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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영부인, 여사, 씨…


1932년 동아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이 어른은 변호사 허숭씨 영부인, 이화의 천재시오. 미인이시죠.”

영부인의 영(令)자는 ‘남을 높인다’는 의미의 접두어다. 영부인은 남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일 뿐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대통령 부인을 지칭하게 됐을까.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를 ‘영부인’으로 지칭하는 기사가 1949년 11월 5일 동아일보에 실린다.

“푸랑체스카 여사는 ‘더 초우즌 우-먼(선택된 부인)’으로서 최대최고의 희망인 일국 대통령의 영부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요즘의 관점이라면 엄청 시대착오적인 기사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이 기사의 부제는 ‘이 대통령 부인의 근황’이었다.

그때까지도 영부인 호칭은 대통령 부인의 전유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시중에서는 프란체스카에게 ‘호주댁’이라는 애칭도 통했다.

프란체스카의 고국인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오독하면서 빚어진 촌극이었다.

‘대통령부인=영부인’의 등식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굳어졌다.

50대 이상의 세대에게는 지금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라는 말이 익숙하다.

따지고보면 대통령 부인을 영부인이라 해도 권위적인 발상으로 폄훼할 수는 없다.

영어로도 ‘퍼스트레이디’라 하지 않은가.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彭麗媛)도 ‘부인 혹은 제일부인(第一夫人)’이라 한다.

심지어 미국의 부통령의 부인은 ‘세컨드레이디’다.

각 나라 지도자의 부인에게 예우상 ‘1급 혹은 2급’의 칭호를 붙여도 괜찮다는 의미로 읽힌다.

다만 한국의 경우 ‘영부인’ 명칭은 군사정권을 겪으면서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낙인찍혔다.

이후에는 ‘부인’ 혹은 ‘여사’ 명칭을 쓰거나 그냥 ‘씨’만 붙이는 경우도 있다.

남편의 지위에 따라 여성의 호칭을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니 ‘~씨’가 적당하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청와대는 대통령 부인을 ‘여사님’이라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물론 대면호칭은 ‘여사님’이겠지만, 언론의 공식호칭은 ‘여사’로 해달라는 뜻이겠다. 영부인 호칭이 아무래도 어색하다는 것이다.

물론 ‘씨’의 호칭도 결코 낮춤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듣는 사람이 불편한 호칭이라면 곤란하다. 굳이 그렇게 부를 필요는 없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