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광대 형상인데, 이름하여 국가가 지정한 ‘보물’ 문화재란다. 전북 익산 삼기면 연동리 석불사 법당에 턱하니 자리잡고 있는 불상 이야기다.
언젠가인 지는 모르지만 불상의 본 얼굴은 떨어져 나갔고, 어느 시점에 누군가 새로운 얼굴, 즉 불두(佛頭)을 얹어놓았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 좌상.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백제 시대 최대의 3차원 환조석불로 유명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목이 달아났고 누군가가 새로운 불두를 얹어놓았다. 하지만 ‘광대 형상’의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복원해놓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인자하거나 엄숙해야 할 부처나 보살의 얼굴이 아니다. 기왕 얹어놓을 요량이면 좀 제대로 만들 일이지, 왜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저렇게 흠결있는 불상인데도, 보물(제45호) 대접을 받고 있다. 어떤 반전 매력이 있을까.
우선 이 불상은 ‘땀 흘리는 부처님’으로 알려졌다. 즉 나라에 흉사가 생기기 직전 어김없이 불상에서 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25일 이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 10월 26일의 약 보름 전, 광주 민주항쟁이 벌어진 1980년 5월18일 이전, IMF(국제통화기금) 금융 위기 직전인 1997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일(2009년 5월23일) 이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로 ‘보물 대접’을 할 수는 없다. 불상을 둘러싸고 500년 이상 구전으로 전래된 이야기가 있다. 즉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의기양양 서울로 진격하려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있었다. 지독한 안개였다. 가토가 알아보니 마을 주민들이 ‘왜군이 패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어느 절의 불상에서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가토는 칼을 휘둘러 불상의 목을 쳤다.
그런데 곧바로 맑은 하늘에 소나기가 내렸다. 그 소나기에 왜군의 조총이 젖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무장한 의병들이 이 틈에 왜병을 습격해 대승을 거뒀다. 이게 ‘목 잘린 불상의 사연’이라는 구전설화이다. 그러나 구전설화 만으로 ‘보물대접’을 해주기에는 근거가 너무 박약하다.
연동리 불상의 옛 사진. 광대얼굴에 눈썹과 수염까지 그려놓은 더욱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제공
이 ‘광대 얼굴의 불상’이 보물대접을 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불상이 옷주름이 새겨진 방형대좌(직사각형 형태의 받침대)와 몸(높이 2.09m), 거대한 광배(3.34m)를 갖춘, 현존하는 백제 최대의 환조(丸彫)석불이다. 환조란 한 덩어리의 재료에서 물체의 모양을 전부 입체적으로 만드는 3차원 조각을 뜻한다. 비록 머리는 잘렸지만 7세기 초반대 제작된 백제시대의 불상이라는 가치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백제의 장인들은 여러 형태의 불상을 창조해냈다. 돌을 4면으로 깎아 각 면에 불상을 새긴 사면불상(충남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6세기 후반)과 바위 위에 새긴 마애불상(태안 동문리 및 서산 용현리 마애불·7세기 초) 등에 이어 3차원 입체 불상인 환조불상(연동리 불상·7세기 전반)까지 제작했다.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당당한 어깨, 균형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의 제작시기는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익산에 천도를 꾀했거나 행궁 혹은 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했던 바로 그 무렵이다. 익산에는 무왕이 새 도읍지로 삼으려 했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그리고 무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쌍릉 등 백제 말기의 흔적들이 다수 남아 있다. 연동리 석불사도 바로 당시 성행한 불교유적 중 한 곳이다.
원광대 산학연구소가 제시한 가상복원안 제 1안. 태안 마애삼본존불입상의 좌측여래입상의 두발과 얼굴형, 귀를 바탕으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의 눈 코 입을 앉혔다. |원광대 산학연구소 제공
그렇다면 불상의 머리는 누가 잘랐을까. 정말로 가토 기요마사의 짓일까. 1989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시대에 창건된 사찰과 불상은 12~13세기 무렵(고려 중기) 폐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일제강점기에도 지금의 모습이었다니 그 이전에 누군가 ‘광대 얼굴’을 얹어놓았다는 얘기다.
문화재청과 익산시는 2017년부터 ‘잃어버린 연동리 석불의 얼굴’을 찾아주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익산시의 의뢰를 받은 원광대 산학협력단은 6~7세기대 동북아 불상을 두루 참조하여 가장 이상적인 얼굴을 찾기로 하고 몇가지 안을 지난해 제시한 바 있다. 무엇보다 ‘백제의 미소’를 살리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됐다. 현재 기초 조사 연구서 발간이 끝났고, 현재 바람직한 복원안을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이다.
가상복원 제2안. 제1안에 일본 법륭사(호류지) 금당본존불을 추가했다. 제1안의 머리에 법륭사 본존불의 얼굴형과 눈 코 입을 약간 추가했다.|원광대 산학협력단 제공
문화재청과 익산시가 30일 연동리 불상의 대좌(불상을 놓은 대)를 온전히 볼 수 있도록 불단을 정비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도 바로 복원사업의 한 과정이다. 이 불상은 옷자락이 흘러내려 대좌를 덮고 있는 이른바 상현좌(裳縣座) 형식이다. 그러나 후대(1980년대)에 조성한 목재 불단이 대좌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었다. 문화재청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 추진단의 김승대 연구관은 “이번 정비에서 대좌를 가리고 있던 목재 불단 대신 앞·옆면에 강화유리를 설치하고, 앞면에는 공양구를 올려놓을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의상 익산시청 역사문화재과 학예연구사는 “예불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시민들이 불상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정비작업은 4월 안으로 마무리하여 공개할 계획이며, 불상에 대한 실측조사는 8월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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