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전북 익산 쌍릉에서 심상치않은 용도의 대형건물지 2동이 확인됐습니다.
쌍릉과 연접한 구릉의 동쪽에서 찾았는데요.
30m 안팎에 이르는 대형건물지 2동의 흔적이었습니다. 기둥을 이용한 건물 안에서는 역시 벼루조각, 대형 토기편, 인장이 찍힌 기와 등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80~117평 정도의 만만치 않은 건물터에는 부뚜막 시설은 없었습니다. 발굴단은 그래서 이 건물 2동은 일반거주시설이 아니라 쌍릉과 연관된 제사시설이 아닐까 추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묻힌 무덤 주인공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 분은 누구일까요. 부모인 무왕(재위 600~641) 부부를 기리는 아들(의자왕)일 수도 있겠네요. 의자왕(641~660)은 효자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증자(춘추시대 유학자)에 빗대 ‘해동의 증자’라는 칭송을 들었던(<삼국사기>)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건물 2동은 의자왕의 효성이 묻어나는 유서깊은 곳일 수도 있겠네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남편인 무왕이 먼저 승하한 것으로 알려진 부인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제사시설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부인을 잊지못한 남편의 애틋함이 배어있는 시설일 수도 있겠네요.
■백제 무왕의 무덤은 확인
여기서 좀체, 아니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가 출제됩니다. 익산에 조성된 쌍릉, 두 무덤의 주인공은 무왕 부부일까요.
또 맞다면 무왕의 곁에 묻힌 이는 누구일까요. 유명한 선화공주일까요. 아니면 어느날 갑자기 치고 들어온 사택적덕의 딸일까요.
우선 쌍릉 중 대왕묘에 묻힌 분은 무왕이 맞는 것으로 사실상 결론이 났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쌍릉을 대대적으로 재조사하면서 일제강점기(1917년) 일본인 야스이 세이치(谷井濟一·1880~1950)가 발굴하면서 나무상자에 담아둔 인골 1개체분(102조각)을 찾아냈는데요.
연구소측은 고고학·법의학·유전학·생리학 등은 물론이고 암석학과 임산공학 전문가들까지 총동원해서 인골 분석에 나섰는데요. 마침내 ‘주인공=무왕’임을 사실상 확정하는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인골의 키가 161~170㎝, 나이는 50대 이상의 노년층, 연대는 620~659년으로 추정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팔꿈치뼈와 목말뼈(발목뼈 중 하나)의 크기, 넙다리 뼈의 무릎부위 너비 등을 측정해봐도 남성이 틀림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무왕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는 <삼국사기> 기록과도 부합하죠.
익산에 근거를 둔 백제 임금이라면 무왕밖에 없죠. 그런데 왕릉이 분명한 무덤에서 그 시대에 꼭맞는 성인 남성이 누워있었다면 뭐 무왕이 맞겠죠. 과학적인 분석결과를 믿을 수밖에 없겠네요.
■어느 날 ‘갑툭튀’한 사택왕후
그럼 무왕의 곁에 묻힌 분은 무왕의 부인일까요. 이게 문제입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소왕릉의 주인공은 서동왕자(무왕)와 국경을 넘은 사랑 끝에 혼인한 선화공주라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2009년 1월 충격적인 발굴결과가 나왔습니다.
미륵사 서석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석탑의 조성 이력을 밝힌 명문 금제 사리봉안기가 확인됐는데요. 미륵사는 무왕의 부인(선화공주)의 간청으로 ‘하룻밤 사이에 뚝딱’ 조성한 절(<삼국유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명문사리기에는 선화공주가 아닌 엉뚱한 이름이 보였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백제 왕후인…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재물을 희사해서 가람을 세우시고…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지금까지 800년 가까이 읽었던 <삼국유사>는 뭐가 되는 겁니까.
미륵사를 창건한 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16관등 중 1품)의 딸인 사택왕후라면 어찌 됩니까. ‘무왕(서동)이 퍼뜨린 동요 때문에 혼인했다’는 ‘서동요’의 내용 또한 허구가 되는 거 아닙니까. 백제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과 혼인, 그리고 미륵사 창건 등 <삼국유사>의 내용이 새빨간 거짓이었다는 말입니까.
발굴에 따른 팩트니까 어쩝니까. ‘미륵사, 선화공주와 무관하다’, ‘백제 무왕의 왕후 사택씨가 창건’, ‘서동요 설화 재검토 필요’ 등의 제목으로 언론보도(지면 2009년 1월 20일)가 도배되었습니다. 저도 첫째날은 그랬는데요.
■<삼국유사>는 새빨간 거짓일까
그러나 폭풍같은 하루가 지나자 ‘서동요와 선화공주’ 설화를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연구자 몇 분과 연락을 취했다니 과연 그렇게 섣부른 단정을 내릴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몇몇 연구자들은 미륵사의 아주 특별한 구조에서 단서를 찾으면 어떠냐고 했습니다. <삼국유사>는 “미륵사는 강당과 탑.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웠다”고 소개했는데요. 발굴 결과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중원(중앙목탑+금당), 서원(서석탑+금당), 동원(동석탑+금당)’으로 배치된 이른바 ‘3금당3탑’의 형식으로 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거든요.
그럼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요. ‘사택적덕의 딸이 창건했다’는 명문 사리기는 그중 서탑에서 나왔죠. 그럼 ‘사택씨’가 서원(서탑+강당)을 창건한 왕비라면, ‘중원’과 ‘동원’은 선화공주를 비롯한 다른 왕비들이 세웠다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결과 중원이 가장 먼저 조성됐고, 이후 서원→동원 순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됐는데요.
사실 재위 연수가 41년이나 되는 무왕의 부인이 한 사람, 즉 ‘좌평 사택적덕의 딸 한 분’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는 “638년(무왕 38년) 3월 임금이 빈어(嬪御·임금의 첩)와 함께 큰 못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무왕이 본처가 아닌 후궁과 뱃놀이를 했다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백제 무왕 시대에는 명문사리기에 나오는 사택왕후와, <삼국유사>에서 부인으로 등장하는 선화공주,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빈어’ 등 여러 왕비(후궁 포함)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왕의 부인은 한사람뿐이었을까
그럼 무왕과 묻힌 소왕릉의 주인공으로 선화공주를 섣불리 포기할 필요는 없겠네요.
여전히 선화공주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가 있기 때문이죠. 예컨대 미륵사터에서 출토된 명문 백제 기와(수막새) 가운데 오로지 미륵사에서만 보이는 ‘정해’명 기와가 가장 많은 80여 점에 이르는데요.
‘정해’는 627년에 해당됩니다. 미륵사의 초축시기가 620년대라는 얘기인데요. 그런데 사택왕후(사택적덕의 딸)가 미륵사 서탑을 조성한 것이 639년(기해년)이지 않습니까. 10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죠. 그럼 사택 왕후가 서탑을 조성하기 10여 년 전에 미륵사 조성을 시작하면서 중원(중앙탑+강당)을 세운 이는 선화공주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삼국유사>에 미륵사를 처음 조성한 분이 ‘선화공주’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럼 선화공주는 627~639년 사이에 승하한 뒤에 사택씨가 왕후가 됐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한가지 해결해야 할 의문점이 있습니다. 627년 전후에 선화공주가 미륵사의 창건을 주도하고, 일찍 죽었다고 해서 무왕의 곁에 묻혔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확언할 수는 없겠죠.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왕후에 오른 사택씨가 미륵사 서탑을 조성한 것이 639년이었습니다. 그런데 2년 뒤인 641년 남편인 무왕이 승하합니다. 또 <일본서기>는 “642년 의자왕의 국주모(國主母)가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소왕릉의 주인공은 선화공주일 수도 있지만 남편보다 1년 뒤 죽은 ‘국주모’일 수도 있습니다. 이 국주모가 ‘사택왕후’라면 소왕릉의 주인공은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왕릉이 무왕이 승하한 641년 조성된 것이 아니라 일찍 죽은 부인(선화공주?)의 곁에 묻이기 위해 미리 조성한 수릉(壽陵·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무덤)이라는 발굴결과에 대한 해석이 나왔구요.
소왕릉 출토 유물의 연대가 대왕릉 것보다 앞선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됐습니다. 소왕릉이 남편이 죽고 1년 만에 죽은 국주모(사택왕후)일 가능성보다는 그보다 더 이전에 죽은 선화공주의 무덤일 가능성이 짙다는 거죠.
그러나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시간차가 그렇게 길지도 않은 유물의 제작기법을 두고 소왕릉·대왕릉의 주인공을 구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도 있답니다. 또 무덤의 구조로 볼 때 소왕릉이 대왕릉보다 오히려 늦게 축조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도굴당한 쌍릉
안타까운 소식이 있습니다. ‘대왕릉의 주인공은 무왕’임이 사실상 확정됐죠. 그러나 ‘소왕릉의 주인공’은 영영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짙다는 겁니다. 무왕 부부가 묻힌 쌍릉은 고려시대부터 도굴의 화를 입었답니다.
“1329년(충숙왕 16년) 익산(금마군)의 무강왕(무왕)의 무덤을 도굴한 도적이 금을 많이 갖고 있다”는 <고려사> ‘열전·정방길’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2017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소왕릉 발굴에서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들어진 길이 68㎝, 높이 45㎝ 정도의 도굴 구덩이가 확인됐습니다.
또한 100년 전 쌍릉을 발굴한 일본인 야쓰이는 “대왕릉이나 소왕릉이나 이미 도굴되었기 때문에 유물이 거의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말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도 없습니다. 2015년 국립전주박물관 보고서에 따르면 쌍릉 출토유물이 20건 31점에 이른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쓰이가 1917년 12월10일부터 6일간 발굴하고 3년 뒤인 1920년이 되어서야, 그것도 달랑 1쪽도 안되는 보고문을 남겼는데요. 그런 야쓰이였으니 다른 출토품을 반출해갔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때 수습한 인골 1개체분만 상자 안에 담아 무덤(대왕릉) 안에 두었답니다. 도굴꾼도 어쩌지 못한 인골을 일본인 야쓰이 역시 훼손할 수 없어서 상자 속에 남겨둔 겁니다.
그래도 대왕릉은 남아있던 인골 덕분에 주인공을 판가름 할 수 있었죠. 그러나 소왕릉는 어떻습니까.
그렇지않아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재연구소가 2019년 소왕릉을 발굴했는데요. 주인공을 밝혀낼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저 무덤을 덮은 봉토 속과 무덤길 입구에서 1m가 넘는 ‘기둥 모양의 돌(석주형)’과 ‘비석 모양의 돌(석비형)을 각 한 점씩 확인하는데 그쳤죠. 발굴단 얘기로는 향후에도 소왕릉 조사에서 진전된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라 하네요.
선화공주인지, 사택왕후인지, 아니면 제3의 왕비인지 분명하게 주인공을 밝힐 자료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삼국유사>는 믿을만 하다
또하나 미륵사 서탑의 사리기 명문에 출현한 ‘사택왕후’ 때문에 <삼국유사>의 가치가 훼손된 것 같죠. 그러나 미륵사 발굴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혼인과정에 비록 설화의 요소가 담겨있죠. 그러나 “미륵설화를 법상으로 삼고 전·탑·낭무 각 세 곳을 창건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은 미륵사 발굴에서 드러난 삼원병렬식 가람배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지명법사가 신통력을 발휘해서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웠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어떨까요.
그런데 미륵사 가람 중심부 발굴에서 뻘흙과 같은 저습지의 흔적이 폭넓게 확인됨에 따라 사실로 굳어졌습니다. 또 절의 뒷편에 용화산이 위치하며 그 중턱에 사자사라는 절터가 확인된다는 점 역시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렀더니 미륵삼존이 연못 가운데서 나타났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정확히 웅변해주죠.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삼국유사> 내용이 이렇게 고고학 발굴 자료와 부합되는데, 유독 선화공주와 서동(무왕)의 혼인 이야기나 선화공주의 존재만 부정하는 것은 왠지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역사스토리텔러
(이 기사를 쓰는데 이문형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 연구교수, 김낙중 전북대 교수,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 이성준 문화재청 학예연구관 등이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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