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740매의 말갑옷 편, 유구의 무게는 28t. 그러나 신라 전투마의 크기는 현재의 조랑말과 유사하고…. 경주주 ‘쪽샘’ 지구는 4~6세기에 살았던 신라 귀족들의 무덤이 800여기가 집중된 곳으로 유명하다. 2007년부터 20년 예정으로 본격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09년 쪽샘지구 C10호, 즉 5세기 전반 무덤인 목곽묘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가 나왔다. 말갑옷이었다.
쪽샘지구에서 확인된 말갑옷의 복원모습. 신라 기마병은 요즘의 조랑말 크기의 말을 타고 전투에 임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에는 이 말이 우량종이었을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발굴당시 말갑옷은 무덤 주인공의 널방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정연하게 깔려 있었다. 말갑옷의 목·가슴가리개 한쪽에는 사람 갑옷 중 투구와 목가리개가 놓여있었다. 또 말 갑옷의 몸통 가리개 위에는 사람 갑옷 중 대퇴부(허벅지) 부분이 포개져 있었다, 그 아래와 피장자 널방 옆에 달린 부곽에는 토기들과 함께 말머리 가리개(마주·馬胄)와 안장, 재갈 등이 나왔다. 괄목할만한 발굴성과였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삼국시대 개마무사(鎧馬武士·철갑옷으로 무장한 말을 탄 무사)의 실체를 보여준 고고학 자료였기 때문이다.
말갑옷이 확인된 유구 전체를 옮기는 작업. 유구의 무게는 무려 28t에 달해 신중한 사전실험이 필요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1월 총길이 약 290㎝×너비 약 90㎝ 가량인 말갑옷을 복원한 결과를 발표한바 있다. 공개된 말갑옷은 대단했다. 갑옷은 철편을 무수하게 조립해서 만들었는데, 목·가슴가리개 348편, 몸통가리개 250매, 엉덩이 가리개 130매, 몸통 위치불명 12매 등 무려 740매의 철편으로 제작된 말갑옷이었다.
복원을 끝낸 연구소가 공개한 것은 말갑옷(36㎏)과 사람 갑옷(투구·목가리개·허벅지 부분) 등이었다. 그로부터 5개월 지난 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말갑옷(마갑)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최근 발간한 ‘경주 쪽샘지구 신라고분유적Ⅹ-C10호 목곽묘 출토 마주·마갑 조사연구 보고서’에서 무게가 28t에 달한 마갑 유구의 이동 작업을 상세히 설명했다.
말갑옷이 출토된 유구를 강화처리하는 모습. 제대로 된 복원을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사실 1500년만에 빛을 본 말갑옷은 습기와 자외선으로 인해 훼손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연구소측은 먼저 가건물을 세웠고, 바깥과 온도 차를 줄이기 위한 냉방시설과 습기를 제거하는 제습시설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길이 4.4m, 너비 2.2m에 이르는 거대한 마갑 유구를 국내에서 수습한 경험이 전혀 없다. 무엇보다 유물이 나온 목곽묘 토층은 점토질이 있는 흙이 거의 없었고, 10∼30㎝ 크기 냇돌이 포함돼있었다. 때문에 이동 시 중량을 견디고 무게중심을 잡는 것이 관건이었다.
잘못 옮기면 큰일날 판이었다. 실험이 필요했다. 표면 강화 처리를 하고 한지를 부착한 뒤 석고붕대를 감사고 발포 우레탄으로 덮었다. 유구를 들어 올리는 연습을 하기 위해 40㎝ 너비로 흙을 파내고 비닐을 넣어 우레탄을 발포했다. 연습을 마친 연구소는 들뜨거나 분리되는 갑옷 조각을 먼저 빼낸 뒤 2010년 5월 표면 강화 작업을 시작했다. 유구 주변은 연습보다 더 깊은 1.5m 깊이로 파냈다.
고구려 무용총에서 보이는 말탄 사람. 다리가 말 몸통의 밑부분까지 내려와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무용총 벽화와 월성 출토 말뼈를 토대로 신라 기마병의 말을 복원했다.
보고서는 “가건물을 해체한 뒤 1차 크레인 작업을 했을 때 유구 중량은 28t에 달했다”면서 “보존처리실 문을 통과하려면 높이 조절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구를 뒤집어 우레탄과 흙을 걷어냈다”고 밝혔다. 이 작업으로 중량이 18t으로 줄어들었다.
신라 기마병이 탄 말의 제원도 추정했다. 신라 왕성인 월성에서 출토된 말뼈를 토대로 말의 크기를 계산했는데, 당시 말은 높이가 120∼136㎝이며, 평균 128㎝로 판단됐다. 보고서는 “쪽샘에서 출토된 말갑옷을 실제로 입은 말은 현재 조랑말과 유사하거나 조금 큰 크기 말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김헌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은 “고구려 벽화인 무용총에서 보이는 말 탄 사람의 경우도 발이 말의 몸통 밑으로 내려와 있다”면서 “삼국시대의 말은 아마도 지금의 조랑말 크기 정도가 우량종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보고서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재현품을 제작해 제주 한라마에 입히기도 했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르면 6월쯤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쪽샘 목곽묘에서 나온 마갑과 재현품·찰갑·무기류를 전시하고, 향후 찰갑 보고서도 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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