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님, 이건 꼭 남근 같습니다. 아무래도 안압지에서 출토된 적이 있는….”
대학원생(성균관대) 신분으로 조사에 참여하고 있던 김성태가 흥분했다. 무덤 속에 퇴적돼 있던 흙더미 속에서 범벅이 되어 버린 유물 한 점을 들고 나왔다. 꼭 남근처럼 생긴 유물이었다.
용강동 고분에서 확인된 유물. 처음엔 남근이라고 판단했지만 목없는 흙인형 .
◇무덤에서 웬 남근이?
1986년 7월 18일. 경주 용강동 폐고분을 발굴 중이던 경주고적발굴단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널길, 즉 연도와 무덤 방이 닿는 곳에 마련된 빗장 문을 열고 들어가 무덤내부에 쌓여있는 흙을 제거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핏 보아 남우세스럽게 생긴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이상한데. 그늘에서 흙을 잘 털어보도록 하지.”
마음이 찜찜했다. 무덤 속에 무슨 남근이란 말인가. 그 망측스럽게 생긴 유물을 물로 씻었으나 그건 아차 실수였다. 그 과정에서 색칠한 일부분이 벗겨져 나간 것이다.
어쨌든 흙을 걷어내자 모습을 드러낸 유물은 남근이 아니었다. 그건 놀랍게도 목이 없어진 여성인물 토용(土俑·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사람 인형)이었다. 통통한 몸매에 주름치마를 입은 모습. 앞면에는 붉은 칠까지 되어 있었다.
조사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이러한 인물토용이 발굴된 예가 없었다.
‘그걸 남근이라고 생각했으니….’ 모두들 농담을 해댔다.
“아이고. 정말 X도 모르면서 X이라고 했네.”
농담도 잠깐. 비상이 걸렸다. 먼저 달아난 목을 찾아야 했다. 부러진 목을 누가 가져갈 리도 없으니 반드시 주변에 있을 것이었다.
“단장님 빨리 들어와 보세요.” 무덤 내에 쌓인 흙을 제거하던 신창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또 뭐야.”
무슨 사고인가 해서 달려가 보았는데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 모습의 토용(土俑) 몇 개와 돌로 만든 머리받침인 석제두침(石製頭枕) 등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목 없는 신라여인의 흙인형
이같은 인물 토용들이 무덤내의 시체를 안치하는 시상(屍床) 앞에 여러 점 모여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작은 크기의 토용들이지만 마치 무덤 내에 들어오는 악귀라도 쫓아낼 모습으로 우뚝 서있었을 터였다. 이런 큰 발굴이라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즉 언론사들의 과열경쟁을 되도록이면 막아야 한다.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 연구자들이나 주민들이 몰려와 발굴현장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발굴단은 가설통로를 길게 만들어 출입통제 시설을 마련하고 조사원들만 한사람씩 교대로 조사하도록 했다.
이렇게 세상에 알려진 통일신라시대 무덤이 바로 용강동고분(龍江洞古墳)이다.
현재 이 무덤은 아파트 숲 속에 들어가 있지만 잘 정비된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사실 마을사람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무덤을 개무덤·말무덤·고려장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더구나 여러 차례 도굴된 무덤은 주변 경작지의 객토를 위한 흙 채취에 사용되어 파괴되었고, 생활쓰레기까지 버려진 전형적인 폐고분이었다.
그러다가 신라문화를 사랑하는 모임인 신라문화동인회가 “신라시대 어느 왕의 무덤으로 추정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세인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동인회원들은 1977년부터 주변 민가에 이용된 석재들이 분명 이 무덤의 부재들인 것으로 판단했다.
회원들은 발굴조사를 통한 고분정비의 시급함을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끈질기게 건의했고, 79년 발굴조사계획이 수립됐다.
그러나 운이 없었다. 곧바로 들어선 전두환 정권의 정부기구축소 작업으로 경주사적관리사무소가 1980년 11월 폐쇄됨에 따라 조사계획이 증발되고 말았다.
◇향토사학자들이 찾은 신라귀족무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1986년 5월.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던 이원홍이 경주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원홍은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실시하고 있는 황룡사터 발굴현장을 방문했는데 엉뚱하게도 당시 국립 경주 박물관장이던 정양모가 용강동 폐고분 발굴문제를 건의했다.
사전조사 결과도 ‘그다지 큰 효용가치는 없음’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경주지역의 평지에 마련된 석실고분이 조사한 예가 없으니 이 폐고분을 발굴하면 신라시대 무덤연구에는 좋은 자료가 될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고 경주고적 발굴조사단의 조사원 일부를 파견해서 짧은 시간에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86년 6월 16일, 발굴조사를 위한 간단한 개토제를 지냈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서 엄청난 양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무덤을 헐어낸다고 하늘이 노한 것인가. 그때까지 수많은 개토제 행사를 해왔지만 그날처럼 많은 비를 맞은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발굴조사는 통일신라의 인물토용 발견으로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눈앞에 살아 숨쉬듯 환생한 토용들. 신라고분 발굴사상 최초의 출토였기에 ‘最初, 最古’에 민감한 언론을 흥분시켰다.
발굴현장에서 유물을 공개하기로 하자 서울의 모든 일간신문 문화부기자들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용강동 현장으로 달려왔다.
한갓 쓰레기장이었던 용강동 폐고분은 이렇게 뉴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개무덤이라고 해서 마을에서까지 천대받던 고분이 일약 ‘신라 귀족급 이상의 무덤’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경찰 감식반까지 동원된 지문감식
더욱 놀라운 일은 인물토용 출토 후 조사과정에서 손마디 크기에 지나지 않지만 청동제 12지신상이 7점이나 출토된 것이다.
마침 교양교육용 프로그램을 제작하느라 현장에 내려와 있던 모 방송국이 “절대 보도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무시하고 특종을 터뜨렸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인 허만일은 “특정 언론에 출토사실을 흘렸다”는 오해를 받고 모든 언론사 기자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 여파는 발굴단에게까지 미쳐 거의 녹다운이 되다시피 했다.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게 기자들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은 것이다.
각설하고, 이미 여러 차례 도굴로 많은 유물이 없어졌겠지만 도굴꾼들은 인물토용의 가치를 몰라서 내버려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고분엔 인물토용보다 더 중요한 유물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어쨌든 무덤에서 출토된 인물토용은 남성상 15점·여성상 13점이었고, 그밖에도 토제의 말 3점과 파편 그리고 토기 등이 널려있었다.
그런데 최초 발견 때 남근으로 오해했던 여성 토용의 머리부분은 결국 무덤 내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도굴꾼들이 유물을 쓸어갈 때 함께 휩쓸려 들어간 것일까.
아무튼 출토된 이들 인물토용에 표현된 복식과 색상을 검토한 결과 피장자, 즉 무덤의 주인공은 진골(眞骨) 이상의 상층 귀족 계급자였음을 밝혀냈다.
발굴된 치아는 20세 미만 사람의 이발(齒牙)로 감정됐다. 함께 출토된 어깨받침돌인 견좌석(肩座石)의 폭이 34㎝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보아 진골계급 젊은 사람의 무덤이 아닐까. 아니면 견자의 폭이 좁은 것으로 보아 성인남성이 아니라 여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86년 8월13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신라인의 지문. 흙으로 만든 말인형의 안장 부분에 새겨져 있었다. 인형을 만든 도공의 것으로 추정되며, 가장 오래된 지문으로 판단된다.
일부 토용들의 옷이 비색(緋色·붉은 비단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는 이 토용들의 신분이 육두품 아찬급(阿湌級)이라는 뜻이다. 신라 17등관제와 공복제도에 따르면 진골 이상은 자색이며 6두품(제6위 아찬~9위 급찬까지)은 비색이었다.
따라서 무덤주인공의 신분은 비색 계급을 거느릴 수 있는 진골계급 이상의 신분이라는 뜻이다. 다만 왕의 신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용강동 고분의 시대는 출토유물과 중앙연도식(中央羨道式) 석실분 구조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기에 접어든 시기나 혹은 그보다 약간 늦은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복식제도는 진덕왕 3년(649년)에 중국 의관을 채용하고, 문무왕 4년(664년)에는 부인의 의복도 중국일색으로 변한다. 용강동 출토 토용과 여인상의 옷 형식도 역시 당연히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한 가지 여담은 토마(土馬)의 말안장 안쪽에 당대 도공의 흔적인 지문이 확인됐다는 점.
이 지문은 제작당시 마무리 처리를 하면서 묻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지문감식은 치안본부 수사부 감식과 체증계장인 변명식(경감)이 담당했다.
지문감식을 하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당시 이 용강동 고분 발굴 보도를 두고 언론사끼리 대단한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어쨌든 이 지문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지문은 맞지요?”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당시 조유전 발굴단장은 “그렇기는 그렇지요”하고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동아일보 사회부가 “뭔가 특종거리를 찾을 수도 있겠다” 싶어 변명식을 데리고 몰래 발굴현장으로 뛰어내려 온 것이었다. 문화재를 담당하는 문화부가 아니라 사회부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발굴일 정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발굴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감식결과 이 지문은 오른손 집게손가락(검지)의 것으로 판명됐다. 파상문(波狀文·소용돌이 형상) 지문이며 지문분류번호는 ‘9번’으로 추정했다. 그는 이 와상문 지문은 한국인 100명 중 45명 정도로 발견되는 가장 흔한 지문으로 보았다.
물론 나이와 성별은 구별할 수 없으나 지문 융선이 많이 끊겨 있는 점 등의 특징으로 보아 예술가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지문이며, 남자 도공(陶工)의 것으로 추정했다.
어쨌든 이것은 통일신라시대 어느 도공의 지문임이 틀림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도굴 때문에 시상(屍床)이 교란되어 추가장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었다는 점. 원래 이 용강동 석실분처럼 시상(屍床)을 두 벽에 붙여 동서로 축조하는 형태는 추가장(追加葬)인 경우가 많다. 경주 서악리 석실분, 장산 토용총도 같은 형태의 추가장이었다.
이 용강동 고분에서는 확인할 도리는 없으나, 수키와편이 먼저 매납된 시상의 받침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발굴에서는 또 연도부(羨道部)와 묘도(墓道)사이의 관계를 확실히 밝힐 수 없었다.
또 하나 처음 발굴의 단초였던 토용의 없어진 목은 영원히 찾을 수 없었다. 발굴단은 바닥의 흙을 걷어다 남김없이 체를 쳤으나, 끝내 목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도굴범의 범행 때 묻어간 것이리라. 역시 그 천인공노할 도굴이 문제인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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