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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18세기 조선 재벌들의 돈버는 법과 베푸는 법

“이진욱의 장례를 치르는 날… 멀거나 가까운 사이를 따질 것 없이 다들 부의금을 보내고 찾아와 조문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빈털터리 고아로 태어나 큰돈을 번 18세기 부자 이진욱의 장례식 풍경이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을 보기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이진욱의 장례식을 보면 그 어떤 재상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추구한 조선 사회의 도덕 기준으로 본다면 이진욱의 ‘비루한 인생’을 좋게 평가할 수는 없다. “집안의 살람살이는 어찌되는지 살피지 않았다”(不問産業)든가, “생업에 힘쓰지 않았다”(不治産業)든가 하는 것은 당대 조선사회의 미덕이었다. 

조선 영조시기에 식니당 이재운이 쓴 <해동화식전>. 이재운은 부를 경시하고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조선사회에서 ‘부는 미덕이고, 가난은 악덕’이라고 주장했다. |안대회 교수 제공  

이것을 포장하는 말로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지 않은가. 이황(1501~1570)이나 이이(1536~1584) 역시 “가난을 벗어나랴고 치부에 힘쓰지말라”고 단속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오히려 ‘가난이 악덕이고, 부는 미덕’이라고 주장한 이진욱 같은 사람을 ‘존경받아야 할 인물’로 평가한 이가 있었다. 18세기 문인 식니당 이재운(1721~1782)이다.

이재운은 “부라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는 맛좋은 생선회나 구운 고기 같은 것”이라면서 “군자 역시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운은 공자까지도 공부하라는 <시경>의 “군자는 상인이 세 곱절의 이익을 남기며 장사하는 것을 안다네”라는 구절을 들어 양반도 상인처럼 상행위를 적극적으로 해도 좋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8세기 재테크 서적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가 최근 발굴한 이재운의 <해동화식전>은 바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경제통념을 뒤집는 이론과 사례를 정리한 조선시대 재테크책이자 조선경제의 실체를 파헤치고 다양한 경영방법을 안내한 경제·경영전문서라 할 수 있다,

<해동화식전>은 1750년 전후에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을 벤치마킹해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조선의 뿌리깊은 경제관념을 뒤엎고 ‘잘난 체 하지맑고 돈 좀 벌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재운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이익 추구의 본능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우는 갓난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 그친다. 100살이 되어 숨이 끊길듯 골골대는 늙은이도 자식들이 고기와 죽을 내어오면 기쁜 표정을 짓는다.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욕망이 번갈아 찾아들고 온갖 걱정이 여기저기 솟아든다. 누구나 부를 좇고 재물을 모으려 한다.”

이재운은 “밤낮으로 갖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면서 “재물 앞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고 역설했다. 

“부유하면 덕이 모여들고 가난하면 악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덕과 악은 복과 벌의 뿌리요. 가난함과 부유함은 또 악행과 덕행의 근본이다.” 

한마디로 이재운은 ‘부자는 나쁘고 빈자는 착하다’는 조선사회의 통념을 배격하고 오히려 ‘부는 미덕이고, 가난은 악덕’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이재운은 또 “사대부의 목표인 수신제가(修身齊家) 역시 부가 없으면 할 수 없고, 부는 생업활동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서 “진정 뛰어난 선비는 계획을 세워 부유한 집안을 만든 뒤 인품도. 학문도 사회적인 명망도 얻으려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안빈낙도’ 운운 하지 말고 ‘서둘어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식구부터 먹여살리라’고 촉구한 것이다. 안대회 교수는 “유수원(1694~1755)을 비롯한 중상주의자들조차 개인에게 부자가 되라고 부추기고 부자가 되는 제테크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면서 “반면 이재운은 양반이니 선비니 하며 체면치레 하지말고 돈 많이 벌라고 대놓고 촉구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재운은 빈곤에 안주하고 오히려 미화하는 사회분위기를 통박했다.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비실비실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밖에서 누구도 상대해주는 이 없었고, 집에 들어와도 모두 그를 밀쳐냈다. 부모도, 자식도, 아내도, 형수도…. 친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구석에 처박아 두었고 친구들도 부끄러이 여겨 술자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이 모두 가난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빨리 밖에 나가 돈을 벌라는 것이다.

‘고생을 참고 근면하게 일하는 방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한양 청파동에 사는 과부 안씨이다. 안씨는 가세가 기울자 늙은 종에게 치부를 전담시켰다. 늙은 종은 결국 10년만에 큰 돈을 벌어 주인 안씨에게 바쳤다. 결국 안씨와 늙은 종 집안 모두 큰 부자가 되었다.|안대회 교수 제공  

■영의정도 부럽지않은 부자들 

이재운은 적극적인 ‘부자예찬론’을 폈다.

“1년 생활비로 100만전(1만냥)을 쓰는 수십명의 부호가 있다. 그의 부와 명예, 권력은 3정승도 저리 가라는 수준이다. 영의정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이 국무총리나 심지어는 대통령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재운은 “또 자수성가로 부를 쌓은 이들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부자는 나라에 세금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는 충성됨이다…집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혀 화목하게 만든다. 이는 효성과 우애의 자애로움이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으니 이는 인자함과 의리와 신의이다. 관혼상제 예식에 신경을 쏟으니 이는 예절바름이다…공경대부들도 부자를 앞다투어 알아주니 관직에 진출하지 않아도 현달한 지위에 오른다. 이는 귀함이다.”

반면 가난한 자들은 어떤가. 이재운은 “가난 탓에 굴욕과 수모를 당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느냐”고 ‘디스’했다.   

“가난한 자들은 세금이나 환곡도 제 때 내지 못한다. 이는 불충이다. 육친을 돌볼 수 없으니 이는 불효다…벼슬을 구하려 권세있는 자에게 애걸해도 누구하나 받아주지 않는다. 이는 천함이다.”


■고아출신 빈털털이 이진욱의 치부 

이재운은 특히 자수성가한 부자 9명의 일대기인 ‘거부열전’을 썼다. 숙종·영조 시대에 실존한 이들이 돈과 부를 놓고 경쟁하는 시장의 생생한 장면을 독특한 문체로 표현했다. 이재운은 열전에서 부자가 되는 법을 5가지로 설명하고 그 5가지 경영법의 전형적인 모델로 5명의 부자를 차례로 등장시켰다.

먼저 ‘재물을 크게 불리는 법’에 등장하는 이진욱이라는 인물은 한양의 고아출신 빈털터리다. 이웃집 거부로부터 은전(銀錢) 1000냥을 받아 동래 왜관에 가서 생면부지의 왜인 머슴을 동업자로 구해 그에게 돈을 맡겨 치부를시작했다. 그 왜인은 일본에 가서 세 배로 자산을 불렸다. 이후 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 때 왜인머슴과 짜고 서북 지역의 인삼을 매점하여 공급했다. 이로써 이진욱은 10배의 이익을 남기고 그중 3분의 1을 왜인에게 주었다. 

그 뒤 이진욱은 한양의 거부로 기녀 사회를 장악하는 등 갑부로 군림했다. 금융자본가로 10분의 2에 달하는 이자를 받고 국제무역 상인에게 자금을 대출했다. 청나라 및 일본과 무역하고, 전국의 시장에 행상을 파견하는 대상인으로 군림했다.


■자린고비의 원조 

‘아끼고 절약하는 방법’은 자린급(煮吝給)으로 충주의 유명한 구두쇠 자린고비의 사연이다. 충북 음성에 살았던 조륵(1595~1649)이 자린고비의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자린고비는 극단적인 절약으로 부를 일구었고, 안동의 유명한 구두쇠 저적(儲積)과 혼사를 맺었다. 이재운은 인색한 방법에 대한 비판적 시각없이 부를 축적하는 방법의 하나로 제시했다. 자린급의 전기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구두쇠 이야기의 변형된 텍스트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서부터 등장한다. 

이재운의 <해동화식전>에는 조선시대 부자 9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부인에게 치부의 전권을 맡겨 부를 되찾은 사연  

‘변화를 일으켜 형통하는 방법’은 부자였다가 돈을 잃은 이의 재기방법이다. 주인공인 호남의 김극술은 조상이 물려준 큰 부를 점차로 잃게 되자 그 부인에게 치부를 맡겼다. 부인의 치부방법은 흥미롭다.

먼저 전재산을 팔아 한양에 올라와 한약재(당귀)를 매점매석하여 큰 이익을 거둔 방법을 썼다. 부인의 치부법은 남편도 몰랐으며, 3년만에 조상 때의 부를 회복했다. 김극술의 부인은 경영철학을 지닌 경영의 귀재로 등장한다. 부인이 경영의 주도권을 쥐고 매점매석이나 이자놀이의 치부법으로 부자가 되는 이야기이다. 


■주인과 종이 함께 부자가 된 사연 

‘고생을 참고 근면하게 일하는 방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한양 청파동에 사는 과부 안씨이다. 안씨는 가세가 기울자 늙은 종에게 치부를 전담시켰다. 늙은 종은 전답을 판 1000냥을 밑천으로 행상을 하기로 작정했다. 늙은 종은 혼자 말에 짐을 싣고 관북(함경도)으로 가다가 강도에게 전재산을 뺏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국 맨몸으로 원산에 가서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상인들의 머슴으로 일해 신뢰를 얻었다. 상인들은 3년만에 그 늙은 종에게 2000냥을 마련했고, 그 종은 이자놀이로 7년만에 무려 13만 냥을 모았다. 이렇게 10년의 갖은 고생 끝에 이 늙은 종은 과부인 안씨에게 돌아와 모든 돈을 바쳤다. 안씨가 주는 3만 냥의 보상도 받지 않았다. 늙은 종이 죽자 안씨는 그 가족을 면천시키고 3만 냥을 주었다. 주인과 종이 함께 부자로 산 케이스다.


■신뢰로 부를 얻은 거지

‘거지로 사는 방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한양의 종로 종각 모퉁이에 사는 거지 자갈쇠(者葛衰)이다.

거지 자갈쇠는 비단을 취급하는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물건과 화폐를 잘 지켜주어 신임을 얻었다.

많은 시전 상인들이 자갈쇠에게 물건을 지키게 하였다. 자갈쇠를 유명하게 만든 사소한 사건이 있었다. 자신이 이자놀이를 하려고 주인에게 빌린 15냥을 다 잃었지만 그 돈을 자신이 갚으려 했던 사건이었다. 거지 신분이지만 절대 남의 돈을 탐내지 않는다는 자갈쇠의 신용은 장안은 물론이고 북경 상인에게까지 알려졌다. 자갈쇠는 거지로서 신용을 지켜 부를 일구었고, 다른 거지들을 돌본 의로운 거지였다. 


■“부자는 현자(賢者)다”

이재운은 부자되는 법에 등장한 5명의 사례 외에도 자수성가형 부자 4명의 열전도 썼다. 이재운은 특히 “부자가 된 사람을 현자라고 표현했고, 부자가 되면 인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중 ‘부부가 합심하여 부를 일군 방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영남 순흥의 평민 김생과 그 부인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신혼부부가 첫날밤에 열심히 일하여 재산을 모으기로 약속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분가하여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여 수천 금을 벌었고, 이후 행상들에게 자금을 빌려주는 치부방법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

수만 냥의 돈으로 불렸다. 


■부인을 10명 두어 부자가 된 평민   

‘대가족을 만들어 큰 부를 일군 방법’은 호남 낙안의 평민 조막선의 사연이다. 조막선은 숙종때인 1695~1700년 사이에 일어난 을병대기근(乙丙大飢饉)으로 유리 걸식하던 9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본처를 포함해 10명의 아내에 30명의 아들과 30명의 며느리를 거느리고 가족 마을을 이루고 대대로 부를 누리며 살아서 그를 찾아갔던 호남관찰사마저 부러워했다.


■나눔정신으로 오히려 부자가 된 선비

‘흉년에 기민을 구제하고 큰 부를 일군 방법’은 한양 선비 최생이 충청도 청주에 낙향하여 큰 부를 일군 사연이다. 명문가 후손인 최생은 가세가 기울고 과거에 떨어지자 재산을 팔아 충청도 청주로 내려갔다. 최생은 노비들에게 “10년 동안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먼저 500냥의 돈으로 곡식을 샀고, 다음 해 또 3000냥으로 곡식을 사들여 4000섬을 창고에 쌓아두었다. 단순한 치부가 아니었다. 다음해 큰 흉년이 들자 최생은 가만 있지 않았다. 마을의 기민 500가구 1300명을 그 곡식으로 구제했고, 농사일도 도왔다. 다행히 그 해에는 큰 풍년이 들어 도움받은 이들이 6만 냥에 해당하는 6만 섬으로 갚았다. 최생은 그 돈으로 쌀을 사고팔아서 나중에는 18만 냥의 거부가 됐다. 그 돈을 자금으로 이웃들에게 행상할 자본을 대주었다. 10년만에 거부가 된 최생은 애초의 약속대로 노비들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 최생의 예는 진정한 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안대회 교수는 “시정사회의 현장과 상인의 심리, 상품과 금전의 거래 장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처저란 고투의 삶을 생동감 넌치는 필치로 묘사했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