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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복면 사관'과 역사가의 조건

정부는 국정 역사 교과서의 집필자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복면 사관’을 만든 겁니다. 뿐이 아니라 집필자의 원고 등을 심의할 심의위원들의 명단도 비공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요. 사람들은 흔히 전근대적인 행위나 사고를 ‘왕조시대’에 비유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비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왕조시대인 조선의 사관선발 절차를 한번 보겠습니다. 과연 ‘왕조시대’라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왕조시대의 사관?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사관이 갖춰야 할 조건이 3가지라 해서 ‘삼장(三長)’이라 했습니다. 삼장의 덕목을 갖춘 사관을 뽑는 작업은 혹독했습니다. 
지금 어떻습니까. 정녕 제대로 된 사관을 뽑고 있는 것입니까. 또 우리의 지도자들은 과연 중종처럼 자신의 잘못을 숨김없이 마음껏 쓰게 하고 있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할 일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이번 주의 주제는 ‘복면사관과 삼장(三長)의 조건’입니다.

 

 

“역사를 쓰는 직책이란 한 시대의 사실을 서술하여 만대의 후세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이 중대합니다. 반드시 관료 중에 가장 현명하면서도 삼장(三長)의 재주를 갖춘 사람을 선임해야 시비가 공정하게 되어 사람들이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1548년(명종 3년) 5월 29일 지중추부사 정사룡이 실록청 당상의 직책에서 사의를 표명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명종이 <인종실록> 편찬작업의 책임자로 정사룡을 임명했지만 스스로 적임자가 아니라면서 사직을 청한 것이다. 정사룡의 사퇴의 변을 읽어보자.

광주 이씨 가문에서 전해 내려온 사초.

 

■“욕먹는 자가 역사를 쓸 수 없습니다.”
“신은 40년 가량 공직에 있으면서 걸핏하면 논박을 당했습니다. 한번 논박을 당하면 10일은 보통이고 한 달이나 계속 됐습니다. 이 모두가 일록(日錄·사초 같은 매일매일의 기록)에 모두 기록돼있습니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녹이나 축내면서 남의 비방을 듣는 처지라면 죄를 얻는 것일 뿐 아니라 후세까지 그 견책을 남길 것”이라 사퇴의 변을 밝혔다. 명종은 “여러 해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탄핵을 받는 경우가 왜 없겠느냐”고 사표를 반려했다. 하지만 정사룡은 사퇴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4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린 끝에 결국 사표가 수리됐다. 정사룡의 상소건을 기록한 <명종실록> 사관의 평가 역시 혹독했다. 
“정사룡은 글재주는 있었으나 본래 품행에 문제가 많아 여론의 비난을 받은 지 오래됐다. 그가 역사 편찬의 책임을 맡자 기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직한 것이다.”
종합해보면 정사룡은 임금의 명에 따라 실록편찬의 책임을 맡았지만 사관의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곱지않은 주변의 여론도 감안했을 것이다. 당연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 여러차례 비판 당한 사연들을 전임사관들이 빠짐없이 기록해놓았으니까…. 그러니 정사룡은 자신의 흠결을 기록한 사초를 정리해서 실록을 편찬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왜냐면 역사기록에 사(私)가 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장과 사장
무엇보다 정사룡은 스스로 사관의 덕목인 ‘삼장(三長)’을 갖추지 못했기에 사퇴할 수밖에 없다고 요약했다. 그렇다면 정사룡이 언급한 ‘삼장’은 과연 무엇인가.
‘삼장’은 당나라 역사학자 유지기(劉知幾·661~721)가 주장한 역사학자가 갖춰야 할 3가지 조건을 일컫는다. 유지기는 “사관은 재(才)와 학(學), 식(識)을 겸비해야 한다”고 했다.(<신당서> ‘유자현전’) 여기서 ‘재’는 문장력이고, ‘학’은 학문이며, ‘식’은 통찰력, 즉 사관(史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세가지를 겸비하기가 어디 쉬운가. 유지기 역시 세가지 덕목을 겸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관이 드물다고 했다.
후대에는 삼장도 모자라 사장(四長)으로 사관의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었다. 중국의 계몽운동가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삼장 외에 덕(德)을 추가하면서 맨 앞에 두었다. 즉 사덕(史德)-사학(史學)-사식(史識)-사재(史才)의 순으로 그 중요도를 설명했다. 그는 역사가는 역사를 도덕으로 바라보는 마음씨를 지녀야 공정한 사서를 저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자신이 저술한 역사가 예사(穢史·더러운 역사)나 방서(謗書·남을 비방하는 사서)라는 혹평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인척 처가의 흠결까지 검증했다
그렇다면 사관의 삼장(三長)을 어떻게 가릴 수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사관이라 함은 매일매일 군주와 대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전임사관을 뜻한다. 예문관 소속 봉교(7품) 2명·대교(8품) 2명·검열(9급) 4명 등 8명으로 구성됐다. 신라 때부터 이들을 한림(翰林)이라 일컬었다. 직급에서 보듯 하급관리들이었다. 하지만 과거급제자 가운데 엄격한 선발절차를 거쳐야 했으니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다. 젊은 패기로 무장해야 때묻지 않은 절개를 지키고, 직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417년(태종 17년) 이조가 사관을 천거하는 법을 임금에게 올렸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후세의 귀감이 되니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이제 결원이 생기면 춘추관 당상관이 하급의 문관 가운데 직품이 합당한 자들을 모아 경사(유교경전과 역사서)에 막힘이 없고 제술(시와 글)에 능한 자를 시험으로 뽑아야 합니다. 여기에 친족과 처가, 외가에 모두 흠결이 없는 자여야 합니다. 이런 자들을 골라 한 자리에 3명의 후보를 선발해서 이조에 서류를 보내면 이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임명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소서.”
참으로 엄격한 임용절차였음을 알 수 있다. 문장과 글, 그리고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능할 뿐 아니라 친·인척 가운데 어떤 흠결도 없는 사람이라야 후보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것도 3명의 후보자 가운데서 가려 뽑았다니….

인조 무인년,즉 1638년의 정치상황을 기록한 사초. 당시 사관이었던 신면이나 허적의 기록으로 추정되지만 확실치 않다.|규장각 소장

 

■‘천벌을 받는다’는 다짐까지…
이같은 원칙 아래 사관 임명의 구체적인 제도를 갖춰갔다. <연려실기술>을 토대로 공석이 된 사관을 뽑는 단계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현재의 전임사관 가운데 가장 늦게 사관이 된 막내(하번·下番)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막내 사관이 바로 고참 사관들과 진행하는 추천회의를 사실상 주관한다.
사관들끼리의 추천회의도 ‘문을 닫고 진행하는 비밀회의’였다. 이것을 비천(秘薦)이라 했다. 만약 여기서 추천할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판단이 들면 그냥 공석으로 놔뒀다. 예를들어 성종 시대의 사관이었던 김일손은 하번, 즉 막내사관으로 일한 5년동안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러다 정여창(1450~1504)을 보고는 적임자라 판단해서 비로소 추천했다. 제대로 된 사관을 뽑으려고 막내의 불편함을 5년이나 감수한 것이다.
그런데 사관들이 모여 추천 대상자 3명을 확정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임사관을 역임한 전직사관들과 홍문관·예문관의 당상에게 후보자 명단을 돌렸다. 거기서 하자가 없다는 승인을 받아야 겨우 통과됐다. 통과의례 또한 까다로웠다. 사관들은 예복을 갖춰 입고 추천자들의 이력서를 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향을 피우고 차례로 네 번 절한 뒤 축문을 읽었다.
“황천(皇天·하늘신)과 후토(后土·토지신)에게 고합니다. 사필을 잡는 임무는 가장 중요한 국정입니다. 추천된 사람이 그 적임자가 아니면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겁니다.”
하늘·땅에게 제사까지 지내고 ‘천벌’ 운운할 정도이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전 통과의례인가.

 

■피말리는 1대1 면집시험
임진왜란 때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전쟁통에 상당수 대신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선조 임금 곁을 따라다니며 사초를 기록해야 할 사관 4명이 도망가는 불상사가 생겼다. 그래도 역사는 기록해야 했기에 사관을 선발해야 했다. 하지만 적임자가 전무했다. 그 때 유일한 사관이었던 기자헌이 행재소(임금의 임시거처)에서 부족한 사관수를 채우려고 후보자를 한사람 추천했다. 문제는 추천 대상자가 사관의 자격을 갖췄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시험을 볼 여건이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3명이어야 할 후보자가 단 1명에 불과했으니까…. 기자헌은 차마 축문을 읽지 못하고 고육책으로 그냥 말로 하늘에 고했다.
“난리로 인해 사람이 모자라 부득이 한사람만 후보로 올렸나이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지봉유설>) 그렇지만 절대 웃을 일이 아니다. 전쟁통에 그렇게 어수선한 국면이었는데도 사관을 뽑았고, 임시방편이었지만 축문을 읽는 행사를 생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축문을 읽은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가장 어려운 단계가 남아 있었다. 바로 시험이었다. 시험관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 3정승은 물론 좌·우찬성과 좌·우 참찬관, 그리고 춘추·예문관 소속 3품 이상의 당상관 및 이조당상 등이 합석했다.

이들은 추천된 수험생 3명에게 <자치통감 강목>과 <좌전(左傳)>, <송감(宋鑑)>의 글을 정해 한사람씩 불러 1대1 면접으로 테스트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된 후보자들의 순위는 시험관들의 도장을 일일이 받아 공문서인 입안(立案)으로 만들어 제출했다. 이로써 선발절차가 막을 내린 것이다.

 

조선 중기 학자인 유희춘의 <미암일기>.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1577년 5월 13일 사이의 기록이 남아있다. <미암일기>는 임진왜란 때 사초책이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선조실록을 편찬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구악(舊惡)은 사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젊은 신진들에게 사관의 직무를 맡겼을까.
그렇지않아도 태종 때인 1417년 이런 제도가 불합리하다는 반대의 의견이 개진됐다. 즉 “사관들이 멋대로 젖비린내나고 서법도 잘 알지 못하는 자를 천거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태종은 이에 “새롭게 진출하는 유생들의 능력과 가문을 윗사람들이 어찌 알겠느냐. 그래서 사관 동료들끼리 선택하도록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태종은 “이렇게 사관을 뽑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됐다”고까지 했다. 사관들 스스로 후임자를 뽑는 전통이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연려실기술>은 또 조극선(1595~1658)의 문집인 ‘야곡삼관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젊은 신진에게 사관의 직무를 맡기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더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벼슬이 높은 사람은 너무 세상일에 익숙하게 되어 사사로운 정(情)에 이끌리기 쉬운 폐단이 많다. 그러니 젊고 의기가 날카로운 자들을 사관으로 선발하는 것이 더 공평한 역사를 서술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젊은 사람들을 사관으로 뽑는 제도를 마련한 것이리라.”
한마디로 말해 오래 벼슬한 사람들은 시쳇말로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는, 이른바 ‘구악(舊惡)’이 될 수 있으니 엄정한 사필을 휘둘러야 하는 사관의 자격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관 한 사람 뽑는 데도 이렇듯 철저하고 엄중하게, 또한 신중하게 뽑았던 것이다.

중국의 계몽운동가 량치차오. 역사가의 덕목으로 ‘덕(德)’을 가장 중요시했다.

 

■“내 과실을 마음껏 쓰도록 하라”
그렇다면 임금은 그렇게 뽑힌 사관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1508년(중종 3년) 종종은 승정원과 예문관에 붓 40자루와 먹 20홀을 내리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이 붓과 먹으로 모든 나의 과실을 숨김없이 마음껏 쓰도록 하라.(以是筆墨 凡吾過失 百書無隱)”
영조 임금은 또 어땠나. 1738년(영조 14년) 영조 임금은 친히 실록을 봉안한 ‘춘추관 사고(史庫)’를 방문해서 ‘대공사필(大公史筆)’이라는 휘호를 써서 처마 끝에 달도록 했다. …. ‘대공사필’이란 ‘사필을 크게 공정히 한다’는 뜻이다. 영조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법은 과연 어렵다. 여러 대신들은 물론 사관들이 입시하지만 당파에 치우친 나머지 역사를 멋대로 첨삭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또 임금이 한번 제작된 역사책(실록)을 절대 볼 수 없으니 역사책이 공정하게 쓰였는지, 혹은 불공정하게 쓰였는지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내가 대공사필이라 써서 벽에 건 것이다. 역사를 아주 공정하게 서술하라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은 과연 어떤가. 정녕 제대로 된 사관을 뽑고 있는 것인가. 집필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결국 사관에게 복면을 씌운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복면사관에게 역사를 맡길 수 있을까.

또 우리의 지도자들은 과연 중종이나 영조처럼 자신의 잘못을 숨김없이 마음껏 쓰게 하고, 역사를 공정하게 서술하라고 북돋아주고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할 일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