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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고종을 매섭게 꾸짖은 70대 의병대장, "대체 전하는 무슨 마음을 먹고 …'

“폐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무슨 사람이기에 이따위 짓을 합니까.(陛下何爲而爲此)”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황제를 매섭게 꾸짖는 상소문을 올린 이가 있었다.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였다. 상소문의 주인공은 구한말의 의병장인 척암 김도화 선생(1825~1912년)이다. 700자로 구성된 이 상소문은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른 순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

“500년 역사의 왕위와 3000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척암은 “그런데 임금인 당신은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어찌 농사 짓는 자가 토지에서 난 곡식을 서로 매매하듯 하느냐”고 질타했다. 나라와 백성을 빼앗긴 임금은 더이상 임금이 아닌, 여염의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한 것이다. 척암의 춘추 86살이었다. 그리고는 자택의 문에 ‘合邦大反對之家(합방을 절대 반대하는 집)’이라고 써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척암은 2년 뒤인 1912년 88살을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났다.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척암선생문집> 책판이 환수됐다. 독일의 작은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구입해온 것이다.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1000여장 존재했지만 이번에 환수된 것까지 21장만 남아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독일 경매장에 출품된 책판을 구입 

척암은 본집 39권 19책, 속집 13권 6책으로 구성된 <척암선생문집>을 남겼다. 손자(김헌주) 등이 1917년 생전에 척암이 남긴 글을 모아 편집·간행했다. 

이 정도의 문집을 인출하려면 책판은 1000여장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책판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국학진흥원에 단 20장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중 1장도 2016년 미국 하와이대 에드워드 슐츠 교수가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2월 국외 경매에 출품된 한국문화재를 모니터링하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아시아 문화재 500여건이 나온 독일의 작은 경매에서 흥미로운 유물을 검색해냈다. 바로 <척암선생문집> 책판 1장이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전적 전문가 및 유교책판을 전문적으로 연구·관리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과 협의한 끝에 이 유물을 구입한 뒤 최근 공개했다. 

이번에 확인된 <척암선생문집> 책판 부분과 비교해본 인출본.  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 부분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오스트리아의 한 가족이 오래전부터 소장했던 이 책판은 양쪽 마구리가 빠졌고, 한쪽 면에는 글자를 조각한 부분에 금색 안료를 덧칠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물은 양호한 편이었다. 판심(版心·책장을 접어 양면으로 나눌 때 접히는 가운데 부분)을 확인해보니 <척암선생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이었다.

‘태극도설’은 북송의 철학자인 주돈이(1017~1073)의 ‘태극도설’에 척암이 주자(1130~1200)의 설명 및 퇴계 이황(1501~1570)과 대산 이상정(1711~1781)의 견해를 참고해서 조목별로 논술한 글이다. ‘태극도설’은 무극인 태극에서부터 음양오행과 만물의 생성 발전 과정을 도해해서 태극도를 만들고 설명을 붙인 것이다. 책판의 환수에는 온라인 게임회사 라이엇 게임즈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찾은 것

이번 문화재 환수는 단순한 책판 1장의 귀환이 아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김상엽 조사활용2팀장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표적인 의병장 중 한 분인 척암 선생의 유물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거쳐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고종의 비밀조서 ‘에통조’. 고종은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거병을 독려하는’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제공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탓에 미처 포함되지 못했던 세계기록유산의 일부를 되찾아왔다는 것도 이번 환수의 또다른 의미”라고 평가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소장된 718종 6만4226장의 유교 책판은 2015년 ‘한국의 유교책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유교책판’은 판각 계획부터 인출·배포 등의 전 과정을 공론을 통해 결정하는 ‘공동체 출판’이라는 조선 특유의 방식으로 제작됐고, 도덕적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표아래 500년 이상 전승된 집단지성의 산물이라는 점이 큰 의미를 갖는다. <척암선생문집> 역시 ‘한국의 유교책판’의 일부이다.


■고종의 ‘애통조’ 밀지

척암 김도화 선생은 구한말 문장가이자 성리학자로서 영남 유림의 태두로 추앙받은 대학자였다. 

그러나 그 이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만든 수식어가 있었으니 바로 ‘70대 의병대장’이었다는 것이다.

척암은 25살 때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아 수많은 학자를 배출한 영남학파의 종장인 정재 유치명(1777~1861)의 문하에 들어가 경학과 성리학을 배웠다. 과거를 통한 출세에 고개를 돌리지 않은 척암은 ‘무려’ 68세 때인 1893년 이른바 ‘유일천(遺逸薦·초야에 묻힌 선비를 발탁하는 제도)’으로 의금부도사와 성균관 직강사예(교수)가 됐지만 실제 근무하지는 않았다. 척암의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곧 ‘유일천’으로 발탁된 선비라는 뜻이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척암은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문을 올려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을 매섭게 꾸짖었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임노직 관장 제공

1895년 고향 안동에서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던 척암은 엄청난 격변기에 빨려들어갔다. 국모인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진 것이다. 척암의 춘추 71살 때의 일이다. 척암은 조선의 사직과 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영남 척사파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고종은 이 무렵 ‘애통하다’는 뜻을 적은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고종은 “아 슬프다”로 시작되는 ‘애통조’에서 “나의 죄가 커서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고 자책하면서 각지의 의병을 ‘충의지사(忠義之士)’로 북돋았다. 또 이들을 근왕칠로군(勤王七路軍)이라 하면서 영의정 김병시를 도체찰사로, 전 진사 계국량을 감군지휘사로 삼는다고 했다. 고종은 “호서를 충의군, 호남을 분위군. 영남을 장의군, 관동을 용의군, 관북을 감의군, 해서를 효의군으로 삼을 테니 조정의 명령에 부응하라”고 했다. 

“역신들의 농간에…단발령을 내려 4000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비밀리에 이것을 보낸다. 각 군수와 관찰사는 잘 선택해서 따르라. 의리의 용사를 뽑고 모집해서…재주있는 양민을 모아서 공을 쌓으면…따르지 않는 수령들은 처분해도 좋다…이전의 옛 제도를 회복하라’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애통조’의 대략 내용이다. 고종의 밀지를 받은 척암은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을 올린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의 예를 든 뒤 “왜놈 오랑캐는 만세를 두고라도 기필코 갚아야할 원수이며, 역대 제왕께서 일찍이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놈들”이라고 성토한다. 척암은 이어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일(復警討賊)은 춘추대의이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달려가는 것은 신하된 직분”이라고 천명한다.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묘소.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과거없이 발탁한 초야에 묻힌 선비를 의미한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70대 의병대장의 노익장

척암은 각 문중에 통문을 보내 유림의 중망이 높은 김흥락·권세연·곽종석 등과 함께 안동의병을 조직하여 안동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동의병은 1896년 경군과 일본 수비대에 패해 흩어진다. 이때 안동의병은 72살의 척암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 뒤 안동부를 재점거한다. 

척암은 영일의 최세윤을 부대장으로 삼고, 영주·예안·봉화·의성·청송·예천·영양·진보 등의 의병과, 제천의 유인석 의병장 및 호좌(충남)의 서상렬 소모토적 대장과 연합작전을 펴서 상주의 함창(문경) 태봉에서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 오합지졸이었던 의병은 무기마저 시원치 않아 정예병으로 맞선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후 척암을 중심으로 다시 전력을 재편해서 다소간의 전과를 올렸지만 경군(관군)의 압력과 해산을 촉구하는 고종의 윤음(임금의 포고문)을 듣고 할 수 없이 해산했다. 척암은 고종의 해산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전하는 무슨 마음을 먹고…”

비분강개한 척암은 무려 1400여자에 달하는 상소문(‘파병후자명소·破兵後自明疏’)를 올린다. 척암은 “전에 내렸던 애통하다는 교서(애통조)와 해산하라는 포고의 뜻이 서로 상반되니 전하의 백성을 전하의 칼날에 모두 죽게 만들었다”고 고종의 해산명령을 거세게 항의한다.

“왕의 군사가 내려와 가혹한 형벌을 일삼고 있습니다…책을 끼고 가는 어린아이까지도 모조리 잡아죽이고 길쌈하던 부녀까지도 역시 대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산골의 나무꾼도 지게를 진채 길바닥에 나뒹굴었으며 논밭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은 쟁기를 잡은채 굶어죽었고 마구 쏘아대는 총알은 우박 퍼붓듯 하고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룹니다.”

척암은 그러면서 “정말이지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과 마음으로 백성을 이 지경에 빠뜨리는 지 모르겠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그러나 고종은 “그대들의 충정은 충분히 알겠으니 물러나 국왕의 처분을 가다리라”는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언제는 ‘거병하라’고 부추겨놓고 이제와서 ‘충정을 알겠으니 그만하라’고 말리는 나약한 군왕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인가.

<착암선생문집>.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환수된 책판도 곧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포함될 예정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을사오적의 세가지 죄

척암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에도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다. 척암은 을사늑약을 당장 폐기하라는 상소문(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을 올렸다.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한 것만이 아닙니다. 군주보다 중한 것이 사직이요, 사직 보다 중한 것이 백성인데 백성이 장차 오랑캐의 노예가 되려 합니다.”

이미 81살이 된 척암이지만 견딜 수 없었다. 척암은 ‘을사오적’을 두고 “저 오적이라는 자는 짐승도 더러워서 먹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 있으니 첫째는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는 군부(君父·임금)를 협박한 죄입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10년 8월 결국 국권이 침탈되자 척암은 고종 황제를 지칭하면서 “대체 황제가 뭐하는 사람이야”고 사정없이 꾸짖은 것이다. 척암의 춘추 86살. 그렇지만 “결코 포기하지 말자”고 마지막까지 호소한다. “군신이 한마음이 되어 못을 파고 성을 쌓아 배수진을 파자. 그리고 백성과 더불어 일본과 한판 싸워 결판내자”고 결사항전을 촉구했다. 그러나 만사휴의였다. 


■척암 김도화와 석주 이상룡 선생

척암의 절망시가 가슴을 저민다.

“하물며 내 아직 살아있으나 아아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네. 올해 여든여섯…살아서 무익했고 죽을 곳조차 없으니 부끄럽다. 충의에 힘쓰라는 아버지와 스승에게….”

하지만 척암의 뜻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척암이 충남의 의병장 서상열에게 보내는 시를 보라.

“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늙은 이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 나섰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척암의 정신은 국권이 침탈되자 가족 50여명과 제자 200여명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한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에게 이어진다.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 석주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내는등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선생 뿐 아니라 아들(준형)과 손자(병화) 등 독립투사 9명이 이 가문에서 배출됐다. 뼛속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문이 아닐 수 없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