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고 온 일본인들이…무덤 속에 금사발이 묻혀있다던가 혹은 금닭이 운다던가 하는 전설을 퍼뜨리며….”(<조선> ‘고분발굴만담’, 1932년)
일제강점기에 경주의 고분을 발굴했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도굴행각을 개탄하는 글을 발표했다. 일본인조차 낙랑고분과 가야고분, 고려고분 등이 무차별 싹쓸이 도굴로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마저 한숨 쉰 이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고분들이 있었다. 4세기 후반~6세기 전반 사이에 왕경(경주) 안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들이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묘제 덕분이었다. 돌로만 쌓은 고구려·백제의 적석총과 달리 이 시기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차례차례 두텁게 쌓은 형태였다.
돌과 흙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령 황남대총 남분의 전체 체적은 4만2291㎥에 이르렀다. 2.5t트럭으로 2만4877대가 실어날라야 하는 양이다. 나무 관 위에 곧바로 덮은 자갈돌(적석)의 양만 쳐도 1290㎥에 달했다. 돌의 양만 2.5t트럭 758대분이었던 것이다. 황남대총 북분의 경우 하루에 200명의 장정을 동원해서 매일 공사를 진행시킨다 해도 6개월 이상 걸리는 것으로 계산됐다.
실제 1900년대 초반 경주 황남동 고분군을 첫 발굴한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했지만 자갈돌이 끊이지 않고 나오자 끝내 조사를 중단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조선통감부의 지원 아래 권총까지 차고 공식발굴에 임했던 이마니시마저 끊임없이 솟구치는 자갈돌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만 것이다.
“도굴을 하려면 갱도를 뚫어야 하는데 그 엄청난 돌과 흙을 감당할 수 없죠. 곧 무너져서 생매장될 수밖에 없으니까….”(이한상 대전대 교수)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과 흙이 무너져 내려 목관과 완전 밀착됐기 때문에 관속의 유물을 찾기란 더군다나 하늘의 별따기였다.
신라인들은 이 왕릉급 무덤들에 금(동)관을 비롯한 화려한 황금유물들을 묻어놓았다. 살아있을 때처럼 사후세계까지 지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매장풍습이 1400년 후 일본인들의 도굴을 원천봉쇄시킨 것이다. 경주시가 19일을 신라왕릉 109기 가운데 2기(쌍분)를 벌초하는 행사를 연다.
‘신라 임금 이발하는 날’로 행사 이름을 정했다니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다. 벌초하는 무덤에게는 ‘인교동 119호분’이란 이름만 붙어있다. 내물왕릉(재위 356~402)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역시 적석목곽분인 덕분에 온전히 살아남았다. 그 분은 누구일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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