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초중반 중국 양나라를 방문한 12개국 사신을 그린 ‘양직공도’를 살펴보면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예컨대 가죽신을 신고 있는 백제 사신과 달리 왜국 사신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서있다. 이를 두고 ‘미개한 왜국의 문화 수준’이라고 폄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각 나라의 기후와 풍습을 고려하지 않은 너무 일방적인 생각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왜국의 경우 굳이 신발을 신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 겨울 날씨가 매서웠던 고구려에서는 “구걸해서 어머니를 공양했던 바보 온달이 너덜너덜한 옷에 ‘해진 신발(弊履)’이라도 반드시 신었다”(<삼국사기> ‘열전·온달전’)는 기록이 있다.
초창기에는 혹독한 냉기와 뜨거운 열기로부터 발을 보호하려고 신발을 신었다. 그러나 점차 신분과 빈부의 격차에 따라 신발의 형태와 장식은 천양지차로 변해갔다.
이미 기원전 14세기 무렵에는 나무 밑창에 가죽, 모피, 그리고 금과 구슬로 한껏 장식된 투탕카멘의 신발이 등장한다.
백제와 신라 고분에서도 죽은 임금이 사후 세계에서도 신고 걸어다니기를 기원하며 제작했을 금동신발이 여럿 확인된다. 사랑의 증표로도 활용됐다.
1998년 경북 안동의 ‘이응태 부부의 무덤’에서는 ‘원이 엄마’로 알려진 부인이 먼저 죽은 남편을 위해 정성스레 제작한 신발을 확인했다. 부인의 머리카락과 삼(麻)을 엮어서 신발을 만들어 남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전한 것이다.
머리카락 신발과 함께 “꿈속에서도 당신을 사랑하니 날 데려가달라”는 내용의 추모편지가 발견됐다. ‘조선판 사랑의 영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7일 스위스 취리히 인근 그라이펜제 호수 제방에서 기원전 3300~28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신발이 확인됐다. 유럽에서도 유명한 ‘호르겐 신석기 문화’로 잘 알려진 곳이다.
신발은 식물과 나무의 외피에서 뽑아낸 식물성 섬유를 엮어 만들었다. 수중다이버가 두꺼운 진흙 뻘층에서 찾아냈다. 산소가 차단되는 뻘층에서는 유물이 수백년, 수천년 동안 썩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잘 보존되기는 쉽지않은 일이다. 홀연히 나타난 이 신발의 주인공은 발길이 260㎜의 성인이란다. 이 신발을 신고 5000년전의 세계를 걸었을 신석기인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더욱이 뻘에서 애써 건져낸 유물은 산소가 닿으면 순식간에 훼손될 수 있다. 5000년이나 잘 보존된 귀한 유물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있으니 신줏단지 모시듯 관리해서 보존처리해야 한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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