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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남자 의사가 여인의 살을 주무르니…"

 “산증(疝症·생식기와 고환이 붓고 아픈 병증)과 복통이 있었는데…. 어제부터 대소변이 보통 때와 같지 않구나. 의녀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써야 할 약을 의논하여라.”(1544년)
 <중종실록>에 나오는 임금의 지시사항들이다. 중종임금이 의녀, 즉 여자의사를 무한신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의녀들이 임금의 비뇨기 질환도 돌봤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실록>에 등장하는 여의는 아마도 ‘의녀 장금’일 가능성이 크다. 중종이 얼마나 장금을 신뢰했는지는 <실록> 곳곳에 등장하는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장금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1515년(중종 10년)이다.
 “의녀 장금은 왕후 출산에 공이 커서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했는데, 대고(大故·왕후의 죽음)가 이어지는 바람에 받지 못했다. 그에게 상을 베풀지는 못할만정 형장을 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중종은 왜 장금을 위한 변명을 해주는 것인가. 중종의 첫번째 왕비인 장경왕후가 원자(인종)을 낳고 일주일 만에 죽은 일 때문이었다. 주치의인 의원 하종해와 의녀 장금이 ‘약을 잘못 쓴 죄’를 뒤집어 쓸 판이었다. 특히 대간들은 “장금의 죄가 더 크다”고 아우성쳤다. 의녀가 왕비의 증상을 전하면, (남자)의원들이 약을 의논해서 지어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는데 장금의 공이 컸으니 상을 주어도 시원치않다”고 일축해버린 것이다. 장금을 향한 중종의 신뢰는 끔찍했다.  

임금의 이동식 변기. 임금의 변을 통해 건강을 체크하기도 했다.

■“남자의원들은 모두 나가라.”
 중종은 아예 “대장금에게 전체아(全遞兒)를 주라”는 명을 내렸다.(1524년)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조금 괜찮아 대내(大內·왕과 왕비, 대비의 거처)를 출입하면서 간병하고 있구나. 대장금에게 전체아를 주어라.”(<중종실록>)
 ‘전체아’란 무엇인가. 의녀는 원래 전인원이 돌아가면서 근무하고 근무기간 동안 급료를 받는 체아직(遞兒職)이었다. 일종의 파트타임? 그러나 중종은 대장금에게 왕과 왕비, 그리고 대비전을 드나드는 대장금에게 ‘상근직으로 급료의 전부를 지급받는 내의녀’의 직을 하사한 것이다.
 “의녀 장금이 나와 말했다. ‘어제 저녁에 임금께서 삼경(밤 11~새벽 1시 사이)에 잠 드셨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드셨습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지만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 됐습니다’고 보고했다.”
 <중종실록> 1544년 10월25일의 기록이다. 대장금이 밤낮으로 대전에 직접 머물면서 임금을 돌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종은 4일 뒤(10월29일) 더 흥미로운 지시를 내린다.
 “임금의 병환에 비로소 하기가 통하자 이렇게 명령했다. ‘지금 제조 및 의원과 의녀들이 모두 왕래하고 있는데, 의원과 제조는 모두 해산하여 돌아가거라.”
 임금은 장금을 비롯한 의녀들만 남기고 제조와 남자 의사들을 모두 내보냈음을 알 수 있다. 상도 주지못해 안달이었다.
 “중풍과 감기를 앓던 자순대비의 병이 호전되자 임금이 의녀 장금과 신비(信非)에게 쌀과 콩 각 10석씩 하사했다”(1522년),
 “여러 달 병을 앓다가 거의 회복됐구나. 의녀 대장금과 계금에게 쌀과 콩 각 15석씩 내리고….”(1533년)
 “의녀 대장금에게 쌀과 콩 도합 5석, 은비에게 쌀과 콩 3석씩 하사하라.”(1544년)  
 임금의 총애가 두터워지자 남자 의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1544년 중종이 “의원들은 의녀들의 전하는 말에 따라 써야 할 약을 의논하라”고 지시하자 내의원 제조(책임자) 홍언필이 발끈했다.
 “상의 증세는 진실로 심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냉기 때문에 이렇게 되셨으니…. 또 의녀가 비록 들어가서 진맥하나 천박한 식견으로 어떻게 알겠습니까. 박세거(의원) 하여금 진맥하게 하소서.”
 그러나 임금은 “증세를 보아 의원(박세거의) 진맥을 받겠다”는 명을 내렸다.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다. 

중종 때 의녀 장금이 24시간 임금의 곁을 지키며 돌봤음을 기록한<중종실록>. 장금은 사실상 중종의 주치의였다.  

■남녀칠세 부동석이거늘…
 조선의 의녀제도는 언제 도입됐을까. 1423년 의정부 참찬 허도가 세종에게 올린 글을 보자.
 “<예기>를 보면 ‘남녀 7세 부동석’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의사로 여자의 살을 주무르게 하니(遂使男醫按摩肌膚) 그 해괴함이 어떻겠습니까. 남자의사의 진찰이 부끄러워 병을 숨기는 바람에 요절하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이에따라 조정은 조선 팔도의 관비 중 10~15살 사이의 영리한 계집아이들을 선발, 서울로 불러들였다. 말하자면 국비로 여의사들을 양성한 것이다. 이들은 사서(四書) 뿐 아니라 전문용어 투성이의 의학서적까지 독파해야 했다. 3년 연속 ‘불통(不通)’을 받으면 다시 관비로 전락했다.
 <실록>은 대장금 말고도 의술을 떨친 의녀들의 이름들을 몇 기록해놓았다. 
 그 중 제주 출신 의녀 장덕(張德)과 그의 제자 귀금(貴今)이 유명하다. 그들의 진료과목은 ‘치과와 이비인후과’였던 것 같다. 1488년 <성종실록>을 보자.
 “1488년 잇병을 잘 고치는 의녀 장덕이 죽어 이제 그 일을 아는 자가 없다. 이·눈·귀 등 여러가지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뽑아보아라.”
 장덕은 충치는 물론 코와 눈 등에 난 모든 부스럼 치료에 뛰어난 의술의 보유자였다. 그러나 장덕의 죽음과 함께 ‘치과 및 이비인후과’ 전문가가 사라지자 왕명으로 장덕의 후임을 찾은 것이다. 
 사실 장덕은 생전에 제자 귀금에게 의술을 전수했다. 귀금은 장덕의 계집종이었다.
 “조정이 귀금의 신분을 면천시켜주고 여의(女醫)로 삼았다. 조정은 그 의술을 널리 전하고자 두 사람의 여의를 귀금의 제자로 붙였다. 그러나 귀금은 의술을 숨긴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실록>을 보면 귀금의 죄가 작지 않았다. 신분까지 올려 여의로 삼았을 뿐 아니라 의술의 보급을 위해 제자 2명을 붙였는데 의술을 전하지 않았다니 말이다.
 괘씸하게 여긴 성종 임금이 귀금을 불러 엄포를 놓았다.(1492년)
 “너 혼자 이익을 독차지하겠다는 거냐. 고문이라도 해서 네 죄를 묻겠다.”
 귀금은 “억울하다”며 속사정을 털어놨다.
 “저는 7살부터 의술을 배워 16살이 되어서야 완전히 습득했습니다. 저는 성심성의껏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뿐입니다.”
 귀금의 말대로 능력이 없어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데야 스승이 어쩔 재간이 없지 않은가. 

 

 ■‘끼 많은 여의사’ 애종
 또 한 사람의 이름난 의녀가 있었으니 바로 선조대의 여의사 애종(愛鍾)이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왠지 끼를 풍기는 애종’을 좋아하지 않았다. 1600년(선조 33년), 이런 일이 있었다.
 선조의 정부인인 의인왕후 박씨가 중병에 걸리자 약방제조 김명원이 ‘애종’을 적극 추천한다.
 “의녀 애종은 문자도 좀 알고 의술도 다른 의녀들보다 빼어납니다. 그녀로 하여금 중전마마를 돌보게 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지만 중전의 병세가 워낙 심각했던 터라 승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애종의 돌봄에도 의인왕후는 끝내 승하하고 만다. 가뜩이나 선조의 눈밖에 났던 애종은 탄핵의 대상이 된다.
 “애종은 맥박의 도수와 증후의 경중을 살피지 않고 약을 잘못 썼습니다. 끝내는 ‘망극의 변(왕후의 죽음)’을 당했으니~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추국해서….”
 선조도 맞장구 치며 자책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음탕한 의녀를 내전에 가까이 둔 것이 잘못이야.”
 그러나 선조는 이내 이성을 찾는다. “사람은 밉지만 약을 잘못 쓴 죄는 없다”며 “내의녀의 적에서만 삭제하라”고 명한다.
 “애종을 입진시킨 것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합당한 의녀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은 밉지만(其人可惡) 죄를 줄 수는 없다.”(<선조실록>)
 하지만 애종의 의술이 군계일학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나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항복이 내의녀에서 쫓겨난 애종을 다시 불러올리자고 간언한다.
 “의녀 중에 애종이 가장 의술이 좋았지만, 그런데 선조 때 ‘끼(氣)가 있다’ 해서 쫓아낸 바람에 지금껏 쓰지 않고 있습니다.(以爲有氣黜而不用) 이 때부터 내의녀의 씨가 말랐습니다.”
 대체 애종은 무슨 끼(氣)를 부렸던 것일까. <실록>은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고 있지만 무슨 끼를 부렸고, 무슨 음탕한 짓을 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신윤복의 <청금상련(聽琴賞蓮)>. 의녀인듯한 여인(가운데)이 양반들의 놀이에 동원됐다. |간송미술관 소장

■수사관이 된 여의

 대장금과 장덕 등과 같이 이름을 날린 의녀들도 있었지만 대다수 여의사들은 녹녹치 않은 삶을 살았다. 의사의 직분은 ‘기본’이었다. 그러나 온갖 궂은 일에 동원됐다. 
 예컨대 1434년(세종 16년) 종친들이 어머니와 부인의 병을 핑계삼아 종학(종친 학교)에 결석하는 일이 잦아지자 의녀들을 보냈다. 어머니와 부인들의 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적발하려 한 것이다.
 1490년(성종 21년)에는 사위의 상습폭행을 고발하는 송사가 벌어지자, 여의 ‘영로’가 급파됐다. 영로는 상습구타 당한 여인의 상처를 본 뒤 다음과 같이 보고서를 올렸다.
 “여인에게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 집에 계집종의 시신까지 있었고, 다른 종(奴) 한사람도 곧 죽게 될 것 같습니다.”
 의녀 영로의 보고 덕분에 폭력남편은 유배형에 처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1613년(광해군 5년) 이미 폐출된 임해군의 기생인 환어사를 검거할 때 의녀를 수사관으로 급파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의녀를 사대부집 수사에 동원시키는 문제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526년, 중종은 사족의 집을 수색할 때 의녀를 동원하는 것에 희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생각하건데 의녀를 둔 까닭은 무엇이냐.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지금 의녀가 포도대장을 따라 사족의 집을 수색하는 것은 의녀를 둔 본뜻이 아니다.” 

 

 ■법의학자가 된 여의
 법의학자가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 3월3일, 고 순회세자의 부인인 공회빈 윤씨가 죽었다. 선조는 창경궁에 빈소를 설치하고 상례절차를 진행했다. 그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급히 피란길에 오른 선조는 벽제를 지날 때 비로소 공회빈의 시신을 떠올리고는 뒤늦게 “시신을 가매장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 후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가매장된 공회빈의 시신을 무던히 찾으려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1595년 가매장처로 추정되는 곳에서 뼈 두 점이 확인됐다. 그러자 조정은 의관과 의녀 등을 급파, 뼈의 상태를 검안하도록 했다.
 “골절이 작고 가는 것으로 미루어 사람뼈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골절이 썩고, 부서진 정도로 보아도 훨씬 옛날의 뼈인 것 같습니다.”
 1533년(중종 28년)에는 상주에 있던 경빈 박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의녀 2명을 현장에 파견하기도 했다. 보통 사람에게는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져가는데, 후궁의 신분으로 왕자(복성군)까지 낳은 경빈 박씨를 나름대로 예우한 것이다. 
 호화혼수 적발에도 의녀가 동원됐다. 1502년(연산군 8년), 사헌부가 만연한 호화혼수 풍조를 개탄하자 임금이 지시한다. 
 “결혼식 현장에 담당 공무원과 의녀(醫女)를 보내어 호화혼수를 낱낱이 감찰하도록 하라.”
 의녀들이 남의 집 혼인날에 현장을 지키면서 혼수품이 무엇인지, 돈을 얼마나 쓰는지, 손닙접대는 어떻게 하는지 일일이 체크했던 것이다. 문제는 만약 호화혼수를 적발하고도 고발하지 않다가 발각되면 감찰했던 의녀도 곤장 100대를 맞았다는 것이다.  

 

 ■기생이 된 여의
 의녀들의 어깨를 짓누른 게 있었으니 바로 ‘술자리’였다. 더러는 사대부의 노리개가 되기도 했다.
 연산군 때 특히 극심했다. 1504년, 연산군은 “잔치 때 젊은 의녀 80명을 선발해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힌 뒤 기생들과 함께 어전의 섬돌 위에 앉히라”는 명을 내렸다.
 “의녀는 글은 물론 음악도 배워야 한다”며 음악을 배우지 않는 의녀를 탈락시키기도 했다. 연산군은 강금이라는 의녀를 직접 선발하기도 했고, ‘의술을 겸비한 아름다운 의녀를 숨기는 자는 죄로 다스린다’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사대부의 연회에도 곧잘 끌려다녔다. 오죽했으면 중종은 “지금부터 각종 연회에 의녀 및 창기의 참석을 엄금하라”는 지시를 내렸을까.(1510년)
 국왕의 지엄한 명령도 먹혀들지 않았다. 1516년 “대신들이 의녀와 기녀를 불러 방종하게 술을 마시는 행위를 법으로 금한다”는 명을 내렸고, 1년 뒤에는 정언 임권이 “예조가 의녀들의 연회참석을 끊임없이 감찰해야 한다”고 까지 아룄다.(1511년)
 “의녀의 목적은 의술을 배워 궁중과 사족의 부인병을 치료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대부의 연회에 의녀들이 참석하니 의술을 배울 여가가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조선시대 의녀들의 삶은 참 파란만장했다. 의술을 배울만큼 머리가 좋고, 누구보다 재주가 뛰어났던, 그러나 천민의 신분에서 발버둥쳐야 했던….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