팎의 소규모 보루와 성 뿐입니다. 반면 만주의 지안(集安)이나 평양, 황해도, 즉 예성강 이북의 고구려 산성들은 짧게는 수㎞, 길게는 10㎞가 넘을 만큼 그 규모가 엄청나죠.
여기서 고구려의 점령지 통치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행정관을 두어 점령지역을 다스리고, 조세를 받는 형식이 아니라 전진·후퇴의 루트만을 확보했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으로 삼고 돌아왔다”는 <광개토대왕 비문>이 눈에 띈다는 겁니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문주왕’조는 “475년 한성 함락 후 문주왕(475~477)이 신라가 보낸 원군과 함께 돌아와 보니 고구려군이 이미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5세기 말에 작성된 충주 고구려비문도 “고려태왕이 신라 매금(왕)과 (더불어) 세세토록 형제와 같이(如兄如弟)…화합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렇게 5~6세기 전반 남진정책을 펼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노객’ 혹은 ‘형제국’으로 삼은 뒤 장기간 점령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은 “고구려가 황제의 나라를 칭하여 백제·신라를 조공국가, 즉 제후국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대식가였던 고구려군의 짬밤
4세기까지는 백제, 5~6세기 전반까지는 고구려의 리즈 시절을 웅변하던 임진강 유역은 6세기 중반, 즉 553년 다시 격동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이번에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 거침없이 북진하는데요.
이때부터 임진강은 고구려-신라의 국경선으로 변합니다. 고구려는 강 북안에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크고 작은 보루와 성을 쌓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첫번째 도하코스인 호로고루는 고구려의 최전방 사령부였습니다.
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1998년 토지박물관의 정밀지표조사 결과 호로고루에서 고구려 기와 조각들이 대거 확인되면서 정식조사가 시작되었는데요.
그 결과 임진강이 구비구비 돌아가면서 이뤄진 삼각형 형태의 천연 단애부에 접해 둘레 401m의 성벽을 조성한 사실을 확인했구요.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면만 높게 성벽을 쌓았구요.
임진강, 즉 호로하에 면하는 곳은 30m의 절벽으로 곧장 이어지고, 북쪽면 역시 40~60도 가량 아찔한 급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벽만 막을 수 있다면 적의 침입이 불가능한 요새로 기능했을 겁니다. 성 내부의 전체 규모는 2000평 정도 되었습니다.
호로고루에서 임진강·한강 유역의 40여개 고구려 유적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 할만한 엄청난 양의 고구려 기와가 발견됐습니다. 심지어는 한성백제의 도성 체계에 있던 몽촌토성 보다 많이 출토되었는데요. 그만큼 규모가 큰 건물이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고구려 토기 편으로는 대형 항아리, 시루편, 동이편 등이 보였습니다.
또한 2006년에 확인된 고구려 지하보급창고에서는 흥미로운 유물들이 쏟아졌는데요. 소·말·개·사슴·멧돼지 등 6종의 동물뼈와, 불에 탄 쌀·콩·조·팥 등 곡물들이 출토됐습니다. 이곳에서는 1300g들이 밥공기도 나왔는데요. 요즘의 밥공기가 200g 정도되죠.
고구려 병사들은 요즘 사람들의 6.5배 되는 엄청난 양의 밥을 먹은 겁니다.
제가 2006년 발굴 현장을 방문했는데요. 그때 적의 습격이나 아군의 진격을 알릴 때 쓴 것으로 보이는 흙으로 만든 북(鼓)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또한 호로고루와 동쪽으로 20㎞쯤 떨어진 무등산 보루에서 수백가마니에 달하는 탄화곡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고구려군의 군량미 창고였습니다. 탄소연대 측정결과 5~7세기 사이로 밝혀졌는데요. 발굴단(토지박물관)이 당시 허문회 서울대 명예교수(식물 육종학 전공)에게 탄화미 분석을 의뢰했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때의 고구려군이 쌀과 조를 섞어 먹었으며 쌀의 품종도 인디카(Indica)가 아니라 자포니카(Japonica)를 먹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인디카는 지금 동남아 등지에서 먹고 있는 ‘메진’ 쌀이고, 자포니카는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차진’ 쌀이죠. 또 고구려 군사들이 현미와 잘 도정된 백미를 섞어 먹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는데요. 5~7세기 고구려가 양질의 짬밥을 군사들에게 제공할 만큼 부강한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삼국시대 군사분계선
저는 호로고루에만 가면 임진강 맞은 편, 남쪽에 있는 또하나의 성터를 바라보고 상념에 잠기곤 하는데요.
그곳이 ‘이잔미성’인데요. 정식 조사가 아직 되지 않아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일부 남아있는 석축으로 미루어보면 신라성일 가능성이 큰데요. 강 남쪽에 있는 위치를 감안하면 백제가 조성하고 운영했다가 신라가 차지한 성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백제-고구려, 혹은 고구려-신라의 최전선 사령부였겠죠.
그렇다면 임진강은 삼국시대판 군사분계선, 혹은 휴전선이겠네요. 강 양쪽의 성에 주둔한 병사들은 어땠을까요.
강을 사이에 두고 칼과 활로 대치했지만, 때로는 “밥은 잘 먹었냐” “고향 생각은 안나냐”고 큰 소리로 소통하지는 않았을까요. 가끔은 그렇게라도 숨막히는 대치 국면을 풀지는 않았을까요. 그랬을 것 같습니다.
■신라를 ‘똥개’ 취급한 당나라
그러나 신라~고구려의 살얼음판 대치국면(553~660년)은 나당 연합군의 백제 멸망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고구려가 공격목표가 되면서 100년 이상 군사분계선 상태가 되었던 임진강변은 혈전의 무대로 변하죠.
원래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할 때는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의 옛 땅을 신라에게 준다’는 밀약을 맺었는데요. 그러나 당나라는 애당초 밀약을 지킬 의향이 없었습니다. 백제땅을 평정한 뒤 신라마저 도모하고 숙원인 고구려까지 삼킬 야욕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백제의 고토에 세운 5도독부를 통해 백제의 부흥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하면서 신라를 견제합니다.
그러면서 고구려 정벌에 총력을 다합니다. 그럼 신라의 처지는 어땠을까요.
백제 부흥군의 반격에 시달리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는 당나라군을 위해 뼈빠지게 보급품을 대줘야 했습니다. 662년(문무왕 2) 정월의 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 ‘문무왕’조를 봅시다. 신라는 “군량미를 평양으로 보내달라”는 당나라군의 요구에 따라 김유신 장군(595~673)의 지휘아래 보급품을 운송합니다.
그러나 한달 넘게 눈보라와 함께 강추위가 불어닥쳐 사람과 말이 얼어 죽어갔습니다.
“당나라와 신라군이 모두 군사를 돌렸다…신라군이 호로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군이 쫓아와서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이때의 사건을 기록한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는 “이때 신라는 고구려군의 수급을 1만이나 베고, 5000명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이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당나라군의 횡포가 계속되었습니다. ‘오라 가라’는 당나라군의 요구에 신라군의 괴로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667년(문무왕 7)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위해 칠중성(호로고루 인근 성)을 막 함락시킬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당나라 사자가 달려와 “칠중성은 됐으니 빨리 평양성으로 군량미를 보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공격하다 말고 군사를 돌려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군량미를 싣고 진격했는데, 이번에는 “이미 당나라군이 철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장안(당나라 수도)으로 철군한 당나라군이 황제(고종·649~683)에게 “신라가 군사를 늦게 보내는 바람에 철군했으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문무왕과 신라 조정의 분노가 켜켜이 쌓여갔습니다.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에 9전 전승
668년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당나라는 본격적으로 한반도 전체를 집어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냅니다.
신라도 가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호로하와 칠중하(파주 적성 부근의 임진강 명칭) 등은 당나라-고구려 부흥군, 신라-당나라군의 격전지로 변합니다. 673년(문무왕 11) 5월 당나라 총관 이근행(?~682)이 호로하 서쪽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치고 수 천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고구려 부흥군의 남은 병력은 모두 신라로 망명했습니다. 호로하 서쪽이면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의 사이를 흐르는 바로 그 여울목을 가리킵니다. 신라와 당나라는 더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9월에는 신라군이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을 역시 호로하에서 격퇴시켰습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는 “호로하에서 왕봉(경기 고양)까지 모두 9차례의 전투에서 당나라군 2000여명의 목을 베었는데, 두 강에 빠져죽은 당나라군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 당나라를 내쫓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호로고루에 비친 달빛
오랜만에 찾아본 호로고루에 해가 저물고 있었는데요.
해바라기 밭을 앞에 두고 호로고루 위로 넘어가는 일몰과, 붉은 노을을 찍으려는 카메라가 장사진을 치고 있더라구요. 예부터 호로고루 주변의 임진강 절경을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했거든요.
‘낚시터 바위 위에 비치는 깊은 밤 고운 달빛(釣臺暮月), 자지포 여울에서 밤고기 잡는 어선의 등불(芝灘漁火), 자미성(호로고루)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嵋城初月), 고야위(파주 장파리 임진강에 있는 바위)에 비친 저녁놀(掛岩晩霞), 장좌리 넓은 모래 벌에 열 지어 내려앉는 기러기 떼(平沙落雁), 저물녘 고랑포 선창으로 돌아오는 돛단배(石浦歸帆), 장단 석벽 좌우로 펼쳐지는 가을 단풍의 절경(赤壁丹楓), 신라 경순왕릉 부근에 비치는 저녁햇빛(羅陵落照)….’
그러나 호로고루라는 심상치않는 이름 속에 담겨있는 ‘심상치않은 역사’의 사연을 한번쯤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통일바라기’라는 이름의 축제를 여는 뜻도 한번쯤 새겨 두시기를….(이 기사를 위해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과, 전용호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 정세미 연천군청 주무관,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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