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러운 궁금증 하나.
복숭아 나무는 못된 귀신을 쫓아내고 요사스런 기운을 없애주는 상사로운 나무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조상들은 절대 이 복숭아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여기에는 동이족의 ‘슬픈 전설’이 숨겨져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가 전설 속 ‘동이족의 명궁’인 ‘예’라는 인물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요 임금 시절이었다. 그 당시엔 태양이 10개나 있었다. 동방의 천제 제준과 태양의 여신 희화 사이에 난 자식들이었다.
10개의 태양은 세 발 달린 신성한 까마귀, 즉 삼족오였다. 이들은 어머니 희화가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하루에 하나씩 교대로 떠올랐다. 그 일을 수만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복숭아의 눈물
너무 따분해서 하품을 거듭하던 태양들이 재미삼아 일제히 떠올라 공중을 날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한꺼번에 10개의 태양이 떠오르자 세상은 불의 지옥으로 변했다.
보다 못한 천제가 명궁 예를 지상에 파견했다. 예는 특유의 활솜씨로 태양들을 하나하나 쏘아 떨어뜨렸다. 9마리를 쏘고 나서야 예의 활쏘기가 멈췄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태양 하나 쯤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는 하늘로 복귀하지 못했다.
천제가 자신의 아들(태양)을 9명이나 죽인 예를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떠오르지만 못하도록 적당히 손을 보면 될 것을….
예가 자신의 활솜씨를 발휘하려고 너무 많은 천제의 자식들을 죽인 것이다. 할 수 없이 지상에 남게된 예는 제자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며 살았다. 하지만 제자 가운데 스승을 질투한 이가 있었다. 봉몽이었다.
스승의 활솜씨를 넘어설 수 없다고 여긴 봉몽은 끝내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사냥길에서 돌아오는 예를 복숭아 몽둥이로 때려 죽인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그야말로 ‘지구를 지킨 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예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 그때부터 예는 ‘귀신의 우두머리’가 됐다. 나쁜 귀신을 쫓는 종포신(宗布神)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제사상을 차릴 때는 절대 복숭아를 올리지 않았다. ‘귀신의 우두머리’(예)를 때려죽인 복숭아 나무가 아닌가. 그러니 조상 귀신을 위한 제사상에도 차마 복숭아를 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는 동양신화에서 ‘동이족의 군장’으로 알려져 왔다.
■군자불사의 나라
제사 하면 또 한 분이 떠오른다. 공자님이시다.
“장사를 지낼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지만, 은(상)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난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두었다. 나는 원래 (동이족의 나라인) 은나라 사람이었다.(予始殷人也)”(<사기> ‘공자세가’)
기원전 479년, 죽음을 앞둔 공자의 ‘최후의 고백’이다. “난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노라”고…. 하기야 공자의 선조는 원래 은나라 왕실의 후예인 송나라의 귀족이었는데, 노나라에서 정착해 살았다. 알려졌다시피 은(상)은 동이족의 일파가 세운 나라이다. 은(상)의 시조인 ‘설(설)’은 ‘동이족인 제곡(고신씨)의 후예’이며, 지금의 발해 연안인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회남자> ‘추형훈’의 주석)
‘은나라=동이족’ 이야기는 더 자세히 알아볼 기회가 있으니 접겠다. 여하튼 공자는 은나라의 적통을 이은 송나라 귀족의 후예다웠다.
어렸을 때부터 조두(俎豆·제사그릇)를 가지고 제사놀이를 하며 놀았을 정도였다니…. 그 뿐인가. 그는 “중국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인 구이에 가고 싶다.(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산해경>)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니까.
■제기로 음식을 먹는다
하기야 중국에서는 ‘동이=예의 나라, 군자의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조상과 하늘을 기리는 제사행위는 동이족의 유별난 덕목이었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는 ‘동이’를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이(夷)는 동방에 사는 사람이다. 동이는 대의를 따르는 대인이다. 풍습은 어질다. 어진 이는 장수하며, 군자들이 죽지않는 나라이다.(夷 東方之仁也 惟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동이전’ 등에 보이는 기사도 한결같다.
“이(夷)는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동이는 즐겁게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의 천자가 예를 잃으니 사이(四夷)에서 이것을 구했다.”
그러면서 부여와 고구려, 한(마한·진한·변한)의 풍속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음식을 먹을 때 제기인 조두(俎豆)를 쓴다. ~은력(은나라 책력) 정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온 나라가 모여 연일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 장례는 5개월이나 지내는데, 오래 끌수록 번성한 집안이다.”(부여)
“장사를 후하게 지낸다. 금은비단을 죽은 자에게 보낸다. 시월에 나라의 동쪽에서 거국적으로 하늘제사를 지낸다.”(고구려)
“오월에 씨를 뿌릴 때 귀신(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춘다. 날마다 밤낮없이 쉴 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마한)
중국 역사서 ‘동이열전’에 나오는 ‘조두’는 공자가 제사놀이를 할 때 지녔던 바로 그 제기(祭器)를 말한다. 동이족 사람들은 제사에 쓰이는 조두를 평상시 음식을 먹을 때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사의 일상 생활화가 아니겠는가.
■주왕을 위한 변명
흔히들 은(상)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하나라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폭군의 상징을 ‘걸주(桀紂)’라고 하지 않는가.
은 주왕은 특히나 충신의 심장을 가르고, 포락지형(포烙之刑·기름 바른 구리 기둥 위를 걷게 해서 불구덩이로 떨어지게 만드는 형벌)을 지켜보며 부인(달기)과 깔깔댄 폭군으로 악명이 높다. 더욱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 흥청망청하는 바람에 망국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은 주왕의 패륜을 낱낱이 까발린 <사기> ‘은본기’ ‘송미자세가’ ‘주본기’ 등을 곱씹어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이어진다.
“주왕은 귀신도 업신여기며(慢於鬼神)…”(‘은본기’) “하늘이 재앙을 내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해도 주왕은 전려 두려워 하지 않았고, 백성들조차 천지신명에게 드리는 제사를 경시했다.”(‘송미자세가’) “주왕은 총애하는 부인의 말만 믿고 선조에 대한 제사를 그만두고 나라를 어지럽혔다.”(‘주본기’)
그러니까 은나라가 망국의 길로 접어든 이유는 단순히 주왕의 난행 때문이 아니었다. 역사서는 조상제사와 하늘제사를 경시했기 때문에 은(상)이 멸망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상을 섬기고, 하늘을 두려워하며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예와 군자의 땅’인 동이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전통이다.
■2000년 전 장례식 풍경
1988년 4월, 경남 의창군 다호리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원전 1세기대인 중국 전한시대에 사용된 오수전이 출토됨으로써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장례와 제사의 흔적이 뚜렷했다. 이것은 조상신과 하늘신을 숭배한 당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흔적이다.
당시 발굴을 책임진 이건무 학예관이 출토상태를 토대로 약간의 각색을 거쳐 설명한 내용을 보면….
기원전 1세기~기원 전 후, 다호리 일대를 다스리던 소국의 수장이 별세하자 장례절차에 들어갔다. 통나무 관을 잘라 구유형태로 내부를 파내 몸체와 뚜껑으로 사용했다.
시신을 관 속에 안장하고, 각종 부장품(철초동검, 철검, 목합, 유리구슬, 목걸이, 철정 등)을 가득 넣은 뒤 밀봉했다. 그 다음 목관 다리 부분의 ㄴ자형 구멍에 동아줄을 걸고, 여러 사람이 이 줄을 끌어 장지까지 옮겼다. 수장의 장례 행렬답게 연도에는 애도물결이 넘쳤을 것이다. 이곳 장지에 도착한 뒤 미리 파놓은 묘광의 바닥에 다시 구덩이를 파고, 다양한 보물을 가득 담은 ‘대나무 바구니’를 부장했다.
이 바구니엔 칠을 칠한 각종 무기류와 쇠도끼 등 철기류, 중국거울, 오수전, 말방울, 칠기, 붓 등 고인이 생전에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을 넣었다. 그런 다음 각종 제기에 감과 같은 과일과 다양한 제물을 담아 묘광 바닥에 넣고는 1차 제사를 올렸다. 이 때 마지막으로 밤(栗)을 뿌렸다. 이제 하관절차에 들어갔다.
굵은 밧줄을 이용해 목관을 안장한 다음 목관과 토광 사이에 흙을 뿌려 덮은 뒤 다시 철기와 칠기를 올려놓았다. 그런 뒤 2차 제사를 올렸다. 이 때 친족과 주변 읍락의 수장들이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들을 넣어 망자의 마지막 길을 추모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관 위에 제수용품을 담은 칠기 제기들을 배열한 다음 3차 제사를 지냈다.
3차에 걸친 제사행위라. 그 경건함이란, 지금 떠올려봐도 대단한 장례식이 아닌가. ‘예의 나라이자 군자불사의 나라’답지 않은가.
■밤을 뿌린 이유
이곳에서 확인된 제사용기와 제사용품을 보면 흥미진진하다.
옻칠을 한 사각형 제기, 원형 제기, 원통형 제기 등이 확인됐다. 중국에서는 제기를 조두(俎豆)라 한다. 공자가 소꿉놀이에 썼고, 부여에서는 평소 음식을 먹을 때도 썼다는 조두가 하반도 남쪽 지방인 다호리 일대를 다스린 변진 수장의 무덤에서 확인된 것이다. 특히나 이 조두 위에 감 3개가 담긴채 발견되었다. 하관식을 하면서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인 것이다.
목관 밑에는 밤 28개가 뿌려져 있었다. 하관할 때 사용된 동아줄 주위에 뿌린 것이다. 이 또한 제사행위였다. 알다시피 감과 밤은 대추와 함께 제삿상에 올리는 ‘삼색과일’이다.
그렇다면 2100년 전 다호리에서 제삿상의 기본차림이 확립됐다는 것인가. 다호리 사람들은 왜 밤과 감을 제사에 썼을까. 밤(栗)을 보자.
삼한의 밤은 중국사서에 알려질만큼 굵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마한의 금수초목은 중국과 비슷하지만, 배 크기만한 굵은 밤이 난다.(出大栗 大如梨)”고 설명해놓았다. <삼국유사> ‘원효불기’를 보면 “원효대사의 고향인 압량군(경산시)에는 한 톨이 밥 그릇 하나에 가득 찰 정도의 어마어마한 밤이 나왔다”고 한다.
밤은 예로부터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은 한결같은 ‘효심의 열매’로 알려져왔다. 즉 밤은 싹이 틀 때 껍질은 땅 속에 남겨 두고 싹만 올라온다. 그런데 땅 속에 남아있던 껍질은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다. 신기하기만 하다. 그러니 예로부터 밤나무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은덕을 절대 잊지 않는 기특한 나무로 여겼다. 밤나무 목재는 신주(神主)와 위패, 제사상 등 제사용품의 재료로 쓰였다. 다호리 사람들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은덕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목관 주변에 밤을 뿌렸을 것이다.
■감이 담긴 사연
다호리 제기 위에 담긴 감(枾)도 대표적인 제사용 과일이다.
그런데 감나무에게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감나무를 그냥 심기만 해서는 절대 탐스러운 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어미보다 훨씬 못한 땡감이 달릴 뿐이다. 그래서 감나무와 비슷한 고욤나무를 대리모로 고용해야 한다. 고욤나무를 밑나무로 하고 감나무 가지를 잘라다 접을 붙여서 대를 잇는다.
사실 감과 흡사한 고욤은 너무 떫고 온통 씨투성이여서 먹기가 어렵다. 서리를 맞히고 흑자색으로 완전히 익혀서 반죽처럼 으깨어 놓아야 겨우 먹을만 하다. 그래도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의 식사대용으로 사랑받았다. 어떻든 감나무는 정성껏 남의 자식을 키우는 고욤나무 덕에 탐스런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까 감과 고욤의 이야기는 사람은 다른 이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조상의 가르침을 받아야 비로소 진정한 인격체로 거듭난다는 교훈을 제사상의 감은 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종실록> ‘오례(五禮)’을 보면 ‘천신종묘의(薦新宗廟儀·종묘에 새로 나온 곡식이나 과실을 먼저 올리는 의식)’를 올릴 때 ‘10월의 과일’ 속에 감이 포함돼 있다. 다만 제사의 필수인 ‘삼색과일’ 가운데 대추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기야 발굴단의 눈에 씨앗만 남은 대추가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호리 유물과 동시대에 제작된 전한시대 중국거울이나 김해 양동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진 청동거울의 명문에서 대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2000여 년 전 다호리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3번이나 예를 올리며 막 돌아가신 ‘망자’을 추모하던…. 한편으로는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공자도, 중국의 천자도 닮고 싶어했던 ‘예의 나라, 군자불사의 나라’였는데…. 흉측한 패륜의 짓거리들이 자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흔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종도 '비서실'의 손을 들어주다. (1) | 2013.10.03 |
---|---|
역사상 최강의 활쏘기 달인은? (0) | 2013.09.27 |
'막말, 항명, 풍문' 탄핵도 허하라! (1) | 2013.09.24 |
김일성의 '논개작전' (0) | 2013.09.17 |
신라를 울린 '효녀지은' 이야기 (0) | 2013.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