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릉비가 틀림없다.”
지난 1976년 경북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 남단의 해발 53m 낮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천왕사터의 당간지주 동쪽에서 ‘차임진’(次壬辰) 명문 비석편이 나왔다.
또 2012년 12월 역시 사천왕사터 서귀부 부근에서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 비석 2편이 나왔다. 이밖에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비석편 중 ‘명왈’(銘曰) 명 1편(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소장)과 ‘장’(<金+將>)명 1편(국립경주박물관) 등이 있다. 그런데
사천왕사지 ‘次壬辰’명편. 신문왕이 서거한 임진년(692년)을 가리키는 명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논문에서
이들 5편의 비석이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의 능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예사 연구자인 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한국목간학회가 주최하는 정기발표회에서 사천왕사 출토 비석 조각의 서풍, 필법, 각법을 분석한 논문(‘신라 사천왕사지 출토 비편의 새로운 이해’)을 발표하면서 이들 비편 5개가 신문왕릉비임을 논증했다. 신라 능묘비는 무열왕릉비, 문무왕릉비, 무열왕 차남인 김인문비, 성덕왕릉비, 흥덕왕릉비가 조각 형태로 현존한다. 신문왕릉비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 명문 조각 전후면. “‘무궁하며, 그 덕은 열 가지’로 해석되는 첫 행은 신문왕의 공덕을 칭송한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현숙 위원의 논문에서
정 위원은 먼저 비석 건립 시기를 알려주는 간지인 ‘임진’(壬辰)에 주목했다. 신문왕이 세상을 떠난 해(692년)가 바로 임진년이라는 것이다.
정 위원은 ‘세차(歲次)’가 간지를 따라 정한 해의 차례를 가리키는 용어이므로 ‘차(次)’ 위에는 ‘세(歲)’ 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정 위원은 승하한 신문왕의 뒤를 이은 효소왕(재위 692~702)이 선왕을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추정했다. 효소왕은 아버지의 명복을 위해 황복사에 삼층석탑도 지었다.
그런데 효소왕의 동생이자 역시 신문왕의 아들인 성덕왕은 706년(성덕왕 5) 황복사 삼층석탑 속에 다시 사리, 아미타불상,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면서 아버지 신문왕, 형 효소왕, 어머니 신목왕후의 명복을 빈 바 있다.
이 탑의 해체 과정에서 금동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사리함 뚜껑의 명문에 탑의 건립 경위와 유물의 성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황복사금동사리함기’의 2~3행을 보면 ‘신문대왕…천수3년임진7년7월2일 승천’(神文大王 …… 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昇天)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비석에서도 보이는 신문왕의 몰년 ‘임진(壬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정 위원의 설명이다.
정 위원은 “사천왕사지 비편의 ‘임진(壬辰)’ 아래에도 부왕인 신문왕의 죽음을 언급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황복사금동사리함기’의 명문을 보면 “신문대왕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시키고 공을 이루고는 천수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가셨다”로 해석되는 명문(神文大王 五戒應世 十善御民 治定功成 神文大王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昇天)이 있다. 이 명문의 ‘십선(十善)’과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비편의 ‘십덕(十德)’은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주장이 나왔다.|정현숙의 논문에서
장방형의 구양순풍 해서로 쓴 ‘차임진’ 글씨는 가늘면서 힘차며, 후대의 대부분의 사적비나 선사비에 쓰인 행서의 필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왕의 위엄을 보여 주는 듯하다. 정 위원은 “정간(井間·바둑판 처럼 그은 획)과 구양순풍 해서는 능묘비의 특징 중 하나이므로 이것도 원비를 능비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전했다.
정 위원은 또 2012년 말 서석교 상부에서 출토된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명 비석 2편에도 주목했다. 비석 2편은 무열왕릉비와 문무왕릉비처럼 우측이 사선으로 잘 다듬어진 것으로 보아 비의 첫 행으로 추정된다. 두 편이 따로 출토되어 돌의 색깔은 조금 다르지만 붙여보면 원래 한 편임을 알 수 있다.
정 위원은 “‘무궁하며, 그 덕은 열 가지’로 해석되는 첫 행은 신문왕의 공덕을 칭송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황복사금동사리함기’의 명문으로 이같은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사리함기 2~3행에 “신문대왕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시키고 공을 이루고는 천수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가셨다”로 해석되는 명문(’神文大王 五戒應世 十善御民 治定功成 神文大王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昇天)‘이 있다.
정 위원은 “이 명문의 십선(十善)과 비편의 십덕(十德)은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해석했다.
또 정 위원은 “1991년 소장처(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에 입수된 ‘명왈(銘曰)’명의 경우 비석의 후면에 왕의 덕을 칭송하는 명사(銘辭)의 시작을 알리는 구절로 추정해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명사는 비문의 후반부에서 비의 주인을 칭송하는 운문체 시이다. ‘명왈(銘曰)’ 이하에는 신문왕의 덕을 칭송하는 시구가 쓰였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정 위원은 “그런데 이 ‘명왈’ 명 비편의 소장기관은 이 편을 ‘문무왕릉비’로 기록하고 있다”면서 “석질과 양식은 물론 기필의 방필법 등으로 미루어보면 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와는 전혀 다르다”고 단정했다. 오히려 ‘명왈’명 비석편이 ‘차임진’과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명 비석편과 같기 때문에 ‘신문왕릉비’의 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정 위원은 ‘金+將’ 명 비석에도 주목했다. 기필의 각도, 예서의 필법이 남은 수필의 필법이 위의 3점과 동일하여 같은 비의 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위원은 따라서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비석편 중 ‘차임진(次壬辰)’명은 건비 시기가 692년경임을,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명은 비의 주인이 신문왕임을, ‘명왈(銘曰)’명은 신문왕을 위한 명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단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동일한 양식과 서풍을 지녔고 명문의 내용까지 더하면 다섯 비편을 ‘신문왕릉비’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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