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반도를 방문한 첫번째 서양인은 스페인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2월 왜군을 따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러나 이 기록이 수정될 운명에 놓였다.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1333년(충숙왕 복위2년) 로마 교황 요한 22세가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한다”는 친서의 필사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의 제작팀과 세계종교평화협의회측이 각기 다른 경로로 확보한 라틴어 친서는 경천동지할 내용을 담고 있다.
“존경하는 고려국왕께…”로 시작하는 서한은 “고려왕도 기독교로 개종하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잘 대해줘서 고맙다” “하느님을 잘 섬겨 평화로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라틴어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쳤다는 우광훈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은 더욱 놀라운 내용을 전한다.
요한 22세가 4년 전인 1329년 선종한 원나라·고려 담당 주교(몬테코르비노) 후임으로 신임 니콜라스 사제를 보내면서 ‘신임 주교 또한 괜찮은 사람이니 고려왕께서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이 친서가 충숙왕에게 전달됐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라면 한국교회사를 다시 써야 한다. 14세기에 고려 담당 주교가 오갔고, 고려에 그리스도 신자가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또 교황 사절이 오갈 정도였다면 서양의 금속활자가 고려활자로부터 힌트를 얻었다는 일부 주장에 힘이 실릴 수도 있다. 2005년 서울디지털포럼에 참석한 앨 고어 전 미국부통령은 “스위스 인쇄박물관에서 들었다”면서 당시로서는 얼토당토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구텐베르크는 고려를 방문해서 인쇄술 기록을 가져온 교황청 사절단 친구를 만난 뒤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만약 교황청 비밀문서가 맞다면 뭔가 아귀가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다큐영화팀은 한술 더떠 “취재결과 구텐베르크보다는 당시 교황청이 임시로 존재했던 프랑스 남부 아비뇽의 인쇄업자 왈드 포겔이 금속활자를 전파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아비뇽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바티칸에 가지 못한 교황 클레멘스 5세가 1309년부터 임시 교황청으로 사용한 곳이다. 이후 1376년까지 7명의 교황이 이곳에 머문다.
“이번 취재결과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1444년 아비뇽의 인쇄업자인 왈드 포겔이라는 인물이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확보했습니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13세기 무렵에 이미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은 <남명천하상송증도가>이다. 책의 서문을 보면 고려 무인정권의 실세인 최이(?~1249)가 “이 책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으니 주자본(鑄字本·금속활자본)으로 판각한다. 기해년(1239년)”이라고 기록했다. 지금은 이 책의 목판본만 전해지고 있다.
또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나라의 제도와 법규를 정할 때 참고했던)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그저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은 1377년(공민왕 13)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다.
아비뇽 교황청과 고려의 교류가 사실이라면 고려의 금속활자가 유럽의 금속활자에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물론 아직 교황의 친서가 완전 공개되지 않았다. 호들갑은 잠시 접어둬야 한다. 당연히 실물을 보면서 전문가들이 모여 서지학적 검토를 통해 진위여부를 가려야 한다. 활발한 학술토론의 장이 열리게 생겼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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