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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떠나볼까' 여행을 결행한 조선의 여인들

꽃피운 봄이 왔습니다. 싱숭생숭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입니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러나 과거의 여성들에게 담장 밖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경국대전>에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부녀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몇몇 여성들은 훌훌 떠났습니다. 제주 출신 김만덕은 임금의 허락까지 얻고 임금이 내린 특전까지 누리며 나름 호화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또 한 분이 계십니다. 김금원이라는 원주 여인입니다. 기녀출신은 김금원은 불과 14살의 나이에 남장차림으로 호서지방-금강산-관동8경-설악산-한양 등을 유람한 전문여행가였습니다. 여행만 다니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음풍농월했고 훗날엔 그렇게 지은 시까지 묶어 기행문까지 썼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77회는 ‘여행을 훌쩍 떠난 조선의 여인들’입니다.

 

 

“부녀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 사족 부녀로서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은 부녀자의 여행을 엄금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물론 뼈빠지도록 집안일에 매달려야 했고, 시부모와 지아비, 자식 뒷바라지에 전념해야 할 절대 다수의 조선 여성들에게 여행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치였다. 그런데 그나마 여행이라는 꿈을 꿀 수도 있었던 극소수 여성들에게까지 엄격한 선긋기를 했다는 것이다. 아니 여행 한번 한다고 곤장 100대라는 혹형을, 그것도 연약한 여인에게 내린다니 얼마나 가혹한 처벌인가.

김만덕과 김금원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금강산. 이 그림은 정선의 <겸재정선화첩> 중에서 금강산의 전체 경관을 담은 ‘금강내산전도'이다.

<경국대전> 등에 나타난 부녀자 외출금지 규정은 모두 중국의 예법서인 <예기>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예기>를 보면 부인은 낮에 뜰에서 놀지 않으며 까닭없이 중문을 나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부녀자들은 매양 채붕(綵棚)·나례(儺禮) 같은 큰 구경거리가 있을 때마다 거리에 다투어 모여 장막을 성기게 설치해 엿보고, 또는 누각에 얼굴을 내놓고 마음껏 바라보면서 부끄러움이 전혀 없습니다. 부녀자의 도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중국 사신 영접에도 실례를 저지를까 걱정됩니다.”
1431년(세종 13) 대사헌 신개가 세종 임금에게 상소한 내용이다. 신개가 언급한 채붕은 각종 행사를 구경하려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무대를, 나례는 음력 섣달 그믐말 밤에 악귀를 쫓기 위해 지내는 의식을 가리킨다. 신개는 이와같은 행사에 부녀자들이 나와 마음껏 바라보는 행위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위’라 여겼던 것이다. 신개는 나아가 “지금부터 부녀자들의 구경놀이를 일절 금하고 폐풍을 개혁해서 부녀자의 도리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선의 여성들은 이렇게 집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곤장을 100대나 맞을 큰일날 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사람의 본능, 여성의 욕망을 강제로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인가. 

 

■‘한양·금강산 여행이나 시켜주라.’
제주의 김만덕(1739~1812)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기녀 출신인 그는 임금을 상대로 당당히 여행계획서까지 제출했다.
정조 시대의 명재상 채제공(1720~1799)의 <번암문집> ‘만덕전’과 <정조실록> 등의 기록에서 김만덕의 행적을 읽을 수 있다. 김만덕은 원래 제주도 양갓집 규수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기생의 적에 이름을 올린다. 이후 몸가짐을 단정하게 했고, 20살이 되자 관가를 찾아가 “다시 양인이 되겠다”고 울며 호소했다. 그 뜻이 받아들여져 양인으로 회복됐다. 그러나 “용렬한 제주 남자들과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뛰어난 장사수완을 발휘한다. 결국 수십년 사이에 큰 부자가 됐다.
1795년(정조 19년) 제주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조정의 힘이 닿지 못했다. 이때 김만덕은 천금을 들여 육지에서 쌀을 사와 친족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구휼했다. 만덕의 이름이 제주도에 널리 퍼졌다. 1년 뒤인 1796년 제주목사 유사모가 장계를 올려 김만덕의 선행을 보고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정조 임금이 제주 목사를 통해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한가지 들어주겠다”는 명을 내렸다. 한데 김만덕의 대답을 의외였다.
“저는 늙고 자식도 없습니다. 신분을 바꿀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육지로 나가 한양 구경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한양에 가는 길에 금강산도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당시 제주도 여자는 뭍에 오를 수 없다는 금기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 임금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푸짐한 상급과 신분상승도 아닌 그저 ‘서울구경, 금강산 구경’을 조건으로 내건 김만덕의 사연은 한양에서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만덕전’은 “만덕을 둘러싼 소문이 장안에 널리 퍼져 사람들이 다투어 그녀를 만났다”고 기록했다. 김만덕은 당대 조선의 인기스타로 등장한 것이다. 정조 임금이 친히 지금으로 치면 승용차라 할 수 있는 역마(驛馬)까지 내려 김만덕의 한양행을 지시했다.

 

단원 김홍도의 금강산도 초본첩인 <해동 명산 도첩> 중 해금강 앞면.

■대중스타로 떠오른 김만덕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변·중동에 관한 변증’을 보면 만덕을 둘러싼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한양으로 올라온 만덕은 스스로 “내 눈은 중동(重瞳)”이라 말하고 다녔다. 중동이란 눈동자가 두 개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옛날 중국의 순임금이 중동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만덕 스스로 중동이라고 했으니 그 눈동자를 보려던 이들이 줄을 섰다. 역시 호기심을 참지못한 다산 정약용 역시 만덕을 초청해 진위를 물었다.
“너의 눈이 정녕 중동이 맞느냐?”
“맞습니다.”
“모든 사물이 다 둘로 보이느냐?”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산이 가까이 가서 만덕의 눈을 바라보니 눈동자가 두 개인 중동이 아니었다. 만덕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양 사람들은 만덕의 말만 철석같이 믿었다. 이에 다산이 다음과 같이 푸념한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만덕의 눈동자가 두 개라는 설이 횡행하고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공연히 허언을 좋아하니 스스로 어리석게 되는 것이다.”
공경대신을 비롯한 백성들을 일약 대중스타로 떠오른 김만덕을 맹목적으로 치켜세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덕의 한양행, 금강산행에 대한 구체적인 동선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정조 임금이 김만덕을 끔찍하게 여겼다는 사실이 <일성록>과 <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정조는 우선 김만덕이 금강산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가 겨울철임을 감안해서 갖가지 특혜를 배푼다.
“마침 한겨울이라 출발할 수 없었다. 만덕이 비록 천민이지만 의로운 기상은 옛날의 정의로운 협객에 부끄럽지 않다. 봄이 올 때까지 양식을 주고 곧바로 내의원의 차비대령인 행수 의녀로 충원하라. 그래서 수의(首醫)에 소속시켜 각별하게 돌봐주라.”
무슨 특혜인가. 정조는 만덕이 한겨울을 피해 따뜻한 봄날에 금강산 여행을 다녀올 수 있도록 특별대우를 해준 것이다. 만덕이 임시로 받은 내의원 차비대령 의녀 직책은 임금이나 왕실 식구들의 병환에 즉각 투입하기 위해 대령하는 의녀이다. 의녀 가운데서도 의술이 좋고 지위가 높은, 그야말로 선망의 직책이다.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게다가 정조는 만덕을 임금의 주치의인 어의의 휘하에 두도록 특전을 베풀었다. 만덕을 건드리지 말라는 임금의 지엄한 분부였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만덕이 금강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후히 대접하라. 만덕이 지나가는 각 도의 관찰사들은 양식과 경비를 넉넉히 전해라.”
이렇게 만덕은 임금의 보증하에 만백성의 보살핌을 받는 금강산·한양 호화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때가 김만덕의 나이 58살이었다.

옛날부터 명승으로 유명한 ‘총석정’.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14살 때 여행을 결행한 여인
58살 김만덕이 임금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여행을 다녀왔다면 김금원(1817~?)은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에 ‘떠남의 미학’을 실천한 신여성이었다.
그것도 부모의 허락을 얻어 남장차림으로 떠났으니 멋과 낭만을 따지면 현대의 그 어떤 여행가들도 따르지 못할 것 같다. 원주에서 태어난 김금원의 신분은 원래 기녀였다. 기생 금앵이 원래 이름이었다. 그런데 부모는 금원을 마냥 여자아이로만 키우지 않았다. 김금원이 쓴 기행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보면 부모의 교육관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병을 자주 앓아 부모님이 그것을 불쌍히 여겼다. 가사나 바느질 같은 여자 아이의 일을 시키지 않고 문자를 가르쳤다. 덕분에 몇년 가지 않아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대략 통하고 고금의 문장도 본받게 됐다.”
소녀 금원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조선여성이라면 가져야 할 부녀자의 도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담장 밖 여행을 추구했다.
“눈으로 넓고 큰 산하를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온갖 세상사를 겪지 못하면 변화할 수 없고 이치에 도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여자는 오로지 대문밖을 나가지 못하고 오직 음식을 만드는 일이나 논할 뿐이었다.(若女子 則足不出閨門之外 惟酒食是議)”
금원은 “여자는 세상과 절연된 깊숙한 규방에서 살면서 총명과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마침내 자취없이 사라지고 만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냐”고 반문한다.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 부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불행이지만 하늘은 나에게 산수를 즐기는 어진 성품과 눈과 귀로 듣고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또 이를 글로 쓸 수 있는 능력까지 주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 깊숙이 틀어앉아 여자의 길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금원은 “그래서 그 뜻대로 결행하라고 했으니 내 뜻도 결정됐다”고 했다. 여행을 결행한다는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14살 어린 딸의 가출과 여행 선언을 선선히 응할 부모는 없었다. 그러나 소녀의 고집을 결코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소녀는 이를 두고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가 나와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고, 천리마가 굴레를 벗고 천리를 달리는 기분’이라 했다.

 

■남장을 하고 훌훌 떠난 여인
김금원이 원주 감영의 기녀, 즉 영기(營妓) 신분으로 참여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연소답청’, ‘주유청강’ 등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등을 보면 사대부들이 기녀와 종자, 아전, 악공, 승려 등을 대동하고 유람을 떠나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인다. 김금원의 기행문(<호동서락기>)을 봐도 심상치않은 냄새가 풍기기는 하다. ‘푸른 색 휘장을 두른 가마 안에 앉았다’ 든지, ‘돈을 주고 백어를 사서 회를 쳐 먹었다’든지, ‘차 끓이는 아이에게 차를 내오라 하고 먹을 갈아 시를 지었다’든지, ‘장안사에서 산채를 풍성하게 갖춘 점심상을 제공받아 배불리 먹었다’든지 하는 표현들이 나온다. 만약 그랬다면 금원은 기녀 가운데서도 시사(詩詞)를 담당하는 나름 고고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짙다.
어쨌든 소녀는 남장을 하고 행장을 꾸려 충북 제천 의림지로 향했다.
그 때가 1830년이니까 우리 나이로 14살이지만, 만 나이로 치면 13살이었다.
“때는 춘삼월 내 나이 14살,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수레에 앉았다. 제천 의림지를 찾았는데 애교 띤 꽃들은 웃음을 터뜨리려 하고 꽃다운 풀들은 안개 같았다.”
소녀는 단양의 선암계곡, 영춘의 천연굴, 청풍의 옥순봉을 둘러본다. 특히 단양8경의 하나인 옥순봉을 구경한 뒤의 벅찬 감동을 시로 남겼다.   
“시인들은 풍월 읊느라 잠시의 틈도 없고(詩家風月暫無閒) 조물주는 인간을 시기해서 산 밖으로 쫓아냈네.(造物猜人送出山) 산새는 산 밖의 일을 알지 못하고(山鳥不知山外事) 봄빛은 숲 속에 있다고 지저귀네.(謂言春色在林間)”
시인들이 옥순봉의 풍경에 넋이 나가 시를 짓자 조물주가 시인들을 시기해서 산 밖으로 쫓아낸다는 것. 또 산새 역시 산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옥순봉의 봄 풍경에 취해 지저귀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김금원이 여행길에 평해(울진)의 월송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지었다는 시는 점입가경이다. “덧없는 세상, 사람의 생(生)이 가련할 뿐(浮世人生只堪可憐也哉)”라 했다. 이것이 과연 14살 짜리 소녀의 시인가.      

김홍도의 1796년 작 ‘옥순봉도

 

■14살 소녀의 시와 기행문이 맞나
이후 김금원 소녀는 장안사-옥경대-표훈사-백운대-보덕굴-백천동-만폭동-금강문-감로수 등 내외 금강산 전체를 둘러보았다.  
“눈쌓인 언덕 같고, 불상 같고, 칼든 군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도 같고, 연꽃과도 같고, 파초잎과도 같다. 치켜올린 것도 있고 내려뜨린 것도 있고 더러는 가로 갔고 더러는 세로 섰으며 일어서 있는 것도 쭈그리고 있는 것도 있다.”
김금원이 금강산 정양사의 문루인 혈성루에 올라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묘사한 대목이다. 봉우리마다 각기 다른 기이한 형상을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으며 형용할 수 없는 천태만상을 리듬감 있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금강산 여행을 마친 김금원은 총석정-삼일포-청간정-의상대-경포대-죽서루 등 관동팔경을 두루 거친다. 김금원이 통천의 총석정을 감상한 뒤의 기행문을 보라.
“바닷속 언덕 가까운 곳에 서있는 돌은 모두 육면으로 깎아 하나의 떨기로 묶어 놓았는데 거의 10여개나 된다. 매 떨기의 돌은 어떤 것은 7~8개의 기둥이요, 어떤 것은 10여 개의 기둥이다. 그 돌들이 가지런한 치아처럼 벌어졌는데 쇠줄로 갈아낸듯 하나하나가 6면으로 조금도 굴곡이 없고 넓고 좁은 것도 없이 정밀하고 조밀조밀하다.”
얼마나 공감각적인 묘사인가. 돌기둥과 떨기를 이룬 돌의 개수, 떨기의 수, 크기와 색깔, 벌어져 있는 모습 등을 생생한 필치로 묘사한다.
김금원은 이후에도 대승폭포·백담사·수렴동 등 설악산 일대와 한양의 남산-시내-세검정-정릉입구-관왕묘 등을 두루 살피고 여행을 마무리 짓는다.
만감이 교차했을 터이다. 그러나 김금원은 평범한 조선의 여성으로 돌아와야 했던 순간을 담담한 필치로 전한다.
“군자는 족한 줄 알고 그칠 수 있기에 절도에 맞고 지나치지 않는다. 소인은 마음내키는 대로 곧장 행하기 때문에 흘러가 돌아올 줄 모른다. 지금 유람으로 숙원을 이뤘으니 멈출만 하다. 이제 본분으로 돌아가 여공에 종사하는 것 또한 옳지 않겠는가. 마침내 남장을 벗어버리니 여자가 되었다.”

 

■사대부의 첩이 된 금원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다. 금원은 1차 여행을 다녀온 뒤 17살 연상인 김덕희(1800~?)의 소실이 된다. 아마도 김덕희가 금원의 머리를 얹어주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김금원은 1845년 평안도 의주 부윤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경기이북-황해도-평안도 지방을 여행하는 행운을 누린다. 김덕희는 가문을 단속해야 하는 본부인 대신 소실인 금원을 데려갔던 것이다. 이것이 김금원의 2차 여행이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용산의 삼호정에 살았던 금원은 1~2차 여행의 경험을 시(詩)를 담은 기행문으로 담는다. 이것이 바로 ‘호동서락기’이다. 그가 쓴 저술동기를 보라.
“지나간 일도 스쳐 지나가면 눈 깜짝할 사이의 꿈에 불과하다.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지금의 금원을 알겠는가.…죽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이요. 평생의 일 헛된 것으로 함께 돌아가는 것은 평생의 꿈이다. 마침내 붓을 당겨 유람의 전말을 대략 기록하니…. 읊은 시들도 흩어져 잃어버릴까 역시 간략하게 기록한다.”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김금원이라는 존재를 알겠냐”는 자의식이 담긴 기록정신. 금원은 여자로서가 아니라 여행작가로서, 시인으로서 후대에 당당하게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안난욱, ‘김금원의 호동서락기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9
서현아, ‘호동서락기에 나타난 김금원의 삶과 의식 지향 연구’,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논문, 2011

이숙인, ‘깊은 규방에서 나와 신천지를 마주하다’,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201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