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난신적자'에겐 공소시효가 없다

기원전 621년 춘추시대 진(晋)나라 문공은 천토(踐土)라는 곳에서 천자(주나라 양왕)을 위해 회맹식을 열었다.
제후 가운데 최고 실력자인 문공이 다른 제후들을 거느리고 천자(양왕)를 위해 베푼 충성맹세의 장이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천토지맹(賤土之盟)’이라 일컫는다. 이로써 진 문공은 춘추시대 제후국을 대표한 첫번째 ‘춘추5패’가 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공자가 쓴 역사책인 <춘추>가 이 역사적인 팩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천자가 하양(河陽)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고만 기록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아닌 명백한 왜곡이었다. 공자는 과연 왜 그랬을까.

1905년 을사늑약 장면을 그린 당대의 풍자그림. 왜병의 총칼 앞에서 서명하는 을사오적과 고종 황제,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흘리고 있는 일본 외교관들의 모습을 그렸다. 을사오적은 천고의 '난신적자'로 꼽힌다.

 

■공자, 역사왜곡 불사하다
그것은 바로 문공의 행위가 대의에서 벗어난 짓이라 봤기 때문이다.
이미 천자국인 주나라의 세력이 위축됐던 때였다. 반면 제후국 중 하나인 진나라는 문공의 치세에 천자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 때 진 문공이 제후국을 대표한다는 명목으로 천자(주 양왕)를 초청해서 회맹, 즉 충성맹세의 의식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말이 초청이고, 충성맹세였지 천자를 ‘소환’해서 자신의 위세를 떨친 것이었다.
공자는 아무리 천자를 위한 충성맹세의 장이라 해도 제후(진 문공)가 감히 천자(주 양왕)를 소환, 즉 ‘부를 수는 없다’고 포폄을 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춘추필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공자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전하고자 한 뜻은 분명했다.
“이같은 포폄(褒貶·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는 자세)으로 당대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삼으려 했던 것”(<사기> ‘공자세가’)이다. <춘추>는 기원전 722(은공 원년)~기원전 481년(애공 14년)까지 242년 간의 노나라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그런데 공자는 이 <춘추>의 집필에 인생의 황혼기를 전부 걸었다.
왜 그랬을까. 공자는 사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이곳저곳을 다니며 벼슬을 구했다.
“만약 나를 등용하면 1년 안에 효과를 볼 것이고, 3년이 되면 큰 성과를 얻을 것인데…”하며 안타까워 했던 공자였으니까. 하지만 정의와 도덕이 실추된 춘추시대, 당대의 세상은 공자를 원하지 않았다.
공자는 “하늘도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다…나를 알아주는 자는 아마도 하늘이 아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된다. 군자는 죽은 다음에도 이름이 전해져야 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내 자신을 드러내겠는가.”
이것이 바로 <춘추>를 지은 이유이다. 공자가 <춘추>를 쓸 때는 어떤 제자들도 첨삭을 가하거나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춘추> 만큼은 공자 혼자 마무리 지은 것이다.
<춘추>가 완성된 후 공자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후세에 날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또한 <춘추> 때문일 것이다.”(<사기> ‘공자세가’)
이것이 바로 역사가 공자의 ‘춘추필법’이다. 얼마나 엄정한 포폄을 가했는지 훗날 맹자가 무시무시한 명언을 남긴다.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니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맹자> ‘등문공 하’)

 

■하늘에 도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난신적자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난신·亂臣)와 부모를 해치는 자식(적자·賊子)를 가리킨다. 태어나서는 안될, 이 세상 어디에도 쓸모없는 인간말종이거나 나라를 팔아먹을 역적을 뜻한다. 이 말은 곧 무엇인가. 
“<춘추>를 통해 포폄을 가한 까닭은 후에 군주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해서 실행하게 하 있다.”(<사기> ‘공자세가’)고 했다.
즉 <춘추>의 대의(大義)’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자는 곧 난신적자의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이 <사기>를 지으면서 공자를 제후의 반열 위에 올려놓은 <공자세가>를 쓰면서 무한한 존경심을 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춘추>는 시시비비를 변별해놓은 것이며 정의를 말하고 있다. <춘추>를 알지 못하면 난신적자가 있어도 알아 차리지 못한다.”(<사기> ‘태자공자서’)
그랬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 같은 어진 사람들이 굶어죽고, 죄없는 사람을 죽여 사람의 간을 회쳐먹은 희대의 도적(도척)이 천수를 누린 것을 두고 장탄식했다.
“하늘은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진 백이와 숙제는 굶어죽고, 도척은 천수를 다했다. 도척이 대체 무슨 덕행을 쌓았는가. 반면 공평하고 바른 일만 하는 사람이 재앙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대체 하늘의 도리라는 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天道是耶非耶)”(<사기> ‘백이 열전’)
사마천 역시 정의가 사라지고 난신과 적자들이 들끓는 세태에 ‘하늘의 도가 과연 있는 것이냐’며 울분을 토하면서 불후의 역사서인 <사기>를 완성한 것이다.  
“그 때문에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에 희망을 걸어본 것입니다.(故述往事 思來者)”(<사기> ‘태사공자서’ 등)

을사오적을 죽이라는 상소문을 올린 면암 최익현. 최익현은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의 목을 치라고 했다. 

 

■난신적자가 똬리를 트는 까닭
무슨 이야기일까. <춘추>와 <사기> 모두 역사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난신적자들이 역사의 지엄한 심판을 받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난신적자는 왜 나타나는 것일까. 조선 후기 학자 위백규는 <논어> ‘자한편’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사람의 도리를 손상시키는 것은 모두 ‘권(權)’이라는 한글자 때문이다. 작은 말과 행동에서 윤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권(權)’자 한글자 때문에 망해서 난신적자의 소굴이 됐고, 소인배들의 핑계가 됐던 것이다.”(<존재집>) ‘독서차의’)
위백규는 그러면서 “사람들은 부디 ‘권’ 자를 가슴 속에 남겨두지 말아야만 군자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당부했다.
조선 후기 학자 혜강 최한기 역시 “난신적자는 관직의 권세를 믿고 나쁜 짓을 저지른다”고 했다.
난신적자는 백성을 잘 다스리려는 데는 뜻이 없다는 것. 오로지 부의 축적과 개인의 영달을 좇는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을 등용하는 이가 그 자의 숨어있는 악을 살피지 못해 높은 벼슬에 승진시키면 나쁜 버릇을 거리낌없이 하게 된다는 게 최한기의 말이었다.(<인정> ‘용인문 4·난적의 자초’)
최한기는 “그렇게 되면 임금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기까지 하고 작으면 착한 사람들을 상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말선초의 학자 야은 길재는 “권세를 믿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사특한 의론으로 종묘와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면서 “그들은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고 했다.(<야은일고> ‘서문’)

 

■“난신적자는 1000년이 지나도 구족을 멸합니다.”
조선에서도 ‘난신적자’의 처벌은 지독했다. 
예컨대 1548년(명종 3년) 영의정 윤인경 등이 선왕(중종) 때 국정을 농단했던 김안로의 잔당과, 을사사화(1545년) 연루자들의 가산을 끝까지 추적해서 적몰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명종은 일종의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언급하면서 “이미 처벌받은 사안을 이중처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춘추의 법에 따라 1000년 전의 일이어도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명종실록>) 1609년(광해군 1년) 광해군이 “역모죄로 사사된 임해군을 위해 조석전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조석전은 고인을 생전과 똑같이 섬긴다는 의미로 아침·저녁상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난다.
“춘추의리는 몸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과거냐 현재냐의 구별이 없습니다. 썩은 해골도 주벌할 수 있습니다. <춘추>의 의리가 아주 엄하니 죽었다고 해도 추호라도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어찌 친친(親親)의 도리 때문에 역적 토벌의 대의(大義)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아니되옵니다.”(<광해군 일기>)
1471년(성종 2년) 대사헌 한치형은 “난신적자는 천지 간에 용납되지 못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든 그 난신적자를 죽여야 하며, 비록 구족(九族)을 다 죽인다 하더라도 시원치 않습니다.”(<성종실록>)
무슨 뜻인가. 법의 심판은 공소시효가 있지만, 역사의 심판은 공소시효가 없다는 뜻이다. 혹은 백골이 되어서도, 혹은 1000년이 지나도, 혹은 구족을 다 죽이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주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살벌한 말인가.

<동사강목>을 편찬한 안정복은 개인 역사서라도 당대의 기록을 남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했다.

 

■“난신적자 처벌은 법에도 호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뿐이 아니다. 난신적자에게는 법이 필요 없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장유는 “<춘추>의 의리를 보면 난신적자는 반드시 죽여야 하며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계곡집> ‘잡저·관고론’)
고려말 간관 오사충은 “폐위된 신우(우왕)와 신창(창왕)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춘추의리상 난신적자는 누구나 죽일 수 있습니다. 먼저 사형을 집행한 뒤에 아뢰도 됩니다. 사사(士師·재판관)에게 맡길 필요도 없습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이것은 <맹자> ‘등문공·하’의 구절, 즉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니 난신적자가 두려워 했다”는 구절을 주석한 주자의 주석에 따른 것이다.   
“난신적자를 주벌하는 것도 꼭 사사(士師·재판관)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난신적자를 주벌할 수 있다.”(<주자집주>)
송시열은 더했다. 정적인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이며 그와 가까운 사람들까지 “당신들도 역시 윤휴의 당여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송자대전>)
송시열은 ‘난신적자는 빨리 죽여야 한다’는 살벌한 시까지 남겼다.
“난신적자는 즉시 토벌해야 하니(亂賊卽當討) 어찌 법관까지 기다리랴.(奚須司寇時)”(<송자대전> ‘오언고시’)
그러니까 난신적자는 재판관에게 맡길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난신적자의 주변에 똬리를 틀고 있는 당여(黨與·도당)까지 모조리 주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상 최악의 난신적자들
우리 역사상 최악의 난신적자는 아마도 ‘을사오적’일 것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을사늑약 직후(1905년 음력 11월3일)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올린 상소문을 보라.
“아 통탄스럽습니다.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에 함부로 도장을 찍은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오적의 목을 베어 매국한 죄를 바로잡고…. 명만 내리시면 역적들의 시체를 길거리에서 불태울 것입니다.”(<면암선생문집> ‘오적을 토죄하라’ 상소문 1905년)
최익현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고, 급기야 대마도 감옥으로 끌려갔다.(1906년) 그곳에서도 선생은 ‘난신적자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오언절구의 시를 남겼다. 
“노인으로 농촌에서 분기하여(皓首奮견畝) 초야에서 충성심을 자원했지.(草野願忠心) 사람들 모두 나서 난신적자를 토벌하니(亂賊人皆討)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르리( 何須問古今)”(<면암선생문집>)

인생의 황혼기를 <춘추> 저술에 쏟았던 공자. 공자는 <춘추>에서 당대 인물과 정치의 시시비비를 가려 후대의 교훈으로 삼았다. 난신적자의 출현을 경계하고자 <춘추>를 지었다는 것이다.

 

■난신적자는 어느 시대엔들 있다
난신적자를 처단하라는 상소문을 보면 늘상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亂臣賊子 何代無之)라 시작한다.
그만큼 난신적자는 어느 시대나 똬리를 틀고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임금과 백성의 뜻에 반하는 행태를 벌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년이 지난다 해도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가.   얼마 전 유수한 역사학자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헌법을 파괴·유린한 사람들을 기록하는 ‘반헌법 행위자 열전’을 편찬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헌법을 짓밟고 훼손하고 그 가치를 정면으로 배반한 이들이 헌법과 법치를 이야기한다. 헌법을 누가 과연 어겼는지 정리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민특위 습격사건부터 민간인 학살, 각종 조작간첩 사건 등에 연루된 검사·판사 200~300명이 수록될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난신적자를 가리고자 하는 작업’이라 했다.
대상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역시 이렇게 변명할 것이다. 누가 날 역사의 이름으로 처단할 수 있을까. 몇몇 역사가의 개별적인 평가가 뭐 그리 대단한가.

 

■군자의 불행과 소인의 다행  
하지만 과연 그럴까. 1317년(고려 충숙왕 4년) 정승 민지가 <본조편년강목>을 찬술해서 임금에게 올렸다. 그런데 당대 선비들이 민지를 비난했다.
“민지의 글솜씨가 약간 있었지만 통속적이고 마음씀씀이도 바르지 못하다. 내시들에게 아첨했고, 성리학을 몰라 성인의 뜻에 맞지않은 서술이 있었다.”
그러나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은 세간의 비평을 일축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론을 달았다.
“하루라도 역사기록은 없어서는 안된다. 전쟁 통에서도 역사기록은 전해졌다. <사기> <한서> 등도 개인저술이었다. 당대 사람들이 꺼려했던 부분도 사실대로 썼지만 어느 누구도 잘못 썼다고 하지 않았다. 개인 저술인데도 어느 누구도 지나치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붓과 종이를 주어 저술의 완성을 축하해주었다.”
안정복은 “그런 덕분에 사관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 뜻을 펼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안정복은 야사(野史)를 금하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왕조가 야사를 금한 것이 무슨 문제였다는 것인가. 안정복의 말이 이어진다.
“세월이 흐르면 선악의 자취가 깡그리 없어진다. 그러니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거리낄 게 없게 되고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된다.”
안정복은 그러면서 “이것이(역사를 쓰지 않는 것이) 바로 군자의 불행이요, 소인의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니 민지의 사서 편찬작업은 당연히 후세에 본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두려운 자들
이쯤에서 다시 맹자의 말을 떠올린다. “공자가 <춘추>를 짓자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는 그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반헌법 행위자 열전에 거론되는 인물들 가운데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두려워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두려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역사의 서릿발 같은 평가가 얼마나 무서운 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반면 역사의 평가를 바라는 이들도 있다. 두려울 게 없고, 도리어 칭찬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 ‘백이열전’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 이름을 후세에 전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암혈에 사는 은자(隱者)의 경우 누군가 전해줄 사람이 없다면 연기처럼 사라진다. (불의를 참지못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는 공자가 그들의 이름을 전했기 때문에 그 명성이 드러났다..)
사마천은 그러면서 공자의 한마디를 보탰다.
“군자(여기서는 위정자들이라는 의미)는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그렇다. 공자의 말씀처럼 위정자들 가운데는 역사를 두려워하는 이와, 역사의 포폄을 기다리는 이와 같은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당신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