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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고려시대 개경 8학군은 어디였을까

최근 중국발로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베이징 뒷골목 원창(문창·文昌) 지역의 쪽방(11.4㎡)이 10억원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는 소식입니다. 3.3㎡당 2억8000만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집값이었습니다. 왜 일까요. 학군 때문입니다. 이 동네 이름이 우리 말로 ‘문창(文昌)’이라는 것도 ‘맹모삼천’을 부추겼습니다. 도교에서 ‘문창’은 ‘학문의 신’, ‘공부의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문창’을 모신 사당에 기도한 뒤 과거를 치렀답니다. 베이징의 문창, 강남의 대치동 같은 이른바 ‘교육특구’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습니다. 해동공자의 별명을 갖고 있는 최충의 사립학교, 즉 문헌공도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지금의 대치동처럼 고려시대 유수 학원이 있었던 동네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대문인인 이규보는 이 사설학원에 들어가려는 “선비들이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과연 어디였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73회 주제는 ‘고려시대 개경 8학군은 어디였을까’입니다. 

 

최근 중국 베이징 발로 흥미로운 기사가 떴다. 베이징 골목 안의 다 쓰러져가는 11.4㎡(3.45평)의 주택이 9억7000만원에 팔렸다는 기사였다.
4평도 안되는 쪽방의 가격이 3.3㎡(1평)당 2억8100만원에 이른다니 실로 엄청난 집값이다. 서울 강남의 교육특구라는 대치동 3.3㎡당 아파트 가격이 약 3580만원 정도다. 베이징 쪽방 가격이 대치동의 8배에 이르니 할 말이 없다. 중국발 기사를 종합하면 이 호화 쪽방은 베이징의 시청(西城) 원창(文昌) 뒷골목에 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볼품없는 외딴 집이라는 것이다. 그 쪽방 뿐 아니라 원창 뒷골목 집들은 1960~70년대 서울의 빈민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촌을 연상하면 된다고 한다. 당장 무슨 재개발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개성 송악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자하동의 안화사. 자하동은 예로부터 절경으로 꼽혀왔다. 

■‘공부의 신’과 맹모문창지교
그런데도 이 허름한 뒷골목 쪽방촌 가격이 천정부지로 뛴 이유가 있다. 바로 학군 때문이다. 즉 중국의 최고 명문이라는 베이징 제2실험초등학교가 있다는 것이다.
1909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薄儀)가 세운 이 학교엔 중국 지도자의 자녀들이 다는 것으로 유명한 명문교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베이징대를 비롯한 명문대 입학에도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초등학교부터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한 중국인들의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교육열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시(關係)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흔히 하는 표현이처럼 학군이 좋은 지역을 중국에서는 ‘쉐취팡(學區房)’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원창(문창·文昌) 지역의 집값이 천정부지인 까닭이 또 있다. 바로 우리 발음으로 문창(文昌), 즉 원창이라는 지명 때문이다.
문창, 즉 원창의 어원이 되는 말 가운데 ‘문창제군(文昌帝君)’이란 신(神)이 있다. <사기> ‘천관서’는 “문창제군은 북두칠성의 첫번 째 별~4번째 별 사이에 있는 6개의 별, 즉 문창성을 신격화한 것”이라 했다. 여러 설 가운데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의 아들(휘)이 문창제군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황제의 아들이라는 휘는 학문에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인간의 녹적(祿籍·큰 복과 명성)이나 문장(文章)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세상에 97차례나 태어났다고 한다.
장아자(張亞子)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도교의 전설도 있다. 동진 시절 촉(지금의 쓰촨성)에서 살던 장아자는 374년 전진의 부견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지어주었다. 이후 도교에서는 장아자가 인간세상의 벼슬을 관장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문창제군’은 ‘학문의 신’이자 ‘공부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수노인(壽老人), 재물의 신인 관성제군, 장수를 상징하는 동방삭과 함께 ‘학문의 신’인 문창제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문창제군상. 도교에서는 문창제군은 공부의 신, 학업의 신으로 숭상을 받아왔다. 

■북쪽엔 공자, 남쪽엔 문창이 있다.
과거제도가 도입되면서 문창제군의 인기도 높아졌다. 신분상승의 유일한 통로로 여겼던 과거시험에 급제하려고 지금으로 치면 ‘공신(공부의 신)’인 문창제군을 향한 기도에 열과 성을 다한 것이다. 특히 명·청시대에 접어들면서 극에 달했다. 문창제군을 모시는 사당이 교육기관 마다 건립됐다. 과거 때마다 문창제군의 사당에 들러 급제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문(文)은 과거를 보는 사람들의 수호신이 된 것이다.
사람의 사주에서도 ‘문창귀인’이 있다. 총명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는 사주를 일컫는다. ‘문창성’이 사주 내에 있으면 용모가 단정하고 문학이나 창작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문창성이 본인의 사주는 물론 배우자나 부모형제의 사주에 있어도 시험에 합격하고, 직장에서 승진하며, 게다가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는 등 좋은 일만 생긴다. 조상의 덕까지 받게 되어 주변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학자나 교육자로서 대성공할 운세라 한다.
그랬으니 중국인들은 ‘북쪽에 공자가 있다면 남쪽엔 문창이 있다(北孔子 南文昌)’면서 공자와 문창을 같은 반열에 놓고 숭상했던 것이다. 이것이 최근 문창(원창)의 뒷골목 쪽방의 집갓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이유 가운데 으뜸이다. 최근까지 한 자녀, 즉 샤오황디(小皇帝)에 올인하는 중국 부모들의 ‘맹모문창지교’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8학군
강남의 대치동, 베이징의 문창과 같은 교육특구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고려시대 8학군’은 바로 개경의 송악산 아래에 있는 자하동을 꼽을 수 있다. 자하동은 개성시 고려동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송악산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데 가을단풍이 붉은 노을이 피어 오르는 듯 하다해서 자하동이라고 하였다. 예부터 개성팔경의 하나로 되어 있는 ‘자하동의 중찾기’는 바로 이 마을 위쪽에 단풍이 우거진 푸른 절벽을 배경으로 들어선 안화사를 찾는다는 뜻이다. 이런 절경의 지역이 왜 8학군인가. 고려시대 사학의 최고 명문인 구재학당(후에 문헌공도로 개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재학당은 1055년(문종 9년) 문하시중이자 태자 중서령을 지낸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 설립한 사학이다.
“문종 때 태자 중서령 최충이 후진을 모아 가르쳤는데, 양반의 자제들이 최충의 집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배우려는 제자들이 차고 넘치자 9재로 나눴다.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덕(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이다. 양반자제 가운데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이 공도에 속해 공부했다. 구재학당의 옛터는 자하동에 있다.”(<고려사> ‘선거지·사학’,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이 사학에 입학하려고 고려의 영재들이 줄을 섰던 것이다. 최충은 할 수 없이 9반으로 분반해서 학생들을 모집했던 것이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 김윤식(1835~1922)은 구재학당의 옛터를 이렇게 읊었다.
“구재에 책 나눠두고 검은 휘장 내리니(九齋分籍下緇유(유))문헌공 옛터엔 아직도 비석 남아있네.(文憲遺墟尙有碑) 시 읊으며 돌아오면 산의 해는 저물었으니(洛詠歸來山日暮)
앉아서 술잔 나누던 풍류 상상할 수 있네.(風流猶想踞傳치(치)”(<운양집> ‘송경잡절’)
물론 고려의 대표적인 국립학교는 992년(성종 11년) 창설된 국자감이었다. 국자감은 인종 때 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 등 경학(京師·6학)으로 정비됐다.
그런데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됐다. 그러니 지위는 좀 낮지만 머리가 좋은 가문의 자제들은 사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 뿐이 아니라 엘리트 졸업생의 족집게 과외를 받는 사학의 과거합격률이 좋았기 때문에 최충의 사학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최충의 사후에도 무릇 과거를 보려는 자는 반드시 (자하동의) 구재학당(문헌공도)에 들어가서 배웠다”는 <고려사>의 내용이 이를 입증해준다.

자하동을 소개하고 있는 <고려사>

 

■개인과외수업까지 받은 이규보의 교육열
이규보(1168~1241)는 고려가 낳은 천재로 알려져 있다. 장편 대서사시인 <동명왕편>을 지었고. 시만 8000편이나 남긴 대시인이다. 당나라 천재시인 이태백을 닮아 엄청나게 빨리 시를 읊는다고 해서 ‘주필(走筆) 이당백(李唐白)’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 이규보 역시 구재학당, 즉 최충의 문헌공도 졸업생이었다. 이규보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타고난 영재였다. 기이한 아이라는 뜻의 기동(奇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2살 때(1169년)부터 책을 즐겨 가지고 놀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며 읽는 시늉을 했다. 11살 때 삼촌(이부)의 친구들이 이규보의 대구(對句)를 보고 탄복했다. ‘과연 기동(奇童)이 아닌가!’”(<동국이상국집> ‘이규보 연보’)
그러나 이규보의 가계는 문벌귀족이 아닌 지방 향리 가문 출신이었다. 당연히 과거는 ‘출세의 유일한 길’이었다. 이규보의 아버지 이윤수는 아들이 14살 되던 1181년 ‘입시(과거) 명문 학교’인 문헌공도에 입학시켰다. 이규보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문헌공도를 비롯한 명문사학들은 당시 해마다 여름철이면 귀법사(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의 승방을 빌려 하과(夏課), 즉 ‘여름철 특별과외’를 열었다. 강사는 물론 문헌공도 출신 선배들이 맡았다. 그리고는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해서 ‘촛불에 눈금을 그어놓고 그곳까지 타들어갈 때까지 시를 짓는 시험’을 펼쳤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수능 모의고사였던 이 시험을 ‘급작(急作)’이라 했다. 이 모의고사에서 이규보는 거푸 1등을 차지했다. 이듬해(1182년) 급작에서도 ‘궁궐의 옥당에서 숙직하다(內直玉堂)’는 주제의 시로 1등을 거머줬다. 이규보 가문의 기대가 하늘을 찔렀다.
다시 1년 뒤인 1183년(명종 1년) 봄 아버지 이윤수가 수주(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개경의 8학군에 남겨두고 임지로 떠났다. 5월에 열릴 과거(국자감시)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합격을 위해 개인과외 선생까지 붙였다. 과거에 임박, 과외를 구했으므로 아마도 ‘족집게 고액과외’였을 것이다. 이규보는 자신의 특별과외 사실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공(이 이부라는 인물)이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도 어릴 때 참여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이규보가 이 아무개라는 사람에게 개인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헌공도의 여름과외교습
비단 최충의 문헌공도 뿐이 아니었다. 고려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후진양성의 뜻을 품고 문헌공도를 벤치마킹해서 잇달아 사학을 세웠으니 이것이 이른바 12공도이다. 
지금의 영재학교, 과학고, 혹은 특목고라 할 수 있는 사학 12학교는 다음과 같다.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정배걸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의 남산공도(南山公徒), 김무체의 서원도(西園徒), 은정의 문충공도(文忠公徒), 김의진의 양신공도(良愼公徒), 황영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의 충평공도(忠平公徒), 문정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의 서시랑도(徐侍郞徒),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龜山徒)….”(<고려사> ‘선거지·사학’)
이 12공도가 펼치는 이른바 ‘하과’ 즉 여름철 특별과외는 당대 영재들만이 거칠 수 있는 행사였던, 이른바 ‘그들만의 잔치’였다. 모의고사, 즉 각촉부시가 끝난 뒤 성적순으로 방을 붙이고는 등수에 따라 이름을 불러 들어오게 한 뒤 동문선배들과 함께 술자리를 벌이고…. 이 술자리에 동관(童冠)들이 좌우에서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행사의 위엄과 예법이 대단했고 선후배 질서가 엄격했다. 하루가 다가도록 선후배가 시를 주고 받으며 읊조렸다. 이를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멋있다고 감탄했다.”(<임하필기>)

<동국이상국집>을 쓴 천재시인 이규보 역시 고려 최고의 명문 '문헌공도' 졸업생이었다.  

 

■개성 12공도 유학파 정도전 
당대의 영재들과 그 선배들이 함께 모여 족집게 과외를 열고, 1대1 구술시험까지 펼쳤다는 것이다. 보통의 자녀를 둔 고려인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그 명문사학 학생들의 자부심 역시 대단했을 것이다. 이규보는 ‘억구경(憶舊京)’의 시에서 “오직 일단의 관심처는 귀법사 냇가에서 앉아서 술잔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명문교생의 추억을 떠올린 것이다. 여담이지만 훗날 조선건국의 주역이 된 정도전(1342~1398) 역시 개경으로 유학해서 12공도를 졸업했다.(<동문선> ‘정도전 행장’)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의 집에서 큰 정도전은 어릴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8살부터 학업에 정진해서 영주향교-안동향교 등으로 한단계씩 올려 진학했다. 처음엔 다른 학동들도 대수롭지 않게 바라봤지만 시험 때마다 우등의 성적이 나왔다. 영주와 안동고을 원님들이 어린 정도전을 ‘고을의 희망’으로 여겼다. 마침내 외삼촌인 안분이 어린 정도전을 개경으로 불러올려 12공도에 입학했다.
“정도전은 개성으로 와서 학문이 날로 성취됐다. 십이공도 사이에서도 유명해졌다. 그는 유동미, 안축, 그리고 이곡(1298~1351) 등과 나이를 가리지 않는 친한 벗이 됐다. 이곡 선생이 ‘동방산수가 아름다우니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자 정도전은 기꺼이 천리길을 멀다않고 따라나섰다.”
이 기록을 보면 왜 요즘의 중국사람들이 베이징의 허름한 뒷골목인 원창(문창)의 쪽방을 거액을 들여 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정도전이 개성, 그것도 12공도에 유학해서 당대의 유학자들과 교유하는 등 인적네트워크를 만들었듯, 중국인들 역시 고관대작들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 주변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고려시대 사설학원계의 레전드
개경의 용산동 역시 이름난 교육특구였다. 문헌공도가 자리잡고 있는 자하동과는 달리 용산동은 당대 최고의 학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려의 대치동이라고 할까.
교육열이 유난히 높았던 고려 때는 이름난 과외선생들이 특히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스타강사는 ‘진수재(晉秀才)’라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진씨 성을 가진 진사나 생원 급 강사였던 것 같다. 이규보가 바로 스타 강사 진수재를 소개하는 시를 남겼다.
“용산을 가로지른 성 서쪽 모퉁이에(龍山橫枕城西角) 우뚝 솟은 한 봉우리(斗起奔來一峯綠) 한가로운 사람 그 밑에 집을 지었는데(下有幽人數間屋)… 모든 선비들 마치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어(白面學子魚聚族) 공부에 뜻을 갖고 여기를 서숙으로 삼는구나(橫經鼓협此爲塾)”(<동국이상국집> ‘진수재의 별장에 써서 붙이다’)
즉 진수재라는 인물이 용산의 별장에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마치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고 표현했다. 지금처럼 부동산 가격이 형성되었다면 용산 일대의 집값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이밖에도 정확한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전후무후한 스타강사였던 충렬왕 시대의 강경룡의 학원(집) 주변도 과거 입시생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강경룡은 고려 뿐 아니라 조선 세종 시대까지 그 이름을 떨친 사설학원계의 레전드였다. 임금(충렬왕)의 상까지 받았다니 말이다.
“1305년(충렬왕 31년)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 강경룡은 집에서 글을 가르켰다. 제자 10명이 모두 성균시에 합격했다. 합격자들이 스승(강경룡)의 집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느라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강경룡의 동네에 살고 있던 익양후 왕분(신종의 아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고한 것이다.”(<고려사절요>)
충렬왕은 “이 노인(강경룡)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잘 가르치는구나. 그 공이 얼마나 크냐”고 감탄하면서 상을 내린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수강생 가운데 10명이나 서울대나 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다. 강경룡은 조선의 세종시대에도 ‘사교육의 신’이라는 상찬을 받았다. 즉 1436년(세종 18년) 지성균판사 허조가 세종에게 알릴 말씀이 있다면서 강경룡 이야기를 꺼낸다.
“고려 충렬왕 때 강경룡이 아이들을 잘 가르쳤다는 이유로 포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유생 유사덕이 집에 서재를 마련해서 수십명을 가르치고 있고, 경상도 용궁 땅의 박호생도 10여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컨대 강경룡의 예를 본받아 이들을 포상하심이….”(<세종실록>)
세종은 물론 허조의 상언에 따라 지금으로 치면 학원강사들에게 상을 내렸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 임금이 결과적으로 사교육을 부추긴 셈이 된 것이다.

 

■“성현 말씀의 찌꺼기만 답안에 쓴다”
그러나 이같은 사학이나 사교육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측도 있었다.  
예컨대 조선중기의 문신 황준량(1517~1563)의 <금계집>은 최충의 문헌공도를 살짝 ‘디스’하고 있다.(<금계집> ‘잡저’)
“최충이 구재(九齋)를 설치하고 후학들을 가르쳐 세상에서 그를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적용하여 도(道)를 밝힌 효험이 없었고 자신에 돌이켜 궁구한 실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모두 문장이나 수식하는 부박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근본을 힘쓰고 사특한 것을 억누르는 의리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 담론하는 것이라곤 단지 성현 말씀의 찌꺼기뿐이었습니다.”
황준량은 고려에 성리학을 전한 안향(1243~1306)을 추켜세우느라 과거 시험준비에만 몰두한 고려시대 사학들의 교습태도를 ‘디스’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시험 자체가 틀에 얽매어 있었으니 사학들의 교육도 어쩔 수 없었다. 과거에 맞는 공부를 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서 인용한 이규보를 보라. 이규보는 최고명문이던 문헌공도 학생으로서도 1등을 놓치지 않은 당대의 영재였다. 집안과 친지는 물론 학교에서도 기대를 한몸에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개인과외교습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규보는 과거시험 1차(생원·진사를 뽑는 국자감시)에서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본고사(예부시) 입학자격마저 얻지못하는 수모가 3번이나 계속됐다. 이규보는 그 이유를 ‘과거시험에 맞는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돌렸다.
“4~5년 동안 술로 기세를 부리며 방탕하게 살다가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았다. 오직 시 짓는 것만 일삼고 ‘과거’의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았으므로 합격하지 못했다.”(<동국이상국집> ‘연보’)
과거시험에 나올만한 모범답안을 쓰지않고 무절제한 생활을 일삼으며 멋대로 글만 짓다가 거푸 실패했다는 것이다. 물론 비겁한 변명이다. 하지만 이규보의 투덜거림은 당시의 과거와, 그 과거를 준비하는 과정 모두 황준량의 지적처럼 세상의 도리를 논하기 보다는 옛 성현의 말씀을 그대로 답습하는 주입식 시험과 교육이었음을 웅변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교육특구와 합격생을 많이 배출하는 선생을 찾아 부모들이 ‘물고기 떼처럼’ 몰려다닌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세번이나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의 가르침을 지금 중국의 부모들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우리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천고의 세월이 지나도  말릴 수 없는 교육 광풍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