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체가 된 풍납토성 발굴이 시작됐다. 성벽 안쪽에서 한성백제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백제인들이 쌓은 성벽의 축조방법도 초미의 관심거리였기에 발굴이 시작된 것이었다.
1920년대 풍납토성 모습. 해자, 즉 성을 막기위한 주변의 도랑시설이 보인다.
◇감개무량한 발굴
“높이는 한 6~7m 정도나 될까. 폭은 한 10여m?”
애초에 발굴단은 현존하는 성의 모습으로 볼 때 그 정도려니 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와. 이게 뭐야.”
발굴기간 내내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끝도 없는 판축 토루와 성벽을 보호하는 강돌·깬돌이 열 지어 있고 성벽의 흘러내림을 방지하는 수직목과 식물유기체들.
발굴 결과 폭 43m 이상에 현존 높이 11m에 이르는 사다리꼴 형태의 토성임을 알게 되었다. 추정 최대높이는 15m.
40년 전인 지난 64년 학생신분으로 실습을 위해 스승인 김원룡을 따라 풍납토성에 대한 시굴조사에 참여했던 필자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백제 사성으로 규정된 뒤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방관자처럼 보아 넘길 수밖에 없었던 필자의 죄책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성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풍납토성은 늦어도 AD 3세기 전후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왕권에 준하는 강력한 절대 권력이 없이는 둘레 3.5㎞에 이르는 거대한 토성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백제는 한성백제시대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고대국가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고대사 전공학자들 가운데 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수도인 하남위례성으로 조심스럽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해온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연인원 4백만 명이 쌓은 성
그렇다면 이 성을 쌓는 데 들인 공력은 어떠했을까.
심정보(한밭대 교수)는 풍납토성과 중국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성인 연하도(燕下都) 성과 정(鄭)·한(韓)나라 성인 정한고성을 비교했다. 그는 3성 모두 제방축조 기술을 썼고 축조기법도 사다리꼴의 중심토루를 축조한 다음, 그 내방면(內方面)으로 덧붙여 판축하여 견고하게 구축하는 형식이었다고 밝혔다.
심정보는 통전(通典)의 수거법(守拒法)에 따라 풍납토성의 축조에 들어간 공역을 계산했는데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①먼저 흙을 운반한 인원=길이 3.5㎞, 기저부 폭 43m, 높이 11m에 대한 토량은 1백39만1천2백50㎡이며 이를 톤으로 환산하면 2백22만6천 톤이다. 이를 1.5톤 트럭으로 운반한다면 13만9천1백25대의 분량이 된다.
당시에는 트럭이 없었을 것이고 이를 지게로 져 날랐을 것이다. 그럴 경우 운반거리를 100m로 가정하면 운반인원만 62만6천2백40명에 달한다.
그런데 여기서 계산한 토량은 판축이 이뤄진 상태에서의 규모로 계산했다. 따라서 판축기법에 의한 압축이 1/3정도라고 한다면 운반인원은 위의 인원에 3배를 곱한 1백88만1천7백20명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②성벽을 축조한 인원=‘통전’ 수거법에 따르면 하루 한사람이 2척(尺)을 축조하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런데 통전이 편찬된 당나라 척수(尺數)는 1척에 28~31.3㎝를 적용하고 있다. 여기서 1척을 평균 30㎝로 하여 토량을 계산하면 441.5장(丈)이 되며 1사람의 공력이 하루 2척의 흙을 축조한다면 모두 221명이 동원된다. 연인원은 2백57만8천1백86명이 된다.
결국 ①②를 더한 전체 축성 연인원은 4백45만9천9백6명이 된다.
‘삼국지 동이전 한조(韓條)’는 “큰 나라는 만 여 가(萬餘家)”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큰 나라의 전체인구는 5만 명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5만 명 전체가 공역에 참여한다 해도 90일이 걸리는 대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풍납토성 축조는 그야말로 한성백제가 국운을 건 대역사였던 것이다.
◇잇달아 발견되는 왕성의 흔적
또 한번의 낭보가 인근 경당연립 신축부지에서 날아왔다. 한신대 박물관 발굴 결과 불과 1,000여 평의 조사면적에서 한성백제 유물·유구가 터져 나왔다. 집자리와 제사 관련 대형 건물터를 비롯하여 전돌·와당·초대형 항아리·중국제 도자기·중국동전인 오수전·‘대부(大夫)’라는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 파편 등 500상자 분량이 넘었다. 말머리 뼈와 대부명 토기 등은 국가 주도의 제사행위가 있었음을 암시해주며 중국제 토기류는 활발한 대외교섭의 증거이다.
조사 진행 과정에 얻어진 뜻밖의 성과에 따라 건축 당사자와 조사기관 사이에 발굴기간 및 발굴조사비 문제로 마찰을 빚게 되었고 급기야 발굴이 중단됐다.
2000년 5월13일,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토지보상에 대한 원칙도 없는데다 발굴비까지 늘어나자, 재건축 사업을 담당한 조합장의 지시로 ‘노출시켜둔 백제 유구’를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백제가 테러 당했다’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언론보도가 여론을 들끓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풍납토성 내부의 보존이 가닥을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풍납토성이 역사적인 백제의 유적이라면 후손들에게 후회 없도록 처리하라”고 당부했다.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자 풍납토성 내부의 보존이 쉽게 결정됐다.
이후 재개발을 통한 건축행위는 봉쇄됐고 다만 지하유구가 파손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소규모 건축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문화재위원회에서 가이드라인을 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산너머 산.
◇잘못된 시굴의 뼈아픈 교훈
성벽 내 한성백제시대 유구와 유물의 보존원칙은 큰 틀에서 마련되었으나 성벽외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1년 9월 삼표산업이 을축년 대홍수로 쓸려나간 풍납토성의 서벽 밖에 새로운 사옥건물을 짓기 위해 학술기관에 시굴조사를 의뢰했다. 이 과정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시굴을 맡은 모 대학박물관이 지하 5m 아래로 개흙층을 확인했지만 이것은 해자로 볼 수 없으며 단순히 한강물의 범람방지를 위한 제방시설이나 제방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운 것이다. 도성이나 주거지와는 관련 없는 시설이라는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개흙층 내에서는 문화재가 전무하다는 것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의견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의견대로 제방시설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성벽 안에서 밝혀지고 있는 주거터 등 수많은 백제 유구와 유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또 조사기관의 주장대로 한강의 범람을 막는 제방과 관계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백제시대 살았던 성안의 생활공간을 보호하는 시설임이 틀림없다고 보아야 합당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도성이나 사람이 사는 주거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범람을 막는 제방의 의미밖에 없다는 의견이었으니 한마디로 신중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런 문화재가 없다”니 건축공사는 계획대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사를 강행하기 위한 터파기 공사 때 문화재 유무를 확인하려 입회한 국립문화재연구소측은 백제시대 문화층이 있음을 확인했다.
공사는 중단됐고 지난해 말부터 올해 3월까지 본격 발굴한 끝에 풍납토성 서벽과 관련된 해자추정 유구가 발견되었다. 삼표산업 부지는 당장 보존됐다.
◇모습 드러낸 해자(성을 보호하는 도랑)
그후 풍납토성 내 삼표부지, 즉 유실된 서벽의 성벽 외부에서 하상 퇴적층과 함께 오랜 동안 물이 고여 썩었던 뚜렷한 흔적이 노출됐다.
마치 시궁창 냄새처럼 풍기고 있었다. 이것은 해자 시설의 물이 오랜 동안 썩으면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해자와 관련시설로 보이는 노출된 자갈층에서 백제토기 편과 함께 조선시대 백자편도 수습되고 있었다. 결국 이 시설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장구한 기간 존속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인공이든, 자연이든 이 유구는 풍납토성의 해자시설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모 대학 박물관이 최초 시굴조사 때 조금만 신중했다면 건축주인 삼표산업에서 공사를 강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자시설이 없었다는 의견을 제출함으로써 시간은 물론 조사에 따른 추가비용도 지불하게 해 이중으로 손해를 입혔다. 시굴기관의 잘못된 의견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교훈으로 남겼다.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
나름의 결론을 도출해보면 어떨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풍납토성의 성립시기와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잇단 발굴결과에 이 풍납토성이 기원 전후부터 축성이 시작되어 늦어도 2세기 경에는 완성되었다는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한성 백제는 초기부터 강력한 왕국으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고대사는 일제 강점기 때 이미 왜곡되어 왔다. 우리 기록인 삼국사기를 무시하고 중국 기록인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신봉한 것이다.
고대 삼국의 초기 기록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이 BC 1세기 때 우리나라를 정복하고 낙랑 등 4개의 식민지를 세워 지배해왔으며 AD 4세기 후반에야 겨우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세웠다는 주장. 지금의 일본 역사 교과서도 이 주장을 바꾸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 고대사학계에서는 일제의 주장을 겨우 1세기 정도 앞당겨 3세기 중·후반설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한강변의 백제시대 성곽인 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비교해 볼 때 풍납토성이 앞서 조성된 것은 분명해 졌다.
그리고 규모면에서나 출토된 유물과 유구의 비교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백제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에서 풍납토성으로 바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끝) 경향신문 논설위원
'흔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면 사관'과 역사가의 조건 (4) | 2015.12.01 |
---|---|
빼빼로데이 말고 젓가락데이 어떨까 (0) | 2015.11.11 |
잃어버린 백제, 풍납토성의 발견비화(상) (0) | 2015.11.09 |
광주에서 발견된 2000년 전 현악기 (2) | 2015.11.02 |
소황제와 6개의 지갑 (1) | 2015.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