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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그녀, 최초의 여성시단을 이끈 김금원

꽃피운 봄이 왔습니다. 싱숭생숭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입니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러나 과거의 여성들에게 담장 밖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경국대전>에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부녀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몇몇 여성들은 훌훌 떠났습니다. 제주 출신 김만덕은 임금의 허락까지 얻고 임금이 내린 특전까지 누리며 나름 호화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또 한 분이 계십니다. 김금원이라는 원주 여인입니다. 기녀출신은 김금원은 불과 14살의 나이에 남장차림으로 호서지방-금강산-관동8경-설악산-한양 등을 유람한 전문여행가였습니다. 여행만 다니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음풍농월했고 훗날엔 그렇게 지은 시까지 묶어 기행문까지 썼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77회는 ‘여행을 훌쩍 떠난 조선의 여인들’입니다.

 

 

 

불꽃같은 삶을 산 김금원에게 여행가라는 수식어만 붙지 않았다.
금원은 당대 명망있는 사대부들과도 어울려 마음껏 재능을 발휘한 문인이자 풍류가였다. 남성 문인들도 김금원과의 교유 사실을 알리는 글을 다투어 썼다. 예컨대 홍한주(1798~1868)의 <해옹시고초>를 보면 당대 문인들끼리 김금원과의 교류 사실을 자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금원과의 교유를 자랑했던 사대부들
“원주의 영기 중에 금앵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호를 금원이라 했다. 22살에 재모 있고 시가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내 친구 석경(송주헌)이 매화를 주제로 금원과 함께 시가를 주고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 모임에 와서 자랑했다. 석경이 이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줄 것을 요청해서 내가 부채에 직접 시를 써서 금원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이 일을 재미 삼아 율시 2수를 지었다.”

즉 송주헌이 모임에 와서 김금원과 시를 주고받은 일을 자랑했다는 것. 그러면서 모임에 참석한 홍한주에게 “답시를 한 수 써달라”고 하자 홍한주가 부채에 써서 김금원에게 보냈다는 것. 그리고 그 때의 일을 재미삼아 시 2수를 지었다는 것. 그 뿐이 아니다. 홍유건(1811~?)의 <거사시문집>에도 흡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학사 송영로가 금원과 매화를 제목으로 시를 짓고 돌아왔다. 모임에서 그 운(韻)으로 공동으로 시를 지어 금원에게 주었다. 이를 재미삼아 시 두수를 지었다.”
김금원이 당대 문인들에게 얼마나 화제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금원을 위해 시를 짓고, 그것을 김금원 본인에게 보내는 일이 문인 사이에 유행이었던 것이다.

혜원 신윤복의 <휴기다풍>. 기녀를 태우고 단풍놀이를 가는 사대부의 모습을 그렸다. 금원은 단순한 기녀가 아니라 당대 여성 시단을 이끈 문인이자 여행가였다.

 

■나중엔 반드시 남자로 태어나리라
김금원은 특히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사대부의 첩) 동류 여성들 4명과도 진한 우정을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고 시를 주고받는 이가 4명이다. 그 중 한 명은 운초다.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난데 그를 찾아오는 이가 많다. 어떤 이는 이틀 밤씩 묵고 간다. 다른 한 명은 이웃 친구인 경산이다. 박식하고 시 낭송(吟詠)에 뛰어나다. 또 한명은 같은 고향 사람인 죽서이다. 얼마나 똑똑한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마지막 한사람은 내 동생 경춘이다. 총명하고 지혜롭고 정숙할 뿐 아니라 경사에 통달했다.”
김금원은 4명(운초·경산·죽서·경춘)을 일일이 소개한 뒤 자신들이 어떻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지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전한다.
“서로 어울려 노는데 비단 같은 글 두루마리가 상 위에 그득하다. 온갖 명언가구(名言佳句)가 선반 위에 가득 찬다. 시를 낭송할 때 그 소리가 얼마나 낭랑한지 쇠를 두드리고 옥을 부수는 것 같다.” “거문고를 뜯고 음악을 들으며…웃고 떠드는 틈에 마음이 흔들려 시상이 떠오르면 뜻을 풀어 시를 쓰니….”
학계에서는 김금원을 포함한 이 5인의 모임을 ‘삼호정 사단’이라 칭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단이라 평가했다. 김금원이 얼마나 이 4명의 여성 문학동인들을 사랑했는지, 그들 중 한사람인 (박)죽서와 관계된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 생애에 죽서와 함께 남자가 되면 어떨까. 혹은 형제로 혹은 친구로 시를 나누고 책상을 함께 할지 어떨까. 아!(與相唱和了 此一案否耶 噫)”
여성들간 나눴던 지독한 우정의 편린이 이 한마디에 녹아있다. 남자가 되는 꿈을 꿔야 했던…. 조선은 김금원 같은 여인이 웅지를 펴고 마음껏 훨훨 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슴 속에 불을 담은 김금원은 그저 한탄만 하지 않았다. 김금원의 두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눈으로 큰 산하를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세상사를 겪지 못하면 식견이 넓을 리 없다. 남자는 넓은 세상에 뜻을 두지만 여자는 대문밖을 나서지 못했다. 절연된 규방에서 총명과 식견을 넓힐 기회를 갖지못하고 사라지고 마니 슬픈 일이다.”
그래서 김금원은 안방을 탈출해서 넓은 세상을 주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일도 스쳐 지나가면 눈 깜짝할 사이의 한바탕 꿈이다.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지금의 금원을 알겠는가.”
그래서 김금원은 불꽃 같았던 그의 여정을 글로 담았다. 비롯 순간의 해방이었지만 한때나마 만끽했던 자유의 순간을 기록한 것이다. 여자 아닌 인간으로서 자취를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