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울 시내 덕수궁을 찾거나 혹은 지나치는 분들은 ‘공사중’임을 알리는 높다란 펜스를 보시게 될 텐데요.
대한제국의 황궁 정문인 대한문의 면모를 되찾는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대한문 월대(궁궐이나 전각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기단)를 재현하는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초에는 재현공사가 올해 안으로 끝낼 예정이었는데요. 알아보니까 공사일정이 다소 늦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재현공사를 위한 사전 발굴 조사에서 조선 시대 유구가 확인된 건데요. 원래 이곳은 궁궐이기 전에는 남이의 역모사건에 연루된 조영달의 집터였는데요. 역모사건으로 집이 몰수된 뒤 영응대군(세종의 여덟째 아들·1434~1467)의 부인에게 돌아갔다가 성종(재위 1469~1494)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추존왕 덕종의 맏아들)의 사저가 됐죠.
그러다 임진왜란 발발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 선조가 이곳을 임시거처로 사용했는데요.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궁궐의 면모를 갖췄고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1897년)의 황궁으로 탈바꿈됩니다.
이번에 월대 재현을 위한 시굴 및 사전발굴에서 궁궐 이전, 즉 월산대군 시기와 그 전 시기의 유구가 확인됐답니다. 다른 곳도 아닌 궁궐 영역에서 나오는 역사유구이니 그냥 넘어갈 수 없죠. 그래서 완전한 발굴조사 후 재현 공사를 벌이겠다는 겁니다.
■왜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뀌었을까
월대 복원과 관련된 기사를 쓰려고 이것저것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기사 한꼭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한문과 대안문’ 관련 기사였는데요. 아마 원래는 ‘대안문’이었는데, 어느 순간에 ‘대한문’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어렴풋 알고는 있는 이야기죠.
그러나 자세한 히스토리를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죠. 그래서 제가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당대의 신문기사는 좀 무미건조합니다.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은 “대안문 현판을 쓰는 관리로 의정부 참정 민병석을 임명”(황성신문 1899년 2월15일)했고, “정문에 대안문이라 쓴 현판을 달았고, 그 문 앞 축대 공사도 시작됐다”(독립신문 1899년 3월3일)고 했습니다.
뭐 일제강점기(1927~34)에 편찬된 <고종실록> 1906년(광무 10년) 양 4월 25일조는 “경운궁(덕수궁)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친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얻어서 유지한다면 나라가 크게 편안해질 것(得道以持之 則大安也)’이라는 <순자> ‘왕패’의 구절을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안문’의 ‘대안(大安)’은 ‘크게(大) 편안하다(安)’는 뜻이죠. 그런데 왜 굳이 ‘대안문’이라는 좋은 이름 대신 ‘대한문’으로 바꿨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문화재청이 2007년 궁궐의 현판을 일제조사하면서 그 유래를 밝혀냈습니다. 즉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치는 과정을 기록한 <경운궁(덕수궁)중건도감의궤> 중 ‘대한문상량문’을 찾았는데요.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해질 것이고 한양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했으니…‘대한(大漢)’이라는 정문을 세운다…소한(宵漢·하늘)과 운한(雲漢·은하)의 뜻을 취했으니 덕이 하늘에 합치되도다.”
한마디로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으로 ‘대한(大漢)’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겁니다.
하지만 ‘대한(大韓)’도 아니고 굳이 ‘클 대(大)’에 중국을 의미하는 한나라 ‘한(漢)’자를 쓸게 무엇이냐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아요. 또 이 한(漢)자에는 ‘놈’이라는 욕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즈음인 국권침탈기다 보니까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모양입니다.
■‘요화’ 배정자 때문인가
그 중의 백미는 ‘요화(妖花·요사스런 꽃)’라는 별명으로 지탄을 받아온 여자 밀정 배정자(1870~1952)를 둘러싼 일화입니다. 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별건곤>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 실린 ‘대한문’ 관련 기사를 볼까요. 제목은 ‘팔자고친 경성 시내 6대문 신세타령’입니다.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다. 그런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구설수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
필자는 “대한문이야말로 제일 나이 어리고 팔자 사나온 문”이라고 지칭하면서 이름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꾼 이력을 소개했습니다.
“(대한문 준공 때부터) 조선의 국운은 점점 서산에 떨어지는 해와 같고 별별 무서운 꼴 우스운 꼴을 다보고 겪었다. 을사늑약(1905년), 정미조약(1907년) 모든 문서도 다 이 문안에서 꾸몄다. 마지막으로 고종이 승하해서 여러 사람의 울음을 겪었다.”
그렇다면 기사에 등장하는 배정자가 누구일까요. 일본명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로 알려진 매국노이자 일제 밀정입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구속된 여성 6명 가운데 가장 먼저 체포된 인물이었습니다.
배정자는 1870년(고종 7)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배분남이었는데요. 밀양부 아전이었던 아버지(배지홍)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하네요.
그러나 4살이 되던 해(1873년) 아버지가 세도가인 민씨 일가에게 처형됐고, 이 충격으로 시력을 잃은 어머니와 함께 문전걸식을 하는 신세가 됐답니다. 그러다 12살 되던 해부터 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됩니다.
그후 잠시 여승이 되었다가 아버지가 모셨던 밀양부사 정병하(1849~1896)의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갑니다. 그때 갑신정변 실패로 망명 중이던 김옥균(1851~1894)과 안경수(1853~1900)의 눈에 띄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알게 됩니다.
타고난 미모와 뛰어난 재기를 지닌 배정자는 1887년 이토의 수양딸이 되어 이름도 다야마 사다코로 바꾸는데요.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수영·사격·승마·변장술·국제예절을 익힌 뒤 귀국합니다.(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데요. 배정자는 남장을 하고 전국을 돌며 청나라군의 출병규모와 조선정부의 태도 등을 수집하고 돌아갔답니다. 배정자는 이후 지성미와 멋을 겸비한 여인으로 둔갑해서 고종을 홀리면서 조선의 최고 기밀을 빼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토가 죽은 뒤에는 하얼빈과 상해(上海·상하이), 봉천(奉天·평톈) 등을 오가며 일제 밀정으로 활약했습니다.
■배정자 신상털이
그런 탓에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에게 ‘비호감 0순위’였던 것 같아요.
1920년대초 신문을 보면 배정자의 동정 기사가 수시로 등장하는데요. 배정자가 중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하구요. 심지어는 치정에 얽힌 구타 사건과, 심지어는 육혈포(권총)까지 발사하는 사고까지 일어나는 등 별의별 이야기가 도마위에 올랐습니다.
1925년 동아일보에 어떤 독자가 “배정자가 어떤 여자냐”고 묻자 담당 기자는 “배정자 같은 분을 물어보면 답해주기가 쓰기가 고약하다”면서 ‘배정자=변태성욕자’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합니다.
“57살인데 46살이라 하며…성해방을 주창하는 변태성욕자…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북실북실한 품이 그리 밉지만은 않게 생겨서…밀양 부사 정병하의 수청기생…안경수의 양딸…이등공(이토)의 수양딸…전(田)모와 관계를 맺었다 등등…”으로 배정자의 남성편력을 고발합니다. 그러나 배정자의 가장 용서할 수 없는 행각은 따로 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1941년 12월) 70노구의 몸으로 한국인 여성 70여 명을 ‘군인 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에까지 끌고가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인데요. 한국의 젊은 처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내몬 이력은 천고의 세월이 지나도 용서할 수 없는 ‘반민족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판국이니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뀐 것을 두고 “모자를 쓰고 궁궐을 드나들던 배정자가 재수없다고 해서 ‘갓을 쓴 여인’을 가리키는 ‘안(安)’자를 ‘한(漢)’자로 바꾸었다”(<별건곤>)는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여성이 관리되는 건 재미없어서…
다른 설도 있습니다. 대중잡지인 <삼천리> 제3권 제10호(1931년 10월1일)에 국어학자 이윤재 선생(1888~1943)의 글(‘옛 궁궐 애사’)이 실렸는데요.
“대안문(大安門)에서 ‘안(安)’자가 된 것이 ‘관(冠) 머리’ 아래 ‘여(女)’자를 쓴 것이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와 같은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매우 재미없는 것이라 해서 남성의 글자인 한(漢)자로 바꾸어 대한문이라 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배정자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겁니다. 그냥 ‘관(冠) 밑의 여(女)’자인 ‘안(安)’자는 남녀평등을 뜻하는, 매우 재미없는 글자이니 ‘남성의 글자’(사나이)인 ‘한(漢)’자로 바꾸었다는 겁니다.
이 설이 맞다면 ‘대한문’은 시대착오적인 개명이라는 소리를 들을만 하죠. 이외에도 일제가 ‘큰(大) 도적놈(漢)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도적’, 즉 ‘대한(大漢)’은 ‘고종’을 가리킨다는 겁니다.
이토 히로부미 등 일인들이 제집인양 드나들면서 고종을 일컬어 ‘큰 도적’ ‘큰 도적’ 하며 손가락질 했다는 소리니 아주 고약한 이야기입니다. 원세개(袁世凱·1859~1916)가 ‘대한문’ 이름을 고집했다는 설도 있는데요. 그러나 원세개가 청·일 전쟁 패배(1894~95년) 후 조선을 떠난지 10여년 만인 1906년 ‘대한문’ 이름을 지었으니 그 근거는 희박합니다.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은 “전 비서승 유시만이 고종에게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안동의 신양면으로 천도하면 국운이 연장된다’는 참언서를 조작해서 은밀히 바쳤다”고 썼습니다. 고종이 그 말에 현혹되어 많은 돈을 유시만에게 주면서 “행궁을 지으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시만은 그 돈을 꿀꺽해서 졸부가 되었지만 고종이 불문에 붙였다는 겁니다.
문화재청이 찾아낸 ‘대한문상량문’에서 ‘국운 창대가 어쩌고…’하는 구절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네요.
■왜 복원이 아니라 재현일까
어떤 경우든 ‘대안’이라는 이름이 뭔가 느낌이 좋지않아 바꾼 것은 분명하겠죠.
이러한 갖가지 억측은 구한말~일제강점기 등 국권침탈기의 어수선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 같아요. 앞서 밝혔듯이 문화재청이 대한문의 월대를 재현한다고 하는데요. 복원이 아니라 재현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월대 조성 당시 그 자리 그대로의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자체가 본래의 위치에 서있지 않기 때문이죠.
대한문은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한다는 이유로 원래 위치에서 33m 가량 뒤로 후퇴 이전됐거든요. 당시 문화재 전문가들이 ‘대한문은 구한말 역사의 상징’이라며 반발했죠. 그러나 “태평로를 넓히면 교통에 방해가 된다”면서 후퇴 이전이 결정됐습니다.
하기야 9년 후인 1979년 고가도로 설치에 방해가 된다면서 독립문마저 이전했는데요.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다른 이유도 아닌 교통소통 때문에 문화유산을 마구잡이로 옮긴 시대였으니까요.
그러니 월대는 사실상 ‘원위치 복원’이 아닌 셈이어서 ‘재현’이라는 용어를 쓰는 겁니다. 현실적으로 대한문(대안문)을 원 위치로 옮기기 어렵기 때문에 월대 역시 원위치 복원이 어렵다는 거죠.
그렇다면 제자리에 있지도 않은 월대를 굳이 재현할 필요가 있냐는 소리가 나올만 하죠.
그러나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보듯 ‘월대는 궁궐 정문 구성의 필수요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쉽지만 지금의 대한문에 걸맞은 월대를 ‘재현’한다는 겁니다. 월대 복원 사업이 대한제국 황궁의 정문인 대한문의 면모를 되찾는데 있답니다. 이왕 한다니 부끄럽지 않은 재현이기를 바랍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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