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 쑹메이링(宋美齡), 천궈푸(·陳果夫), 천치메이(陳其美)….’ 이 분들이 누구냐구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1만7588건) 중에서도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33건(명) 가운데 외국인 5명의 명단인데요.
5명 모두 중국인입니다. 이중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손문·1866~1925), 중국 국민당 주석이자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장제스(장개석·1887~1975)와 그 부인인 쑹메이링(송미령·1897~2003) 정도는 아실 거구요. 이 세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쑨원)와 독립운동(장제스·쑹메이링)을 지원한 공로로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답니다.
■독립유공자 1·2등급에 포함된 중국인 15명
그런데 같은 ‘대한민국장’ 수여자인 천치메이(진기미·1878~1916)와 천궈푸(진과부·1892~1951), 두 분은 좀 낯설죠.
천치메이는 1910년대에 신규식(1879~1922) 선생과 함께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여 한·중 혁명 활동을 전개했답니다. 천치메이의 조카인 천궈푸는 1913년 조소앙(1887~1958)·신규식 선생 등과 함께 대동당을 조직해 항일 합동 투쟁을 전개했구요. 1942년 중국 정부의 중앙조직부장으로서 광복군과 함께 항일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중국 대륙에서 펼쳐야 했던 항일독립투쟁에서 쑨원이나 장제스, 쑹메이링 같은 중국 지도자들의 협력과 지원은 절대적이었죠. 또한 대중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치메이와 천궈푸 같은 분들의 도움도 컸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역시 같은 이유(독립운동 지원)로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92건 중 중국인이 10명(11%)이나 됩니다. 대한민국장(33건)과 대통령장(92건) 등 1·2등급 서훈대상자(125건) 중 12%(15명)가 중국인이라는 얘기죠.
■헐버트와 베델의 서훈등급
제가 간과했던 문제가 얼마전에 제기되었는데요.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의 73주기 추모식에서 “헐버트 박사의 서훈 등급(3등급·독립장)을 하루빨리 1등급(대한민국장)으로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헐버트 박사가 누구입니까. 1886년 왕립 영어학교(육영공원) 교수로 입국한 이후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이죠. 최초의 한글 세계지리서인 <사민필지>를 펴냈고, 한글의 우수성을 미국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렸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등 3번이나 고종의 특사로도 활약했습니다. 그런데 이 헐버트 박사에게 고작 3등급인 독립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영국 출신의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은 어떨까요.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분이죠.
이후 통감부의 탄압에 맞서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필봉을 휘둘렀죠. 헐버트와 함께 일본 궁내부 장관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의 경천사 10층탑 강탈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서 반환을 이끌어냈구요. 베델은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2등급(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저는 결단코 베델의 서훈 등급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구요. 평생을 한글 연구와 보급,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바친 헐버트 박사가 3등급인게 잘못됐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또 헐버트(3등급)와 베델(2등급)의 서훈 등급이 같은 외국인으로서 1등급 대우를 받은 천궈푸, 천치메이에 견줘 낮은 건지도 의문이 듭니다.
■이 분들이 왜 2~3등급일까
아닌게 아니라 서훈 등급의 문제점이 계속 지적되어 왔는데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이동녕(1869~1940),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던 이상재(1851~1927), 역사학자이자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조직에 참여한 신채호(1880~1936) 선생 등도 2등급(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의병장 유인석(1842~1915)·신돌석(1878~1908),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1901~1932), 헤이그 특사 이상설(1870~1917)·이위종(1887~?),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한 이재명(1887~1910), ‘여자 안중근’ 남자현(1872~1933), 친일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1884~1947)·장인환(1876~1930) 선생 등이 2등급인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6형제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펼친 이회영(1867~1932),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박상진(1884~1921), 러시아와 함경도에서 무장투쟁을 이끈 최재형(1860~1920) 선생 등은 겨우 3등급(독립장)입니다.
그 외에도 훈격의 형평성에 문제를 제기한 분들이 많을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정부가 독립유공자의 명단 208명을 발표한 때가 1962년 2월 23일이었는데요. 이때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18명이 1등급, 신채호·신돌석·이위종·이상설 등 58명이 2등급, 유관순·김도현·김마리아·장지연·이회영 등 132명이 3등급을 받았습니다.
심사는 <조선독립운동혈사> 등 12권의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했는데요. ‘국시(國是) 위배’, ‘정치적 과오’, ‘납북’, ‘변절’, ‘해방 후 월남하지 않은 자’, ‘확인할만한 기록이 없는 경우’ 등 6가지 예외 규정을 두었답니다.
■‘동일한 공적에 대해 중복 수상은 없다?“
그러나 1962년이라면 해방된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해방~한국전쟁~4·19 혁명~5·16 군사정변 등 어수선한 정국에서 정확한 자료에 의한 심사가 제대로 이뤄졌겠습니까.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가 왜 1등급 대우를 받지 못했는지도 의아한 대목이구요. 더욱이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친일행적이 드러났거나 의심스러운 자들이 유공자로 신분세탁되었습니다. 남북분단과 전쟁, 냉전의 정국 속에서 상당수 독립운동가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및 부역자의 낙인이 찍혔구요.
세월이 지나 새로운 자료가 나오고, 정치 환경도 바뀌면서 등급의 재심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는데요.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동일한 공적에 대해서는 훈장 또는 포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 제4조가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1만7000명이 넘는 독립유공자 가운데 유관순 열사와 여운형 선생(1886~1947), 홍범도 장군(1868~1943) 등 세 분 만이 기존의 대통령장(2등급) 외에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경우 ‘3·1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순국한 공적’으로 받은 ‘대통령장’ 외에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인 공적’으로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받았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기존의 ‘대통령장’외에 ‘해방 이후 대한민국 건국 및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공적’이 인정되어 ‘대한민국장’을 더 받았습니다. 홍범도 장군(1868~1943)은 2021년 카자흐스탄에서 유해가 송환된 것을 계기로 기존의 대통령장(2등급) 외에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했습니다. 하지만 현행 상훈법에 따라 재심사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유관순 열사와 여운형 선생, 홍범도 장군의 사례가 왠지 편법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시·마부가 대거 공신록에 오른 이유
이 대목에서 조선조 선조 때의 공신 서훈 문제를 거론하고자 합니다. 먼저 <선조실록> 1604년(선조 37) 기사를 볼까요.
“호종공신이 80명이 넘는다니 과하다. 그 중 내시가 24명이며 미천한 자들이 또 20여명이다”(6월 25일)고 했구요. 또 “천한 것들과 함께 공신회맹연에 참석했으니…아! 어찌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10월 29일)고 한탄하는 기사가 있네요. 그중 6월25일 발표된 선조의 공신 교서 내용을 전한 사관의 논평이 의미심장합니다.
“임진왜란 때 정인홍(1535~1623)·김면(1541~1593)·곽재우(1552~1617)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1537~1593)·고경명(1533~1592)·조헌(1544~1592)은 충청과 호남에서 죽었다. 그들의 공적은 너무도 찬란하고 열렬하여….”
사관들의 논평을 정리해볼까요. 하나는 공신 중에 허접한 인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곽재우 등 의병들의 공이 너무 폄훼되었다는 겁니다. 대체 어떤 내막이 있었을까요. 6월25일 발표된 공신은 세 부류로 나뉘었는데요.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행을 수행한 86명은 ‘호성(扈聖)공신’이 됐습니다.
‘임금(聖)을 호위(扈)한 공신’이라는 거죠. 또 전쟁터에서 왜적을 토벌한 장수와 중국에 지원군과 군량미를 보내달라고 주청을 올린 사신 등을 포함한 18명은 ‘선무(宣武)공신’이 됐습니다. ‘무공(武)을 떨쳤다(宣)’는 의미죠. 또 전란 도중(1595년)에 터진 이몽학(?~1596)의 반란을 진압한 5명은 ‘청난(淸亂)공신’이 되었습니다.·
어째 좀 이상하죠. 무려 7년이나 전쟁을 치렀는데,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선무공신(18명) 보다 의주로 도망간 임금을 수행한 호성공신의 숫자(86명)가 5배 가까이 많으니까요. 특히 사관들의 지적대로 호성공신 중에는 신분이 낮은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호성공신이 선무공신보다 약 5배 많은 이유
내시가 24명이나 포함됐구요. 임금의 말(馬)을 관리하는 이마(理馬) 6명, 의관 2명, 왕명을 전달하는 별좌(5급)와 사알(6급)이 2명이 들어갔습니다. 의관 중에는 <동의보감>을 편찬한 의성 허준(1539~1615·호성 3등)도 포함됐죠.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삼십육계줄행랑을 택했죠.
“임금이 경성을 떠날 때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명망 진신(縉臣)들이 임금곁을 떠났고, 경성~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은 겨우 17인이었다. 그밖에 환관 수십명과 어의 허준, 액정원 4~5인, 사복원 3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임금이 ‘사대부가 너희들만도 못하구나!’하고 한탄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1일)
선조는 의주 도망길에 ‘명공대신’과 ‘사대부’의 배신을 목도했던 겁니다. 그랬기에 어려운 시기에도 임금을 끝까지 지켜준 측근들에게 공신의 직위를 내리고 싶었겠죠.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제 몸보신을 위해 줄행랑친 지체높은 자들보다 훨씬 의리있는 사람들이죠. 그런 면에서 사관들의 비판은 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선조시대 사관들은 당나라 한림학사 육지(754~805)의 예를 드는데요. 육지는 783년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황제(덕종·779~805)의 피란길을 줄곧 수행했던 충신인데요. 훗날 공신작위를 내리자 육지는 “임금을 호종하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직분”이라고 거절한 인물입니다. 선조 시대의 사관은 바로 이 육지의 일화를 전하면서 “태조(이성계)가 창업했을 때도 개국공신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 중 태조의 수발을 든 환관과 시종이 끼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선조실록> 1604년 10월 29일)고 비판합니다.
■의병장들을 홀대한 이유
그것도 일리있는 지적 같아요. 그러나 선조의 공신 서훈이 문제가 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무공을 세운 장수와 의병장들을 지독하게 홀대했다는 겁니다. 선조는 공신 책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이순신(1545~1598)과 원균(1540~1597), 권율(1537~1599) 등은 다소간의 전공을 세웠다…그러나 왜란에서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다…. 조선의 군대는 자기 힘으로는 적병 한 명도 베지 못했고, 적진을 단 한 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선조실록> 1601년 3월 14일)
다음 말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중국 군대가 지원군을 보낸 연유가 무엇인가. 모두 과인을 호종한 신하들 덕분이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호성공신의 수(86명)가 전쟁터에서 직접 왜적을 무찌른 선무공신의 수(18명)을 압도한 이유입니다.
기가 찹니다. 전란이 일어나자 줄행랑을 선택한 군주의 ‘비겁한 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임금이 도망쳤지만 어땠습니까. 전국 각지에서 그 못난 임금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부모형제를 위한 효심 때문에, 수천 수백년 동안의 터전이었던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죠. 이 분들이 사대부를 중심으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활약한 의병들이었죠. 다급했던 선조는 처음에는 의병장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등 의병의 봉기를 크게 북돋아주었죠.
곽재우 의병장에게는 “내가 그(곽재우)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럽다”고 했고, 고경명·김천일 의병장의 서울수복 의지를 담은 보고를 접한 뒤에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라고 했습니다. 선조는 “전국의 백성들은 분연히 왜적과 맞서야 한다”고 의병봉기를 부추기는데요.(<난중잡록> 1592년 8월4일) 그러면서 “너희(의병)가 힘을 합해 경성에 들어와 나(선조)의 행차를 맞으면, 너희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그 은택은 대대손손 미칠 것”이라 약속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급할 때의 약속은 어찌 되었습니까. “너희(조선군대와 의병)가 한 일이 뭐 있느냐”고 깔아뭉갰습니다. 선조의 마음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혹여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의병장의 지휘아래 무능한 조정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던 겁니다.
■의병장들의 공이 겨우 9060분의 1인가
18명의 선무공신 명단에 들지못한 곽재우 장군 등 의병장들은 이듬해(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립니다. 정공신(正功臣)이 아니라 원종(原從), 즉 ‘공신대우’의 대접을 받은 겁니다. ‘까짓것 옜다 받아라’고 마구 베푼 선심성 작위였던 겁니다. 이때 인정된 원종공신의 수가 무려 9060명인데요. 아무렴 곽재우를 비롯한 김면·김천일·고경명 등 의병장들의 공이 고작 ‘9060분의 1’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선조가 원종공신 교서를 내리면서 또 한 번 대못을 박습니다
“너희들의 공은 작고, 중국의 은혜는 크다…그러나 그대들의 공이 작을지라도 갚지 아니할 수 없기에….”
참으로 속좁은 군주의, 참으로 지긋지긋한 ‘중국’ 타령이 아닙니까.
이후 여러 차례 조정에 나와 출사하라는 명령에 곽재우 장군의 언급이 심금을 울리죠.
“신은 왜적의 토벌로 관직에 제수되었습니다. 왜적이 물러갔으면 신 역시 마땅히 물러나야 합니다. 훗날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마땅히 다시 나와 사졸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광해군일기> 1617년 4월 27일)
지금 이 순간, 독립유공자 서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분들이 무슨 등급이나 잘 받으려고 독립운동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친일파들이 호의호식 할 때 나라의 국권수호와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린 분들이 아닙니까. 그 분들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주고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 후손들의 몫이겠죠. 독립유공자들의 명단을 첫번째 발표한 것이 꼭 60년이 지나고 있네요.
이제 재평가 작업, 반드시 해야 할 때입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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