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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압구정엔 갈매기가 없다

누정(樓亭)은 예부터 서민의 공간이 아니었다.

2000년 전의 역사서인 <사기>를 보면 “황제가 신선들이 좋아하는 오성십이루(五城十二樓)를 짓고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동성왕과 무왕은 궁성에 못을 파고 누각을 세워 기이한 짐승을 기르고, 군신잔치를 베풀었다”는 <삼국사기> 기록도 있다.

궁중의 휴식공간이던 이같은 누정은 후대에는 음풍농월하던 사대부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가장 유명한 정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압구정일 것이다. 지금도 ‘부티’나는 동네의 상징으로 운위되고 있으니 말이다.

압구정(狎鷗亭)은 송나라의 어진 재상 한기의 서재 이름에서 땄다. 명나라 예겸(1415~1479)이 중국을 방문한 한명회에게 붙여주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훗날 3000냥을 들여 꾸민 것을 그렸다.|간송미술관 소장

“기심(機心·기회를 엿보는 간교한 책략)이 없는 사람이라야 갈매기(鷗)와 친할 수 있다(狎)”는 것이었다. 한명회에게 ‘욕심없이 살아가라’는 덕담의 차원에서 지은 것이다.

그러나 한명회는 다른 길을 갔다. 1481년(성종 12년) 절친인 명나라 사신 정동이 조선을 방문하자 ‘기심’이 발동했다.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싶어하니 허락해달라”고 청한 것이다.

한명회는 세조 때의 공신이자 장순왕후(예종비)와 공혜왕후(성종비)의 아버지였다.

무서울게 없었던 한명회는 궁중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장막을 내려달라고 ‘감히’ 성종에게 요구했다.

기가 막혔던 성종이 “연회는 압구정이 아닌 제천정(왕실소유)에서 베풀라”는 지시를 내렸다. 화가 난 한명회는 “아내가 아프다”면서 제천정 연회에 불참했다. 한명회의 도를 넘는 무례함에 성종 임금도 폭발했다.

압구정 뿐 아니라 한강변에 들어선 사대부의 정자를 모조리 철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앞으로 중국사신이 올때마다 한강변 정자를 모두 돌며 유람하고 연회를 베풀 것이 아니냐. 그 폐단을 어찌 감당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참으로 지당한 어명이 아닌가. 이후 압구정엔 갈매기가 한마리 날지 않았다니 친할 압(狎) 대신에 누를 압(押)자를 썼다는 씁쓸한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조선 후기 문신 엄경수(1672~1718)의 답사기를 토대로 한강변 29곳의 누정을 조사·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소식을 들으니 새삼 욕심을 버려야 갈매기와 친해질 수 있다는 ‘압구정’의 고사가 떠오른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