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리고 있는 한·중·일 청동기 전시회(7월26~10월 9일)가 간과할 수 없는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명색이 한·중 수교 30주년과 중·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는 친선 특별전인데요. 우리측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한 자료에서 ‘고구려와 발해사’를 삭제한 한국사 연표를 전시장에 내걸었답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이 특별전이 개막된지 50여일이나 지난 9월 중순, 그것도 언론보도에서 알게 됐으니 얼마나 기막힙니까. 뒤늦게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뭐했냐’는 타박이 나오고, 관장이 직접 사과문을 올리는 촌극도 빚었죠.
물론 이번 사태의 1차적인 책임은 ‘연표만 보내놓고 확인하지 않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져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박물관장의 사과’ 만으로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는 걸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국측이 연표문제를 제기하자 중국측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수정할 생각은 하지않고 아예 문제가 된 역사 연표를 치워버렸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까요. ‘고구려와 발해=중국사’가 명백한데 뭔가 외교문제가 비화할 것 같고…. 그렇다고 한국사로 인정할 수 없으니 아예 빼버린 겁니다.
■중국의 역사 이기주의
이 대목에서 ‘동북공정’이라는 낯익은 용어가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
아시다시피 ‘동북공정’은 동북 3성 지역의 역사, 그러니까 고구려·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프로젝트였죠.
2002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진행된 동북공정은 숱한 논란 속에 2007년 마무리되었는데요.
그러나 외견상일 뿐입니다. 2013년 시진핑(習近平) 집권 이후 중국헌법에 나온 통일적·다민족 국가론에 기초해서 중화민족공동체론을 새롭게 강조합니다. 그에 따라 자민족중심주의, 애국주의를 심화하고, 이른바 G2 시대의 국격에 맞는 역사를 만들어냄으로써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려 합니다.
어떻게 역사를 볼까요. 우선 중국은 가장 광활했던 청나라 시대와, 현재의 영토를 중국사의 영역에 포함시킵니다.
즉 연해주와 타이완, 남해도서까지 아우른다는 겁니다. 참으로 지독한 이기주의 아닙니까.
‘지금의 중국 땅’은 예전에 누가 차지하고 있던지 간에 ‘중국 땅’이다, 그런데 예전에 ‘한때 중국 땅’이었던 곳은 지금 누가 차지하고 있던 간에 ‘중국 땅’이다, 뭐 이런 겁니다. 이런 해괴한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한때 만주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백제·신라·고려·조선 등의 역사는 어떨까요. 이른바 ‘종번(宗藩·조공 및 책봉)관계’를 맺었던 번속국의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중국은 G2를 넘어 G1을 노리고 있죠. 지금 이른바 종번관계로 여기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한국·베트남·라오스 등)를 상황에 따라 중국사로 편입할 수도 있습니다.
■국정교과서를 편찬한 이유
이번 특별전 사태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동북공정’의 연구성과가 국정교과서에 실리고 있구요. 고구려·발해 유적지의 표지판이나 박물관 안내문, 대학 교재 및 교양서 등에까지 수록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동북공정’은 전문학자들의 영역을 벗어나 중국 학생 및 일반인의 상식을 바꾸어가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선 교과서는 어떨까요. 권은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논문(‘중외역사강요의 한국고대사·동아시아사 서술 내용과 역사인식 분석’, <동북아역사논총> 70호, 2020년 12월) 등을 토대로 살펴봅시다.
중국은 2017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집권 제2기를 맞아 국정교과서 편찬이 본격 추진됩니다.
역사교과서를 편찬하는 기준(새 표준)이 발표됐는데요. 그 중 ‘예부터 중국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로 발전하며 중화민족을 형성하고,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구축한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눈에 띕니다. 특히 ‘세계로 눈을 돌려 인류 운명 공동체 건설을 추진한다’는 항목도 주목됩니다. 중국 중심의 역사 서술로 ‘G2’를 넘어 ‘G1 국가로서의 신(新)세계 질서 구축’을 겨냥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2019년 편찬한 국정교과서 중 중국사(<중외역사강요 상>)는 그 해 신(가을) 학기에 베이징·상하이(上海) 등 6개 지역의 1학년 학생들에게 배포했구요. 세계사(<중외역사강요 하>)는 2020년 봄 학기부터 가르쳤습니다.
올해(2022년) 가을학기부터는 중국 전역의 고교 1학년생들이 새로 편찬된 국정역사교과서를 배우게 됩니다.
■만리장성 아닌 오만육천리장성
그렇다면 한국 관련 내용을 한번 볼까요.
우선 중국사(<중외역사강요·상>)에 수록된 ‘전국시대 형세도’와 ‘진나라 시대 형세도’ 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연·진의 장성이 압록강을 넘어 대령강과 청천강 부근까지 연결되어 있군요. 한반도 서북부 일부를 중국 영토로 표시하고 있구요. 맞는 얘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역사서인 <사기>는 “진나라가 쌓은 장성의 동쪽 끝이 요동(遼東·랴오둥)”이라 했습니다. <사기>의 주석서인 <사기정의>는 이를 두고 “요동군은 요하의 동쪽에 있는데, 진시황제가 장성을 쌓아 요하(遼東·랴오허)에 이르렀다”고 풀이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랴오허(요하)를 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랴오허의 서쪽인 푸신(阜新·부신)에서는 장성의 흔적이 보이지만, 랴오허의 동쪽에서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뿐입니까. 중국 지도를 보면 압록강을 건너 대령강·청천강까지 장성을 그려놓았는데요. 그러나 북한의 대령강에서 확인된 성의 흔적(120㎞)은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고려 시대 방어성입니다.
지난 2012년에는 중국 국가문물국이 앞장 서서 황당한 주장을 했는데요.
신장(新疆·신강) 위구르(維吾爾·유오얼) 자치구의 하미(哈密·합밀)~헤이룽장성(黑龍江省·흑룡강성) 무단장(牧丹江·목단강)까지 만리장성의 길이가 2만1196㎞라고 발표했습니다. 부여나 고구려, 발해, 심지어 금나라가 쌓은 성까지 모두 장성이라고 한 겁니다. 만리장성이 아니라 ‘오만사천리장성’이 된 겁니다.
의미심장한 착안점이 있는데요. 교과서 지도는 현재의 중국 국경선과,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 영역이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요. 현재의 강역을 기준으로 그 안의 모든 역사가 중국사임을 강조하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관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중국 국가문물국이 왜 그렇게 옛 고구려와 발해 땅의 모든 성까지 장성 속에 포함시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라인을 따라가보면 지금의 중국 영토와 비슷합니다.
■사라져버린 고조선·고구려·백제의 역사
고구려와 발해사는 어떻게 언급되어 있을까요. 사실 고구려·발해·백제·신라사는 외국 역사니까 당연히 세계사(<중외역사강요·하>)에 실려있어야겠죠.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 백제는 당연히 들어가 있어야 할 세계사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요.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측은 세계사에서 한국의 역사를 ‘7세기 말 통일신라’부터 서술했습니다. 이것부터가 역사왜곡이죠.
물론 짐작은 갑니다. 삼국시대부터 기술할 경우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고구려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부담스러웠겠죠.
그래서 아예 삼국시대를 통째로 빼버린 것 같아요. 그와 함께 휩쓸려나간 백제의 역사도 ‘존재감 0’이 된 셈이죠. 삼국시대를 기술할 수 없으니 고조선의 역사도 자동적으로 빠지게 된 겁니다.
중국은 중국의 변방 정권으로 치부하던 고구려와 발해를 처음부터 세계사에 넣을 생각이 없었구요.
그렇다면 중국사(<중외역사강요·상>)에 고구려·발해가 들어있을까요.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수나라가 고려를 정벌했다”는 딱 한줄만 기술했습니다. 중국은 특히 고구려와 관련된 문제를 상권(중국사)와 하권(세계사)에서 사실상 생략해 버린 셈이죠.
역시 논란을 피하기 위해 그런 거죠. 그러나 교묘한 장치를 설치해놓았습니다. ‘삼국 정립 형세도’에 중국 역사 영토 범위 안에 고구려의 영역을 포함시켰습니다. 물론 국명은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또 고구려의 입장에서 수나라의 침공은 명백한 침략전쟁이었는데요. 그러나 중국사 교과서는 굳이 ‘정벌’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지방정권인 고구려가 중앙정부(수나라)에 반기를 들거나 잘못을 저질러 정벌했다는 의미죠.
■고구려가 중국사가 아닌 증거들
그러나 중국사의 주장은 말도 안됩니다. 3~5세기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와 <후한서>를 보십시요.
부여·고구려·동옥저·예·마한·진변·왜의 역사가 ‘동이전’에 포함돼 있습니다. 당나라 때 지은 <주서>와 <수서>, <남사>, <북사> 등 중국의 정사(24사)도 ‘이역열전’, 혹은 ‘동이전’에 넣었습니다.
부여·고구려·백제·신라 등이 중국 역사라면 왜 중국의 정사가 이민족의 역사로 표현했을까요. <광개토대왕비문>의 ‘천제지자(天帝之子)’ 등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東夷·충주 고구려비문)로, 백제를 ‘노객(신하)’(광개토대왕비문)으로 삼는 등 천자의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광개토대왕(391~412)과 장수왕(413~491)이 ‘영락’(永樂)과 ‘연가’(延嘉)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한 것은 또 어쩌구요. 사대주의자라는 평도 듣는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를 지은 뒤 올린 ‘진삼국사기표’를 보십시요.
“해동의 신라·고구려·백제는 나라를 세워…중국과 상통하였습니다. <후한서>와 <당서>에 (삼국을 다룬) 열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국내(중국)의 일은 자상하게 다루고 국외(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일은 허술하게 만들어서….”
■당대 인물 최치원이 서술한 발해
그럼 발해는 어떨까요.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확실하게 중국의 소수지방정권으로 서술했습니다.
중국사(<중외역사강요·상)는 “당 현종이 강대해진 동북의 말갈족 속말부의 수령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면서 “당나라 주변의 소수민족이 건립한 정권은 조국(중국)의 변강 지구 개발에 적극적으로 공헌했다”고 기술했습니다. 발해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조영의 출신을 속말부 수령으로 본 것은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붙은 자”(<신당서>), “속말소번으로 고구려를 쫓아 안(중국 내지)으로 이주했다”(<동문선>) 등의 기록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당장 중국의 또다른 정사인 <구당서>는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 했습니다. <삼국유사> 등 한국 사서에는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대조영의 출신을 두고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대조영이 속말말갈 출신으로 고구려인이 된 고구려 장수였다는 설도 부각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조영의 출자가 아닙니다. 발해가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계 말갈세력이 당의 지배에 저항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로 건국한 독립국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당대의 인물인 신라 최치원(857~?)이 당나라 예부상서에게 보낸 상소문을 볼까요.
“고구려 잔여세력이 나타나…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습니다.”(<고운집>)
당대의 인물인 최치원이 다른 나라도 아닌 당나라 예부상서에게 ‘발해=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네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인 까닭
‘한국사의 시작을 7세기말 통일신라’로 왜곡한 세계사(<중외역사강요·하>)를 더 볼까요. 10세기 초 ‘신라인’인 왕건이 고려왕조를 세웠다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띕니다. 이것도 어불성설입니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소손녕(생몰년 미상)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게 있죠.
“너희(고려)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거란을 침탈하기 때문에 정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고려의 서희(942~998)가 뭐라 했습니까.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더냐”고 반문하며 “평양에 도읍(서경)을 둔 것도 그 때문”이라 했습니다. 소손녕은 ‘고려=고구려의 계승자’라는 논리에 막혀 꼼짝도 못하고 이른바 강동 6주까지 내주고 말죠.(<고려사절요>)
■한나라와의 투쟁 끝에 건국한 고구려
이번에 문제가 된 박물관 전시도 교과서의 인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은 201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중화문명 선전공정’을 시작했는데요. 그동안 진행해온 ‘역사 공정’의 결과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 국민과 외국인들에게 전파했습니다.
특히 한국 고대사와 관련이 깊은 동북 지역의 박물관과 유적은 관심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는데요.
저도 2014년 9월 광개토대왕릉과 붙어있는 ‘고구려 28대왕 전시관’ 옆에 세워놓은 안내판을 보고 기절했는데요.
안내판에는 “고구려는 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정권이고, 668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국내전쟁’으로 고구려 정권은 철저히 소멸됐다”고 했습니다. 안내문은 그것도 모자라 “고구려 정권의 소망(消亡·소멸해서 멸망함)은 필연적이었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마침 중국 동북 지역박물관의 고구려 전시내용(2017~2019)을 분석한 글(김현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박물관 전시를 통해본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 <동북아 역사포커스> 2022년 가을호)이 있네요.
조사대상은 지안(集安·집안), 톄링(鐵嶺·철령),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 박물관 등이었는데요.
눈에 띄는 부분만 추려볼까요. 고구려가 현도군(한사군) 경역 안에서 건국했고 그 관할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군요.
그러나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중국측 사료인 <삼국지> 등은 “고구려가 중국 현도군 경계에 성을 쌓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구려와 중국(현도군)이 별개의 영역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또 <삼국사기>는 “기원후 12년(유리왕 31) 고구려가 한나라 변경을 침략했다”는 등 한나라와 사생결단으로 격돌을 벌였다는 기사가 줄을 잇습니다. 고구려는 현도군과의 가열찬 투쟁을 거쳐 건국하고 성장한 나라입니다.
■뜬금없는 고구려와 조선족 비교
또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고구려 유민 다수가 한족으로 융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예컨대 지안박물관에 “고구려 유민들이 산시(陝西·섬서), 장쑤(江蘇·강소), 간쑤(甘肅·감숙) 지역 등으로 옮겨 갔다”는 설명이 있는데요.
즉 당나라가 고구려 멸망 후 재기하지 못하도록 고구려 백성 3만8200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 시킨 <삼국사기> 등의 기술을 마치 자발적으로 옮겨간 것처럼 기술했습니다. 전형적인 견강부회입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보덕국을 세우고 또 발해와 고려를 건국하는 등 고구려의 계승과 부흥을 실현한 사실을 무시한거죠.
유물 전시도 눈에 거슬렸는데요. 고구려의 대표유물인 ‘네 귀달린 항아리’(사이옹·四耳瓮) 대신 중국 토기인 ‘세발 달린 토기’(삼족기·三足器)를 전시하거나, 고구려 벽화인 무용총의 사냥그림과 함께 한나라 수렵도를 게시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고구려 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보다는 한 문화의 영향을 알리는 데 더 주력한 전시 방식이죠.
또 고구려 전문이라는 지안 박물관을 비롯한 각 박물관은 고구려의 역사적 비중과 영역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하기야 ‘고구려=중국의 변방 지방정권’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는데, 굳이 고구려를 도드라지게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겠죠. 심지어 톄링 박물관은 고구려와 조선족이 서로 전혀 관계가 없다는 내용을, 관련 유물도 없는데 생뚱맞게 별도 패널로 만들어 게시해 놓았답니다. 고구려-한국-조선족의 연관성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가 분명하죠.
어떻습니까. 2002년 동북공정이 시작된 이후 20년동안 진행되어온 각종 ‘공정’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죠.
최근 일어난 연표 누락 문제가 ‘박물관장의 사과’ 따위로 마무리될 사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이 역사를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만들려는 이른바 ‘중국몽’ 실현의 도구로 삼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누가 그 어떤 대책을 세우고, 그 어떤 조치를 취한다 해도 귀에 담지 않을 겁니다. 그냥 듣는 시늉만 하겠죠. 그럼 또 제풀에 지쳐 넘어갈 거구요. 그 사이 ‘중국 인민’들은 교과서와 박물관에서 배운 대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애국주의, 중화민족론 등에 젖어들겠죠. 그 사이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는 중국사의 일부가 되겠구요. 그렇게 되도록 가만 두어야 할까요.(이 기사를 위해 동북아역사재단의 박선미 한국중세사연구소장과 권은주·김현숙 연구위원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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