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11일 정오 무렵 마산 앞바다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3·15 부정선거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김주열군(당시 17살)이었다.
오른쪽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 끔찍한 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27년 뒤인 1987년 6월9일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던 연세대생 이한열씨(당시 22살)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뒤통수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6·29 항쟁의 뇌관을 터뜨린 사건이다. 이 두 발의 최루탄은 독재시절 그 지난했던 민주화의 쓰라린 역정을 상징하는 ‘눈물탄’이었다.
그후로도 10년 이상 시위현장에서 시민을 괴롭히던 최루탄은 1990년대 말 사라졌다.
하지만 내수용으로는 용도폐기된 최루탄이 암암리에 수출용으로 제작되어 해외로 팔려갔다.
2014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김해시의 최루탄 제조업체가 2011~2014년 사이 전세계 24개국에 316만발의 최루탄을 수출한 것으로 집계됐다.
제품과 함께 악명 또한 고스란히 수출되고 있다. 2014년 터키의 15살 소년이 한국제 최루탄을 맞아 9개월간 사경을 헤매다가 사망했다. 이 소년은 ‘터키의 이한열’이라 일컬어졌다.
인구 120만명에 불과한 바레인은 2011~2012년 사이만 무려 150만발의 한국산 최루탄을 수입했다. 그 기간동안 무려 39명의 사망자를 냈다.
점입가경의 사태가 199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다.
수하르토 정권이 동티모르 독립시위의 유혈진압 때 최루탄 뿐 아니라 방패와 방독면, 트럭, 소총, 군복까지 한국제를 사용했다.
한국제 최루탄의 위력을 알려주는 달갑지않은 일화도 있다. 필리핀 구매사절단이 직접 체험한 한국제 최류탄의 독성에 깜짝 놀라 수입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필리핀처럼 더운 나라에서 이 최루탄을 사용하면 견디지 못하고 다 죽을 것”이라고 했단다.
국가경제의 측면에서 수출효자업종이라고 치부할 것인가. 성능좋은 한국산 최루탄을 사가는 외국 집권자의 면면을 보라.
부도덕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 죄없는 민중을 향해 마구 쏘아댄 대가로 벌어든인 돈을 반겨야 할까.
한국인은 힘들여 쌓은 민주주주의 정신을 수출하지는 못할 망정 언제까지 민중의 눈물과 고통을 내다 파는 부도덕한 죽음의 상인이 될 것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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