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년 9월9일 신라 헌강왕은 월상루에 올라 경주 시내를 바라보며 대신들에게 물었다.
“지금 민간인들이 초가가 아닌 기와집을 짓고(覆屋以瓦不以茅) 나무 대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게 사실이냐”.
대신들은 “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진 것은 모두 전하 덕분”이라 입을 모았다.
<삼국사기>는 “경주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죽 이어졌으며 초가가 하나도 없었고, 풍악과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삼국유사>는 “전성기 경주엔 황금을 입힌 저택(金入宅) 39채를 포함해서 17만8936호가 있었다”고 정확한 숫자까지 기록했다.
신라시대와 견줄 수 없지만 지금도 경주엔 1만2000채에 이르는 기와집(한옥)이 있다.
정부가 ‘고도(古都)이미지 찾기 사업’의 하나로 적극 장려한 덕분이다.
특히 황남동·인왕동·구황동·교동 등 대형고분과 첨성대·월성 등 문화재가 밀집한 역사문화 미관지구엔 2층 이하의 한옥만 짓도록 제한했다.
한옥 신축 땐 8000만~1억원까지 지원해준다. 이렇듯 시공을 초월한 경주의 상징물이던 기와집이 최근의 잇단 지진피해 때문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예컨대 경주의 지진 피해신고 건수(4000여건) 가운데 한옥 피해가 절반인 2000여건에 으린다.
문제는 연면적 100㎡ 이하의 단층이 절대다수인 한옥의 경우 건축법상 내진설계 의무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벽체균열과 기와탈락 등의 피해를 보상 받을 길도 만만치 않다. 완파, 유실, 반파, 침수 등 풍수해 위주로 구분된 현행 재난대책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기와집을 지진피해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한옥 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경주는 어느 곳을 가도 유적이며, 어느 땅을 파도 유물이 쏟아진다.
유적지 주변은 ‘2~6층 이하의 건축’만 가능할 정도로 엄격한 규제를 받는다.
천년고도에 내진설계 기준에 맞춘다는 명목아래 콘크리트 철제 건물로 한옥을 대신할 수는 없다.
도리어 한옥 정책을 보강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옥의 신축 뿐 아니라 유지 보수 때도 지원해주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전문가들과 함께 한옥에 내진설계를 가미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경주의 상징은 ‘기와’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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