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4년 2월 일본 미야자키현 난고손 마을에서 열린 시와츠 마츠리를 보고 작성한 역사여행기입니다. 78회 팟캐스트를 방송하면서 참고가 될까해서 올려보았습니다. 팟캐스트와 함께 읽어주세요.>
골프 여행으로는 가벼운 발걸음이리라.
비행기로 불과 1시간30분 거리인 ‘따뜻한 남쪽나라’여서 그럴까. 친구끼리, 부부끼리…. 1월24일, 한 겨울 금요일 낮 인천발 미야자키행 비행기는 골프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사례였다. 미야자키 공항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인 수 십 개의 골프가방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북새통을 뚫고 백제왕의 전설이 숨쉬는 난고손(南鄕村)의 ‘구다라노사토(百濟の里)’, 즉 백제마을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렸지만, 체감거리는 만만치 않았다. 규슈 산맥 끝자락의 심산유곡을 휘감는 산길을 돌고 돌아가는 여정…. 굽이굽이 흐르는 고마루(小丸) 강을 따라 한 1시간30분 정도 갔을까.
저만치에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걷고 있는 마츠리(お祭り) 행렬이 보였다.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와 ‘히키 신사(比木神社)’의 깃발을 들고 자못 진지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와스마츠리(師走祭り)’ 행렬입니다. 1300여 년 전 추격군에 의해 전사한 백제왕(정가왕·미카도 신사)을 그의 아들(복지왕·히키 신사)이 찾아뵙는 정례행사입니다.”(최병식 ‘주류성’ 대표)
행렬은 ‘백제마을(百濟の里)’ 입구에서 잠시 멈춰섰다. 백제왕(정가왕)의 무덤이라는 쓰가노하루(塚の原)에서 왕의 혼백을 위무하는 경건한 제사의식을 치렀다. 필자는 온갖 상념에 빠졌다.
■일본 오지마을에 나타난 백제왕
규슈의 최남단, 그것도 첩천산중의 오지 마을까지 흘러 들어온 백제왕은 대체 누구인가. 그의 아들은 또 누구인가. 1400년이나 흘러온 백제왕의 슬픈 전설이 산골 작은 마을에 서려 있다.
663년, 백제부흥군·왜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 간 백강(금강) 대회전이 벌어진다.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왜 연합군은 나당 연합군과 4차례 접전을 벌였지만 완패하고 만다. 백제부흥군은 완전히 멸망한다. 백제왕·귀족들 상당수가 일본의 나라(奈郞) 쪽으로 망명한다. 전설의 주인공인 정가왕과 복지왕 부자가 이 대목에서 등장한다.
이들은 야마토 정권의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672년 야마토 정권 내부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변란(임신란·壬申亂)이 일어난다. 조카(오토모 황자·大友)가 왕위를 계승하자 삼촌(오아마 황자·大海人)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백제 왕족 일가는 배 2척에 나눠 타고 북규슈로 피란을 떠난다. 그러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서 풍랑을 만난다.
일가는 흘러흘러 남규슈 휴가(日向) 해안까지 떠내려와 가네가하마(金ケ浜)에 도착한다. 여기서 부왕인 정가왕 일행은 고마루 강의 상류인 난고손에, 장남인 복지왕은 강의 하류인 기조쵸(木城)에 각각 정착한다, 하지만 추격자들의 발길은 오지 마을에 숨어있던 정가왕을 압박했다. 이곳에서는 추격군의 정체를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군이라고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어떻든 아버지가 위기에 빠지자 장남인 복지왕이 급히 지원에 나선다. 이곳의 토호세력인 돈타로(益見太郞)를 중심으로 한 현지 주민들도 백제왕가를 적극 돕는다. 그러나 정가왕은 추격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고 만다.
90㎞ 떨어진 부왕(정가왕)을 찾아오고 있다
■백제왕은 누구일까.
사람들은 부왕인 정가왕을 난고손 마을의 미카도 신사에, 장남인 복지왕을 기조쵸의 히키 신사에 나란히 모셨다.
이 때가 718년 무렵이라고 한다. 그리곤 해마다 음력 12월 마지막 주에 아들(복지왕)이 90㎞ 쯤 떨어진 아버지(정가왕)를 찾아뵙는 ‘마츠리’가 열렸다. 물론 정가왕·복지왕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백제멸망 후 왕·귀족과 백성들이 일본에 대거망명했다는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감안해보자.
“백제의 선광왕(의자왕의 아들) 등을 난파(難波·오사카)에 살게 했다.(664년) 좌평 여자신과 달솔 목소귀자·곡나진수·억례복유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도착했다.(663년)” “663년부터 3년간 백제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백제인 400여 명을 오미국(近江國·시가현)에 살게 했다.(665년) 백제 백성 2000명을 정주시켰다.(666년)”(<일본서기>)
40여 명에 이른다는 의자왕의 자손 가운데 혹 주목할만한 인물을 찾을 수도 있겠다. 일본에 머물다 귀국해서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던 풍왕은 어떤가. 그가 정가왕의 증조 할아버지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정가왕과 복지왕은 풍왕의 후손?
1997년 4월, 미카도 신사의 본전 건물을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유물들이 쏟아졌다. 제사 때마다 봉행한 창(모)이 무려 1006점이나 발견된 것이다. 몇 개의 창에는 의미심장한 기년명이 새겨져 있었다.
‘장록 3년(1459년) 12월 길일, 천문 9년(1540년) 12월 12일, 경장 9년(1604년) 12월 길일….’
이 기년명들은 두 가지 뜻을 품고 있다. 1년에 한번씩 제사(마츠리)를 치렀다면 정가왕을 위한 제사의 역사는 1006년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더라도 정가왕을 기리는 제사가 ‘최소한’ 555년이 넘은 것은 사실이다. 기년명 중 가장 이른 것이 ‘1459년(장록 3년)’이라니까…. 또 제사가 해마다 음력 12월에 거행됐다는 것도 ‘팩트’로 밝혀졌다. ‘시와스마츠리’의 ‘시와스(師走)’는 음력 12월을 뜻한다.
1792년 다카무라 고타로(高山彦九郞)가 쓴 <축자일기(筑紫日記>를 보면 “히키신사에 모신 복지왕이 해마다 12월에 아버지(정가왕)의 신사에 가서 창(모)과 큰 칼(太刀)를 바치는 제사를 지내고 돌아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 있다. 1996년 정가왕을 모신 미카도 신사에 보관돼 있던 옷에서 발견된 묵서가 백제시대 한자라는 판독결과도 주목을 끌었다.
당시 묵서를 판독한 후쿠슈쿠 다카오(福宿孝夫) 미야자키대 교수는 “옷에 새겨진 글의 제목은 ‘기국호(記國號)’, 즉 ‘나라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뜻의 백제 포고령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후쿠슈쿠 교수는 특히 “오른쪽 묵서를 보면 ‘복지(福智)’로 판독되는 한자가 보인다”고 덧붙였다. 다른 한자들도 신라·고구려가 아닌 백제 글자의 고유성을 보인다는 것.
이 묵서는 결국 백제의 성(城) 숫자와 목적, 개원(改元·연호의 변천) 등을 표시한 포고문서라는 것이다. 후쿠슈쿠 교수는 “이것은 일본으로 건너왔던 의자왕의 아들 풍왕이 가져온 문서이며, 그의 후손인 정가왕에게 전한 보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당시 연구결과, 묵서가 새겨진 옷의 성분이 당대 일본의 고유 직물성분과 다르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어디 이 뿐인가. 이곳 미카도 신사에서 발견된 4~7세기대의 청동거울 33면과 말방울(馬鈴·馬鐸) 등도 관심을 끌고 있다. 비록 중국 동경 등을 모방한 제품이기는 하다. 하지만 청동거울은 쇼소인(正倉院·왕실 보물창고)의 것과 같은 종류의 거울이다. 청동거울은 청동검·곡옥과 함께 최고 지도자를 상징하는 ‘3종 신기(神器)’로 알려져 있다. 정가왕을 모신 미카도 신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불지른 사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필자의 얼굴에 후끈 달아올랐다.
정가왕의 무덤에서 제사를 치른 뒤 들판을 태우는 의식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아들(복지왕)이 아버지의 신사(미카도 신사)에 절하는 의식이 끝나고, 날이 어두워지자 ‘불의 제전’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은 정가왕을 쫓아온 신라 추격군을 따돌리려고 들불을 피웠다는 전설을 따른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아들을 맞이하는 불, 즉 ‘무가에비(迎え火)’라 한다. 높이 10m에 달하는 장작더미 30여 개에 붙인 불은 이제 ‘시와스마츠리’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행사는 2박3일간 진행됐다. 그야말로 ‘신주모시듯’ 한다는 표현이 꼭맞았다. 이틀째(25일) 1년 만에 만난 정가왕·복지왕 부자를 기리는 제사가 내내 엄수되고, 정가왕을 적극 지원한 토호(돈타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도 진행됐다. 오마루 강에서 주워온 돌로 돌무덤을 만들고…. 신사에서는 밤 12시까지 우아하거나 혹은 익살스러운 주제의 다양한 요카구라(夜神樂·무악을 울리며 신에게 올리는 밤제사)를 열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즐기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지막 날(26일) 모인 사람들이 서로서로의 얼굴에 숯칠을 한 다음 이별을 준비한다. 슬픔을 애써 감추기 위한 의식이란다. 물론 필자 일행도 예외없이 검댕 칠을 했다.
■“오사라바(おさらぼ)!
짧은 만남 끝에 아버지(정가왕)과 아들(복지왕)이 헤어지는 의식은 왠지 짠했다. 떠나는 아들(복지왕)을 배웅하는 난고손 사람들은 손에손에 대야, 솥, 빨래판 등 각종 도구들을 들고 있었다.
집안 일 하다 말고, 한달음에 달려와 복지왕에게 인사를 했던 옛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그들은 점점 멀어져가는 복지왕의 행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쉼없이 외쳤다.
“오사라바(おさらぼ)! 오사라바(おさらぼ)!”
‘오사라바’는 안녕을 뜻하는 ‘사요나라’의 옛말이란다. 그러나 요즘은 쓰지 않는 말이다. 다른 해석도 있다. 한국말로 ‘잘 살아봐!’ 혹은 ‘살아서 다시 봐!’라는 옛 백제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아들을 따라 배웅하고 돌아오는 정가왕 역할의 신관(神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2박3일간 정가왕의 혼백에 빙의된 것일까.
왠지 모를 감정이입에 기자도 숙연해졌다. 마을 사람들이 다시 외쳤다.
“오사라바!”
■수박겉핥기 답사가 안되려면…
‘시와스마쓰리’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백제마을(구다라노사토·百濟の里)’은 시답지 않아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상시 관광객들이 보는 ‘백제마을’은 1987년 일본 정부의 ‘지역활성화 대책’에 따라 ‘만들어진 마을’이기 때문이다.
‘백제관’과, 도쿄의 쇼소인을 모방한 니시쇼소인(西正倉院)이 조성되고, 부여 출신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기념으로 심은 나무가 동네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이렇게 후대에 ‘만들어진’ 풍경에서 무엇을 느끼겠는가. 그것도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려 일본 최남단 오지마을까지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래서인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은 난고손의 백제마을을 두고 ‘실망감을 넘어 허망감’을 표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1000년 이상 백제 왕족의 전설을 오롯이 간직하고, 그 전설을 잊지않고 재현하는 사람들의 분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볼거리’이자 ‘느낄거리’인데….
곧 찾아뵐 아버지가 행여 부정 탈지 모른다며 발가벗고 한겨울 바다에서, 강물에서 목욕재계하는 사람들…. 이국(異國)의 국왕 부자
를 위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저 사람들….
한가지 말하자면 ‘시와스마츠리’를 직접 보지 않았다면 ‘백제마을’을 제대로 평할 수 없다. 자칫 수박겉핥기 답사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
난고손의 백제마을 여정은 골프여행이든, 전지훈련이
든 미야자키를 찾는 사람들의 1박2일 코스로는 제격이라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1300년 전 백제 왕족의 슬픈 역사를 더듬어보는 뜻깊은 여행이 될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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