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이 아닌 이셩(성)이라고?’ 최근 수원시가 설립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개최한 기획전의 제목이 ‘셩: 판타스틱 시티’이다. 수원이라는 도시를 상징하는 두 개의 성을 주제로 한다는 것인데, 하나는 ‘수원 화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셩(성)’이란다. 그런데 ‘이셩(성)’이 뭔가하면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재위 1776~1800)란다.
혼란스럽지 않은가. 잘 알려진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示+示)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산’이라는 사극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정조대왕의 이름은 이산도 맞고, 이셩(성)도 맞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1846년(헌종 12년)에 간행된 <어정시운>. 주로 한시를 창작할 때에 운자를 찾아보는 사전으로 이용되었다. 산(示+示)자에 정조의 어휘(이름)임을 표시하고 난외에도 어휘임을 밝혔다. |안대회 교수의 논문에서
■정조의 이름은 원래 이산이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예전에는 이름이 일종의 신성성을 지녔다. 일반 백성도 조상이나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보통은 자(字)나 호를 사용했는데, 상대방을 욕하고 싶으면 곧장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도 ‘그에게 모욕감을 안겨주는’ 효과를 얻었다.
일반 백성도 그럴진대 군주의 이름이야 말해 무엇할까.
군주의 이름은 재위 때는 어명(御名), 사후에는 어휘(御諱)라 했는데 휘(諱)자에는 사람의 이름이라는 뜻과 함께 ‘숨기다, 피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높은 사람의 이름은 감추고 숨기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조가 즉위(1776년 3월10일)한 지 두 달 뒤인 1776년 5월22일 <정조실록>은 정조 이름과 관련해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호조의 산학산원(算學算員)을 주학계사(籌學計士)로, 이산(理山)은 초산(楚山)으로, 이산(尼山)은 이성(尼城)으로 고쳤다. 발음이 어명(御名)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슨 말일까. 정조 임금의 어휘, 즉 이름과 발음이 같은 평안도와 충청도의 이산을 초산(평안도)과 이성(충청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북한 자강도 초산군은 바로 정조의 이름과 같다(이산·理山)는 이유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됐다. 요즘의 산수와 수학을 담당하는 산학(算學)과 그 소속 공무원인 산원(算員)을 같은 의미인 주학(籌學)과 계사(計士)로 각각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산(算)’ 자 역시 임금의 이름인 ‘산(示+示)’의 고어(古語)로 인식됐기 때문에, 주학이니 계사니 하는 대체어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영조 때 명신 홍계희(1703~1771)의 저작인 <삼운성휘>의 ‘경부(梗部)’. ‘셩(성)’에 서성의 이름자(삼수면에 省자)가 들어있다. <규장전운> 편찬 때 이 ‘성’자를 빼내고 그 자리에 ‘示+示’자를 넣고 ‘성’으로 읽도록 했다.|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즉 18세기에 통용되던 자전에 따르면 정조의 이름(示+示)은 당연히 ‘산’으로 읽어야 한다. 당대 대표적인 자전은 <자휘>였다. 그런데 <자휘>는 “示+示의 음은 산(算)인데, ‘밝게 살펴서 헤아린다’는 뜻”이라 풀이했다.
또 후한 허신(58~147)이 한문의 내력을 집대성한 <설문해자>에서 인용한 <일주서>는 “선비가 나누어 밝히는 ‘示+示’이고, 균등하게 나누어 보여준다는 뜻인데, 산(算)으로 읽는다”고 했다. 또하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또 있다.
1781년(정조 15년) 정조는 박성원(1697~1767)의 편저인 <정음통역>에 직접 서문을 지어 내각에서 간행토록 했다. 그런데 정조가 직접 신하들에게 하사(內賜)한 간본 가운데 강이천(1769~1801)이 소장한 책 중의 ‘算’ 자 부분에 원래는 없던 어명 표시를 붓으로 하고, 상단에 ‘당저어휘(當저御諱·현재 재위중인 임금의 이름)’이라는 글씨를 써놓았다. 정조가 <정음통역>에 서문을 지은 것이 1781년이고, 그 책을 소장한 강이천이 죽은 해가 1801년이므로 ‘당저’, 즉 현재 재위중인 임금은 바로 정조를 일컫는다.
정조가 승하한 것은 1800년이었으니 말년까지도 정조의 이름은 ‘이산’으로 읽혔음이 틀림없다.
■‘이성’으로 둔갑한 정조의 이름
그렇다면 왜 ‘이산’이 아니라 ‘이성’도 맞다고 하는 것인가.
다름아닌 정조의 명에 따라 1796년 편찬된 <규장전운>과 옥편인 <전운옥편>, 그리고 <자전석요> 등에서 ‘示+示’자를 ‘셩’으로 읽었다는 것이다. 단모음화를 고려한다면 ‘셩’은 ‘성’이다.
궁금증이 생긴다. 정조 말년에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산’이 ‘셩(성)’으로 바뀌었을까.
여기에 조선의 중흥군주이며, 세종에 버금가는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정조의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막무가내 조치’가 취해진다. 지금 생각해봐도 수수께끼 같은 일의 전말을 살펴보자.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뭇 신하들의 스승’을 자처한 정조의 만기친람은 유명했다. 정조는 운서(韻書)에도 각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운서는 한자의 운을 중심으로 분류하여 일정한 순서로 배열한 자전이다.
정조는 창작의 기준이 되는 사전인 운서 제작에 힘을 쏟았다. 특히 1792년(정조 16년) 이덕무(1741~1793) 등에게 <규장전운>의 편찬을 명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교정과 교감을 보았던 <규장전운>은 4년 뒤인 1796년(정조 20년) 완성된다. 정조 시대 학문과 기술의 결정체로 평가할 수 있다.
19세기 문사인 옥산 장지완(1806~?)이 <규장전운>의 오류를 교정하고, 간행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한 <비연외초> ‘규장전운간오’의 내용. “정조의 이름을 처음에는 산(算)으로 읽었지만 고증을 거쳐 경부(梗部)에 소속시켰다…계란(界欄·인쇄의 판식)이 벌써 정해졌기 때문에 ‘셩(삼 수변에 省)’자를 삭제하고 어명을 채워넣었다. 왜냐면 ‘성’자는 서성의 이름으로 자손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라 했다.|장서각 소장
■'셩(성)'자를 빼내고 그 자리에 정조의 이름자를 집어넣은 이유
그런데 완성단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당시 널리 통용되던 <삼운통고>나 <삼운어휘>, <정음통석> 등의 운서에서 ‘示+示’자는 들어있지 않았다. 왜냐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른바 벽자였던데다 ‘산(算)’자로 통용되어 그냥 ‘산’으로 읽으면 되었기에 굳이 운서에 넣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정조는 <규장전운>의 편찬이 마무리되어 판각까지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부랴부랴 ‘示+示’자를 포함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계란(界欄·인쇄의 판식·틀)이 벌써 완성되었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다른 글자를 빼고 임금의 이름자인 ‘示+示’자를 대신 채워 넣어야 했다. 이때 그동안 ‘산(算)’으로 읽었던 ‘示+示’를 갑자기 ‘경(梗)’부에 포함시켜 발음을 ‘셩(성)’으로 바꿨다. 이때 뽑혀나간 글자는 ‘셩(삼수변에 省)’자였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규장전운>은 조선왕조 운서의 근간이 되어 모든 독음의 표준이 되었다. 이후 편찬된 모든 서적에 이 독음이 적용됐다. 정조는 급기야 1796년(정조 20년) 8월11일 1만부에 달하는 <규장전운>을 인쇄했다. 이로써 1796년 8월11일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이산’이었던 정조의 이름은 이후에 ‘이성’으로 바뀌었다. 이후 조선에서 간행된 운서에서 ‘셩(성·삼수 변에 省)’자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
■자손 번성한 가문의 이름을 채갔다
그렇지만 하늘이 두쪽난다 해도 ‘示+示’는 ‘산(算)’의 고어이며, 따라서 정조의 이름은 ‘이산’으로 일컬어져야 한다. 그것이 자전과 운서의 상식이다.
그러나 안대회 성균관대교수(한문학)은 “대체 이 글자를 왜 셩(성)으로 읽어 경(梗)부에 집어넣고 굳이 기존의 셩(성)자를 뽑아버렸는지 그 학술적인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 다른 분도 아니고 조선의 중흥군주인 정조대왕이라면 누가봐도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야 한다.
이와 관련, 19세기 저명한 중인 문사인 옥산 장지완(1806~?)이 <규장전운>의 오류를 교정하고, 간행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한 <비연외초>·‘규장전운간오’를 보면 그저 헛웃음이 나온다.
“정묘(정조)의 어휘는 처음에 산(算)으로 읽었다…그러나 고증을 거쳐 경부(梗部)에 소속시켰다…계란(界欄·인쇄의 판식)이 벌써 정해졌기 때문에 ‘셩(삼 수변에 省)’자를 삭제하고 어명을 채워넣었다. 왜냐면 ‘성’자는 서성의 이름으로 자손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규장전운>의 편찬(1796년)을 계기로 정조의 이름(어명)을 ‘이산’에서 ‘이셩(성)’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사실 책(<규장전운>)의 판각이 완성된 상태에서 임금의 어명(示+示)을 새롭게 집어넣기로 했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글자를 넣을 앞 뒤 전체 판식을 새롭게 짜서 특정한 부분에 포함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난관에 봉착해서 짜낸 묘안이 바로 아예 ‘특정 글자’를 완전히 빼버리고 그 자리에 집어넣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셩(성)’자를 빼고 그 자리에 임금의 이름자를 채워넣었을까. 그리고는 산(算)으로 읽어야 맞는 글자를 “앞으로는 ‘셩(성)’으로 읽으라”고 우겼을까. 장지완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바로 “‘서성’이라는 인물의 자손이 번성했기 때문”이라고….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 말이 맞다면 조선의 중흥군주 정조대왕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선조~인조 시대를 살았던 서성(1558~1631)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경화세족인 대구 서씨의 중흥조였다. 서성의 후손은 서종태(1652~1719). 서명선(1728~1791), 서명웅(1716~1787) 등 정승 판서와, 서호수(1736~1799)·서유구(1764~1845) 같은 유명한 학자들을 다수 배출했다. 그렇다면 좀 이해는 간다.
1781년 정조가 친히 서문을 써서 내각에서 간행한 박성원 편저의 <정음통석>. 이 책은 본래 강이천이 소장한 것인데 한부(翰部)의 산(算)자에 표식을 가하고 상부 난 외에 ‘당저어휘(當저御諱·현재 재위 중인 임금)’라 기입했다. |안대회 교수의 논문에서
■자식부자 세종대왕과는 사뭇 다른 정조
정조에게는 깊은 고민이 있었다. 바로 자식이 귀하다는 것이었다. 당뇨병을 비롯해 온갖 질병에 시달렸는데도 무려 18남4녀를 낳았고, 그것도 정부인인 소헌왕후와 8남2녀를 생산한 ‘롤모델’ 세종대왕을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게다가 세종의 자식들은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 등 하나같이 다재다능한 이들이 아닌가.
반면 정조는 정부인인 효의왕후 김씨(1753~1821)와는 자손을 얻지 못했고, 의빈 성씨(1753~1786)와 낳은 아들(문효세자)은 2살도 안되어 요절했다. 딸은 1년도 못살고 죽었다. 38살의 늦은 나이에 수빈 박씨(1770~1822)와의 사이에서 아들(순조·1790~1834) 1명과 딸(숙선옹주·1793~1836) 1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는 “정조는 정부인인 효의왕후와는 금슬이 심하게 좋지 않았고, 그렇다고 총애하는 다른 궁인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러고보면 공부를 지극히 좋아하고 일중독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큼 정사에 심혈을 기울인 두 분(세종과 정조)이지만 이른바 ‘여색’에 관한한 다른 성향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식은 얻고 싶지만 그럴 기회는 잘 만들지 않고….
희한한 일도 있었다. 후궁인 화빈 윤씨(1781년)와 정부인 효의왕후(1787년)의 잇단 임신 소식에 산실청을 설치하는 등 기대를 한몸에 모았지만 두 사람 다 30개월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화빈 윤씨(1765~1824)와 효의왕후 모두 산실청이 철수되는 촌극을 빚었다.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정조와 부인들의 염원 때문인지 시쳇말로 ‘상상임신’을 했음에 틀림없다.
<규장전운>을 편찬한 1796년이면 유일한 아들인 세자(순조)가 7살 되던 해였다. 자손이 풍성해야 왕실이 번창하는 법이라는데 달랑 아들이 한 명이라니…. 게다가 45살의 정조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정조로서는 마음이 급했을 것이다. 그래서 막 완성한 <규장전운>에 자신의 이름을 자손이 번창한 인물(서성)의 이름자(성)에 어거지로 밀어넣었을 것이다. 남의 묘자리를 파내고 자기 무덤을 써서 가문의 번창을 꾀한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정조 답지 않은 무리수를 둬가며 왕실의 번창을 바랐던 정조의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아들(순조)과 손자(효명세자·1809~1830), 증손자(헌종·재위 1834~1849)까지 달랑 아들 1명씩만 두었고, 결국 헌종에서 대가 끊겼으니 말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정조대왕이었으니 만큼 순리를 좇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선시대 국왕의 업적을 뽑아 기록한 <국조보감>. 세종대왕의 이름과 자를 붉은 종이로 가려놓았다. 임금의 이름자를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기휘> 때문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산→이성→노성으로 바뀐 마을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정조가 ‘이산’에서 ‘이셩(성)’으로 독음을 바꿨음에도 별다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800년(순조 즉위년) 8월이 되어서야 “예전에 이산(尼山)에서 이성(尼城)으로 바꾼 충청도 고을 이름을 다시 노성(魯城)으로 고쳤고, 함경도 이성(利城)도 이원(利原)으로 바꾸었다”는 <순조실록> 등의 기사가 등장한다. 특히 정조 재위 시기에 고을이름이 임금 이름과 같은 ‘이산’이라해서 ‘이성’으로 고친 충청도 고을은 임금이 ‘이성’으로 개명하자, 이번에는 다시 ‘노성’으로 이름이 바뀐 기구한 사연이 소개되고 있다.
18·19세기 인물인 노상추(1746~1829)의 관직일기인 <노상추일기>는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규장전운>에 따라 어휘(승하한 임금의 이름)의 자음을 ‘성’자로 바꾸었다. 따라서 어휘와 음과 훈이 같은 고을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상주를 올렸는데 주상(정조)께서 ‘그냥 두라’고 하셨다. 그러다 이제….”
정조가 <규장전운> 편찬 이후에도 “고을 이름이 바뀐 과인의 이름(이성)과 같더라도 고치지 말고 그냥 두라”는 특명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한 이후 비로소 ‘개명’에 따른 후속조치를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속조치는 고을 뿐 아니라 ‘이성’이라는 발음이 이름에 들어간 관리들의 잇단 개명으로 이어졌다.
행호군 이성묵이 이철묵으로, 이성순이 이영순으로, 이성연이 이영연으로 바꾸었다. 대사헌 이성보는 이직보로, 전 군수 이성구는 이원구로, 연천현감 이성렴은 이경렴으로, 무관 송이성은 송이경으로, 이성도는 이만도로 각각 개명했다.
■원래는 이순신 이름도 바꿔야 했다
이름을 ‘이산’에서 ‘이성’으로 바꾼 정조가 일관되게 “고을이나 사람 이름이 과인과 같다해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임금 이름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이나 고을 이름도 중요한 것인데 굳이 번거롭게 바꿀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규장전운> 반포 직후인 1796년(정조 20년) 9월15일 정조와 우의정 윤시동(1729~1797)의 대화가 이것을 반영한다. 즉 윤시동은 “임금의 이름과 같은 고을의 읍호를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아뢰었다.
윤시동은 특히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인 <일록>의 사이에 있는 글자를 감히 신들이 부를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일록>의 가운데 있는 글자는 바로 성(省)이며, 그 책인 <일성록>이다. 그러자 정조는 ”읍명과 인명도 고칠 필요가 없다는데, 책명을 감히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뭐야“고 꾸짖었다.
“며칠 전에 화성의 공사를 마친 후에 올린 첨부문서에 ‘이성연’을 ‘이연성’으로 썼던데 그릴 필요가 없다…선대왕(영조)께서도 이 충무공(이순신)의 이름을 고친 적이 없지 않느냐.”
이 충무공의 이름인 ‘이순신(李舜臣)’의 ‘순’자는 숙종(재위 1674~1720)의 이름인 이순(李+불 火변에 享)과 발음이 같다. 정조는 “그렇지만 증조 할아버지(숙종)를 누구보다도 더욱 공경하던 할아버지(영조)도 “이순신의 이름을 고치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조선 임금들의 이름. 3대 태종(방원)과 6대 단종(홍위)를 빼고는 모두 외자 이름이다. 태조 이셩계와 정종 이방과, 철종 이원범, 고종 이명복 등은 왕위에 오른 뒤 외자로 고쳤다. |정종수의 논문에서
■영조가 40년간 본명을 숨긴 이유
아닌게 아니라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는 ‘지나친 휘피(諱避·임금의 이름을 피하는 것)는 금물’이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다. 즉 영조 임금이 40년간이나 입밖에 내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금·昑)을 우연히 발설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다. 임금의 본명을 처음 알게 된 승지들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보고문을 읽어올릴 때 어느 대목에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보고문에 임금의 이름(금·昑)자와 같은 음의 글자가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영조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그래서 지난 40년간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승지들은 그럴 필요없다. 분명히 읽어라.”
영조는 특히 “이름 자와 음이 같은 이름조차 피하는 것은 지나치다”면서 국왕의 이름을 회피하는 범위를 좁히라는 명을 내렸다.(<연려실기술> ‘국조전고·휘피’)
물론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인용하는 것이야 임금을 능멸한 ‘역적죄’로 처벌받아도 싸다. 그러나 기왕에 지은 사람이나 고을의 이름이 나중에 즉위한 군주의 이름과 같아지는 것이야 어쩌겠는가. 그리고 영조와 정조처럼 ‘괜찮다’고 누누이 강조하는데 굳이 바꿔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 신하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군주가 ‘괜찮다’고 해도 반드시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린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좋은 시절이라면 두루두루 좋게 넘어가겠지만 만약 꼬투리를 잡히면 멸문의 화까지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멸문의 화를 당한 중국인들
약 300년전 중국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예로 들자.
1726년(옹정 4년), 청나라 이부시랑 사사정이 지방 향시에 낸 시험문제는 ‘방기천리(邦幾千里) 유민소지(維民所止)’였다. 시제는 <시경> ‘상송(商頌)·현조’를 인용했다. ‘도성에서 사방 천리 되는 지역은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뜯어봐도 어떤 정치적인 색채가 없었던 시제였다. 그런데 사사정은 끔찍한 화를 당한다. 시제의 첫글자인 ‘유(維)’자가 ‘옹(雍)’자의 머리를 없앴고, 마지막 글자인 ‘지(止)’가 ‘정(正)자’의 발을 자른 것이라는 모함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사정은 ‘옹정(雍正)’ 황제를 시해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사사정은 결국 목이 잘려 효수됐고, 집안도 멸문의 화를 당하고 말았다.
기휘(忌諱)’, 즉 황제(임금)이나 성인(공자·주공·노자 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금기를 어겼다는 올가미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1757년(건륭 22년) 강서의 팽가병은 가문의 족보 <대팽통기>를 간행하면 건륭제를 ‘기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단됐다. 팽가병은 자살, 집안 식구들은 모조리 참수형을 당했다. 강서의 왕석후는 사전인 <자관>을 펴낼 때 범례에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이름을 집어넣어 대역죄로 처단된다. 그와 16세 이상 친족은 처형되고, 처첩과 16세 이하 어린아이들은 원지로 유배되거나 공신들의 노예가 됐다.
■세종대왕의 본명 이도에 얽힌 이야기
조선의 관리들 역시 이러한 중국의 예를 잘 알기에 임금의 이름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모두 피하려 했다.
군주를 향한 예우이기도 했지만, 언제 트집을 잡힐 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대왕 치세에도 예외가 없었다. 세종의 이름은 ‘이도’였다. 그런데 세종이 즉위하자(1418년) 개성 유후 이도분(李都芬)은 이사분(李思芬)으로 고쳤다. 충청도 공주의 교통통신시설인 ‘이도역(利道驛)’도 ‘이인역(利仁驛)’이 됐다. 임금의 이름과 한자가 같지 않는데도 단지 음이 같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1875년(고종 12년) 고종은 왕세자(순종)의 이름을 두고 빈청에서 올린 ‘3개의 후보’(삼망) 가운데 ‘척(土+石)’을 낙점했다. 이렇듯 임금이 될 세자의 이름은 쉽게 쓰이지 않는 한자나 혹은 없는 글자를 만들어 지었다. |임민혁의 단행본에서
■대구와 공자의 사연
대구(大邱)의 명칭은 달구벌이다. ‘넓은 공간(達)의 마을(伐)’의 뜻이다. 그러므로 원래는 ‘대구(大丘)’라 써야 한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년) 대구 유학자 이양채가 “대구 향교에서 공자께 제사를 지내는데 축문에 ‘대구(大丘) 판관 아무개’라 써는데 이게 영 불편하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공자의 이름이 원래 구(丘)인데, 축문을 쓰면서 공자의 이름을 함부로 쓰게 되니 이 때문에 인심이 불안해진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지난 300년 동안 중앙의 많은 선비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이양채 같은 자보다 못해서 지금까지 가만 있었겠느냐”고 일축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780년(정조 4년) 정조가 즉위한 직후 대구(大丘)는 지금의 대구(大邱)로 은근슬쩍 바뀌어 표기되고 만다.
■안향이 안유로 바뀐 이유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최초의 주자학자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안향(安珦·1234~1306년)이다. 그런데 안향의 이름은 140여년이 지난 조선조 문종(재위 1450~1452) 때부터 ‘안유(安裕)’로 슬그머니 바뀐다. 왜냐. 문종의 이름이 향(珦)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촌극도 있었다. 1419년(세종 1년), 우의정을 지낸 류관(柳觀·1346~1433)의 아들 류계문(1383~1445)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됐다. 지금으로 치면 충청도지사가 되었으니 가문의 경사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류계문은 부임을 매우 꺼려했다.
이유는 딱 하나. 관찰사(觀察使)의 ‘관(觀)’자가 부친의 이름과 같다는 것이었다. 직함을 부르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이름을 범하는 격이니 도저히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랴. 결국 아버지(류관·柳觀)가 이름을 ‘관(觀)’에서 ‘관(寬)’으로 바꾸고 나서야 아들이 임지로 떠났다.
조선 뿐이 아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삼국사기>는 고구려 대막리지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기록했다. 중국측 기록인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등도 모두 천개소문으로 돼있다.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연·李淵)을 피하기 위해 ‘연씨’가 ‘천씨’로 둔갑한 것이다.
■임금의 이름은 왜 어려운 외자인가
그런데 역대 군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임금의 이름을 외자로, 그것도 매우 어렵거나 사전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를 일부러 만들어 짓는다는 것이다. 475년 동안 34대의 국왕이 거쳐간 고려의 임금 이름은 모두 외자였다. 1대 태조(건·建), 2대 혜종(무·武), 3대 정종(요·堯), 4대 광종(소·昭)….
조선은 어떤가. 3대 태종(방원)과 6대 단종(홍위·弘暐)를 뺀 나머지 25명의 국왕 이름이 외자이다. 조선 건국 이전에 지은 태조(이성계)와 2대 정종(방과), 3대 태종(방원)의 이름만 두자였다. 그러나 그것도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이후 성계→단(旦)으로, 정종은 방과→경(日+敬)으로 각각 바꿨다. 그러니 두 자 이름 임금은 태종 이방원 뿐이었다. 왕족이지만 강화도에서 평민처럼 살았던 이원범은 철종으로 즉위하자 외자인 ‘변(日+弁)’으로 개명했다. 또 초명이 이명복이었던 고종은 왕위에 오르자 역시 ‘희(혹은 형)’로 바꿨다.
역대 국왕들이 사전에도 없는 그 어려운 한자를, 그것도 외자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씨’였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황제나 임금, 옛 성현의 이름을 피해야 했던 ‘기휘(피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제도였다. 그러니 임금으로서는 피해야 하는 글자를 한자라도 줄여 백성들의 편의를 돌봐야 했다.
그렇기에 역대 임금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희귀한 글자를 골라썼고, 심지어는 사전에도 없는 한자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선조는 아예 역대 임금들의 이름을 대신하는 글자를 제정하기도 했다.
이도(세종), 이향(문종), 이유(세조), 이금(영조), 이산 혹은 이성(정조)…. 사전에도 찾을 수 없는 그 어려운 외자 이름을 왜 썼나 싶지만 그 이름 속에 담긴 코드는 그래도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였음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안대회, ‘정조 어휘의 개정: 이산과 이성-<규장전운>의 편찬과 관련하여’, <한국문화> 52권 52호,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2010
남현희 편역, <일득록:정조대왕 어록>, 문자향, 2008
정종수, ‘조선시대 국왕의 호칭과 묘호’, <동원학술논문집> 제14집, 국립중앙박물관·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2
한용수, ‘韓中避諱小考’, <한중인문학연구> 제28집, 한중인문학회, 2009
임민혁, <왕의 이름, 묘호>(하늘의 이름으로 역사를 심판하다),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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