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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김무성 대표의 큰절이 왜 과공비례인가

 

 “그야말로 상상에서나 나올 기묘한(peculiarly fanciful) 모습이었다.”
 1883년 9월 18일 미국 뉴욕 23번가 피브스 에버뉴 호텔 1층 대연회장에서 역사적인 행사가 열렸다. 조·미 수호조약 체결(1882년 5월22일)과 외교관계수립(1883년 5월13일)을 기념하여 조선정부가 파견한 사절단(보빙사) 일행의 국서제정식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고종황제의 국서를 채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행사였다. 미국 당시 미국언론은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등 11명으로 구성된 보빙사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고 있었다.
 “조선보빙사의 옷은 오페라 합창단에 등장하는 고위 성직자의 옷차림과 비슷했다. 높고 검은 원추형 모자를 쓰는데 마치 알프스 산맥의 농부가 쓰고 있던 모자와 흡사했다.”(<뉴욕타임스> 1883년 9월18일)

1883년 9월18일 체스터 아서 미국대통령을 알현한 조선보빙사 일행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고 있다. 이 진귀한 모습을 신비롭게 여긴 미국 뉴욕의 언론이 삽화로 그렸다. 아서 대통령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경향신문 자료

 ■기묘한 옷차림의 조선보빙사
 정사 민영익의 쇼핑광경이나 뉴욕번화가에서 길을 잃어버린 유길준 등의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와 <뉴욕헤럴드> 등은 앞다퉈 조선을 소개하는 특집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신비로운 조선보빙사의 모습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역시 국서제정식이 열린 9월 18일의 광경이었다.
 사절단을 이끈 정사 민영익은 조선의 공식사절로서 최고의 격식을 갖췄다. 그것이 미국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했다. 특히 옷차림이 그랬다.
 공식행사였으니 모두 사모관대를 갖춘 관복을 입었다. 민영익 정사는 짙은 보랏빛·오얏빛깔의 긴 관복을 입었고 허리에는 찬란한 각대를 둘렀다. 가슴엔 자줏빛 바탕에 백색 쌍학을 정교하게 수놓은 흉배를 달았다. 머리에는 말총과 가는 대나무로 짠 원추형 사모를 쓰고 버선 위에 장화처럼 생긴 목이 긴 목화를 신고 있었다.
 홍영식 부사는 오얏빛깔의 관복에는 학 한마리를 수놓은 흉배가 새겨져 있었고, 종사관 서광범은 보라색 관복을 입었다. 각 수행원들도 녹·흑·청색의 다양한 관복을 입었다. 그야말로 황홀한 광경이었다. 미국인들로서는 생전 처음보는 광경이었으리라.
 이윽고 오전 11시가 되자 채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은 프레드릭 프릴링하이젠 국무장관 등과 접견실에서 조선보빙사 일행을 맞으려고 서 있었다. 대접견실에는 따로 대기실이 딸려 있었는데 대기실로 통하는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드디어 민영익 정사를 선두로 조선보빙사 일행이 대기실에 들어섰다.

 

 ■큰절에 당황한 미국대통령
 그런데 이 때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대기실에 들어선 조선보빙사 일행은 민영익 정사의 지휘아래 이마까지 두 손을 올린 뒤 일제히 무릎을 꿇고 넙죽 엎드려 큰 절을 올린 것이다. 대접견실에 들어간 일행은 다시 아서 대통령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생전 처음보는 의전에 아서 대통령은 크게 당황했다. 콧수염에 멋진 구레나룻을 자랑했던 아서 대통령이 조선보빙사의 뜻밖 큰절에 당황해하는 모습이 당시 뉴욕 신문의 삽화에 생생하게 실렸다. 잠깐 곤혹스러운 시간이 지난 뒤 정신을 차린 아서 대통령은 선 채로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서양의 외교관례로 보면 당황할 만 했다. 그로부터 23년 전인 1860년 일본 최초의 사절단이 뉴욕에 가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할 때와는 사뭇 달랐으니까…. 당시 일본사절 3인은 2~3보 앞에 나가 선 채로 한 번 절하고, 다시 중앙에 나아가 한 번 더 절한 뒤 신임장을 제정했다. 그런 뒤 루이스 카스 국무장관의 안내로 뷰캐넌 대통령과 악수를 한 뒤 다시 한 번 절하고 물러났다. 일본사절은 조선보빙사처럼 큰 절을 하지 않고 선 채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한 뒤 서양식 악수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선과 일본의 태도는 천양지차였다. 어떻든 조선보빙사의 큰절 인사가 끝나고 나서야 프릴링하이젠 국무장관이 앞으로 나와 민영익 정사를 아서 대통령에게 소개하고 악수를 하는 것으로 행사는 진행됐다. 약 15분간의 국서제정식이 끝난 뒤 보빙사 일행은 대기실 문앞에서 입장할 때와 똑같이 큰 절을 한 뒤 퇴장했다.
 당시 <뉴욕헤럴드>는 이 특이한 인사법에 대해 조선보빙사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소개했다.
 “이러한 인사와 경례는 국왕이나 기타 독립국가의 국가원수를 알현할 때에만 행한다. 그 이외의 경우엔 이러한 경례는 결코 하지 않는다.”(<뉴욕헤럴드> 1883년 9월19일)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보빙사 일행. 신비로운 동양 은둔의 나라에서 온 사절단의 일거수일투족이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김무성 대표의 큰절
 그로부터 132년이 지난 2015년 7월25일 미국 워싱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을 방문중인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의원들이 6·25 참전용사들 앞에서 큰 절을 올린 것이다. 김무성 대표는 “참전 군인 여러분과 6·25 전쟁 때 돌아가신 미군, 실종된 미국분들을 기억하며 한국의 관습대로 큰 절을 올린다”고 했다.
 이에 래리 키나드 한국전 참전용사회장 등은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함께 갑시다”고 했다. 장내에서 기립박수가 터졌다고 한다. 김무성 대표는 다음 날에도 워싱턴 인근 알링턴 국립묘지를 찾아 헌화한 뒤 초대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월턴 워커의 묘 앞에서 ‘한국식 큰 절을 하겠다’며 두번 절을 했다.
 그러자 정당외교 차원에서 미국을 방문한 여당대표의 과공비례(過恭非禮)가 아니냐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당과 국민을 대표해서 미국을 방문한 정치지도자가 공적인 출장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서양에는 없는 예법인 큰 절을 남발했다는 것 자체가 좀 지나치다는 얘기다. 또 ‘당신들(미국인들) 아니었으면 한국의 오늘은 없었다’는 식의 사례 역시 지나치다는 것이다. 한국 제1당 대표가 미국을 방문했으면 정당외교의 격에 맞는 외교를 할 것이지, 연신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이는게 거북하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예법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필자는 성균관과 한국전례원 같은 곳에 자문을 구했다.
 과연 김무성 대표의 큰 절이 예법에 어긋나는 지 궁금했다. 대체로 김무성 대표의 큰 절 자체는 큰 틀에서는 예법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답변이었다. 성균관 측은 “김대표가 한국의 예법에 대해 사전에 설명을 충분히 한 뒤 큰 절을 올렸지 않았느냐”면서 “또한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큰절을 올린 것 역시 분명 전통예법이므로 탓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전례원 측도 역시 “김대표가 참전용사들을 향해 큰 절을 올린 것 자체는 나쁠 것 없는 행동이었다”고 전했다.
 하기야 132년 전 미국을 방문한 조선보빙사 일행의 큰 절과 김무성 대표의 큰 절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냐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짚어가면 평가는 180도 달라진다.
 성균관이나 한국전례원은 “‘큰 절’의 모습을 잘 살펴야 한다”는 데 의견을 함께 했다.
 우선 132년 전의 민영익 등 조선보빙사 일행의 큰 절과 김무성 대표 일행의 ‘큰 절’을 보면 외형상 비슷한 점이 보인다. 즉 양 팔을 앞으로 평행으로 내밀고, 이마를 바닥에 닿을 정도까지 큰 절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단순한 큰절, 즉 한자식 표현대로 계수배(稽首拜)가 아니다. 김무성 대표 일행이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바로 고두(叩頭)라는 형식의 큰 절이다.  

 

미국을 방문 중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일행이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다.|연합뉴스TV캡처

 


 고두가 무엇인가.
 예전부터 중국의 황제(혹은 임금)에게 행했던, 머리를 땅에 닿게 하는 경례법이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나란히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절이 바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였다. 즉 1637년 1월 인조 임금이 병자호란에서 패한 뒤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 태종 앞에서 이마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그것을 한 단위로 3번, 즉 9번이나 되풀이했던 항복의식이었다. 조선의 임금들은 명이나 청 황제가 보낸 칙서를 고두로 맞이해야 했다.
 홍대용의 시문집인 <담헌서>를 보면 외국사절이 청나라를 방문하면 홍로시라는 곳에서 반드시 황제 앞에서 잘못된 의식을 행하지 않도록 철저한 ‘삼배구고두’ 연습을 시킨 일이 기록돼있다.
 “사절단 일행은 홍로시에서 의식연습을 했다. 외국서 온 공사들이 의식에 익지 못하므로 미리 연습을 시켜 실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한 다음, 비로소 앞으로 가서 절하고 뒤로 물러나와 엎드리는 것을 행했다. 그런데 모두 헷갈려 법도에 맞지 않으므로 통관들이 인도해 가며 익혔다.”(<담헌서> ‘외집 9권·연기’)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들도 극진한 선물을 받고 조선을 떠날 때는 “제가 고두를 드릴 테니 임금의 자리에서 받으시라”고 권하기 일쑤였다.
 “1480년(성종 11년) 임금이 명나라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데 두 사신이 어좌를 남쪽으로 향하게 했다. 임금이 못이기는 척 어좌를 남쪽으로 돌려 두 사신에게 술잔을 돌린 뒤 선물을 주니 두 사신이 앞으로 나와 고두(叩頭)하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성종실록>)
 ‘고두’는 결국 황제나 임금 앞에서나 행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례도감이 실린 큰절의 그림. 모두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절을 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민영익의 큰절과 김무성의 큰절
 그렇다면 1883년 조선보빙사 일행의 ‘고두’는 하자가 없는 외교적인 인사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국가원수를 처음 만난 자리가 아닌가. 단순한 계수배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극진한 외교적인 예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무성 대표 일행의 ‘고두’는 매우 어색한 인사법임을 알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고마움과 존경의 표시로 큰 절을 할 수 있다 해도 ‘고두’는 격식에 맞지 않는 인사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김무성 대표 등이 일부러 ‘고두’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기야 단순한 큰 절, 즉 계수배와 고두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 아닌가.

올바른 큰절의 모습. 남자의 경우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개 모은 뒤 공손히 절을 올려야 한다. 물론 상가에서는 반대로 오른손을 왼손 위에 올려야 한다. 여자는 정반대다. 평소엔 오른손을, 상중에는 왼손을 올린다. 

 성균관이나 한국전례원 측의 설명을 빌리자면 ‘큰 절’에서 가장 핵심은 두 손을 포개 모으고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공손히 올려 모은 뒤 바닥에 짚고 가지런히 무릎을 꿇으면서 큰절을 올려야 한다. 물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둬야 한다. 물론 상가(喪家)에서는 반대가 된다. 남자는 오른손을, 여자는 왼손을 위로 올려 두 손을 모은 뒤 절을 올린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예법을 잘 몰라 두 손을 평행으로 나란히 편채 큰 절을 올린다. 이것이 바로 황제나 임금에게 올리는 ‘고두’인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첨단사회에서 그런 예절의 디테일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하루하루 먹고 사는데 급급한 장삼이사야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라를 대표해서 외교에 나서는 지도자들은 우리 만의 예법을 분명히 알아야 하지 않을까. 1883년 민영익 일행의 ‘고두’ 사진을 본 박복남 한국전례원 원장은 ‘외교사절로서 모범적인 절’이라고 극찬한다.
 “몸의 자세가 마치 거북이처럼 잘 굽혔네요. 외교사절로서의 모범적인 태도가 엿보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132년 후 김무성 대표 일행의 큰절을 본 후세 사람들은 어찌 평가할 것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