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섞여 화장실에 있는데 한 사람이 아니다(人雜厠在上非一也).”
후한 시대의 사전인 <석명>은 ‘측(厠·화장실)’의 또 다른 한자인 ‘잡(雜)’을 풀이하면서 ‘본래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북적대며 거리낌없이 볼일을 본다는 의미의 글자’라 했다.
십수년 전까지 중국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악취를 풍기는, 그것도 칸막이 없는 화장실에 들어간다는 것도 낯선 풍경인데, 볼일을 보면서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던 경험이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후한 시대 즈음 서양의 로마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었다. 벌건 대낮 광활한 광장에 구멍만 100개 송송 뚫어놓은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야밤에 똥·오줌을 창밖으로 마구 던져버렸다.
오히려 고급 화장실 문화는 중국역사에서 찾는 편이 낫다. 서진의 명사였던 석숭(249~300)의 측소(厠所·화장실)는 호화롭기 그지없었다(<세설신어>). 화장실 안에 10명의 미녀가 늘어서 비단 향주머니를 들고 시중을 들었다.
손님들은 화장실 안 진홍색 휘장을 드리운 침상에 깔아놓은 화려한 요 위에서 시녀들의 ‘코디’에 따라 옷을 홀랑 벗고 새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급해도 부끄러워서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손님이 속출했다. 명나라 귀족의 화장실은 독특했다.
높은 고루(高樓) 밑에 나무상자를 두고 그 속에 거위털을 두었다. 변이 떨어지면 거위 털이 풀풀 날아올라 덮었고, 곁에서 기다리던 동자가 악취를 풍길 틈도 없이 득달같이 변이 담긴 나무상자를 들고 갔다(<운림유사>).
귀족들에 한정되긴 했지만 제법 깔끔했던 중국의 화장실이 언제부터 ‘더러운 중국’의 상징이 됐는지 알 수 없다. 1965년 발발한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홍위병들이 ‘개인화장실을 주자파의 퇴폐적인 사치물’이라고 낙인찍어 조직적으로 파괴한 것도 화장실 문화를 후퇴시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1996년 장쩌민(江澤民) 당시 주석은 “인공위성을 만드는 나라가 화장실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느냐”고 개탄했다. 지난 7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농가도 신식 화장실로 개조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중국은 지금 화장실 혁명, 즉 ‘처쒀 혁명(厠所革命)’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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