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초를 서는 병사들 고려 언어 배우네. 어깨동무 하며 낮게 노래 부르니….(衛兵學得高麗語 連臂低歌井卽梨)”
원나라 말 문인인 장욱(1271~1368)이 읊은 시(‘연하곡서·輦下曲序’)이다. 원나라 병사들이 보초를 설 때 어깨동무하면서 고려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 말미의 ‘정즉리(井卽梨)’를 두고는 해석이 엇갈린다. 이것을 ‘우물가에 배가 익어간다’거나 ‘우물가 배나무에서~’로 푸는 연구자가 있다. 또 ‘정즉리’를 ‘jingjili(징즈리)’로 읽으면서 당대 고려의 단체 가무곡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발 더 나아가 ‘jingjili(징지리·井卽梨)’는 한글로 표기한 한자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 경우 ‘jingji(징즈·井卽)는 한국어인 ‘경기’와 비슷하며 ‘li(리·梨)’는 ‘리(俚)’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리(俚)’는 지방민의 의미도 있다. ‘리가(俚歌)’는 민간의 통속 가요를 말한다. 그렇다면 ‘jingjili(井卽梨)’는 경기 지역의 민요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즉리(井卽梨)’=경기민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원말명초의 문신·학자인 유백온(1311∼1375)의 시(‘산자고’)를 보라.
①“바늘에 실조차 꿰지 못하는 어린 소녀들이 고려말을 배우러 고려에 가겠지. 새 노래(자고곡)을 배운다면…천금의 가치가 있으리라.”
원나라 말기의 인물인 주현의 시(‘신향온’)도 흥미롭다.
②“이 내몸, 삼한(고려)의 여인이 될 수 없음이 한스럽다. 그네들은 금은보화를 수레에 가득 싣고 다투어 가져가니, 은 술동이의 소주를 옥잔으로 마시고, 호화저택에서 악기 연주하며 밤새 가무를 즐긴다.”

원나라 문인 정옥(1298~1358)의 시(‘원소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③“근 100년간의 태평성대에 가희 및 무희가 조선에서 왔으니…대도(북경) 사람 중 관현악기를 연주하는 이 찾아볼 수 없네.”
①에서 고려 음악에 빠진 원나라 사람들은 어린 소녀들을 고려에 보내 음악을 배우게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 갈고 닦은 솜씨로 신곡(자고곡)을 부른다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의 자고곡은 당대 원나라에서 유행한 고려음악일 가능성도 있다.
②③의 예에서 고려 출신 여성 연예인들이 원나라에 대거 진출했고, 그곳에서 엄청난 인기와 함께 부를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원나라 여인들이 ‘나도 고려의 여인이었으면!’하고 엄청 부러워 했다는 사실도…. 어쩌면 그렇게 요즘의 K팝 열풍과 닮았는지 모르겠다.
K팝 스타를 꿈꾸며 한국 기획사를 노크하는 외국 소녀들과, 그 과정을 거쳐 ‘데뷔’한 뒤 세계적인 인기와 엄청난 부를 쌓은 글로벌 걸그룹의 모습이 투영된다. K팝이 세계제국 원나라를 정복한 것이다. ‘코리아’가 ‘고려’에서 비롯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K팝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원조 K팝 스타
이중 ‘원톱’ 스타는 원 세조 쿠빌라이(재위 1260~1294)의 후궁이자 비파 명인이었던 이궁인(李宮人)을 들 수 있다.
이궁인이 고려 여인이라는 당대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선 후기 학자 한치윤(1762~1814)의 <해동역사>는 청나라 학자 호조붕이 편찬한 <온광루잡지>를 인용하면서 이궁인을 소개했다. 이름하여 ‘인물고·원나라 세조의 궁인(宮人) 이씨(후궁)’이다.
“원나라 세조 때 이궁인이 있었다. 비파를 잘 탔기에 게만석·원백장·왕계학이 모두 시를 지어 읊었다…양렴부의 ‘원궁사(元宮詞)’에 ‘북쪽 화림에 가니 장막 궁전 드넓은데, 고려의 궁녀 벼슬은 첩여(정3품)라네, 군왕께서 스스로 왕소군의 노래를 짓고는, 비파를 내려주며 말 위에서 타라 하였네.’라 했다…<고려사>에 따르면 비파의 현은 5개다. 따라서 첩여가 탄 것은 (고려의) 5현 비파다.”(‘인물고·원나라 세조의 궁인(宮人) 이씨’)

■천상의 비파 연주자
이 기사 만으로는 알쏭달쏭하다. 그렇다면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궁인’과 그의 연주를 어떻게 읊었는지 보면 된다.
먼저 원시4대가 중 하나로 꼽히는 게혜사(1274~1344)의 <문안집> ‘권2·이궁인비파인(李宮人琵琶引)’을 보자.
“…말 위에 비파를 울린 이는 고금에 왕장(한나라 원제 때 후궁)과 이궁인 뿐이었다지…세조(쿠빌라이)가 한번 보고 칭찬했으니 아름다운 춤과 노래 천상에서 내려온 듯 군왕이 어찌 고운 얼굴 아끼지 않겠는가.”
이 시는 이어 “이궁인은 한 곡조에 천금의 가치가 있는 독보적인 연주로 세조의 은총을 받았다”고 읊었다.
그런데 게만석이 쓴 시의 서문에 따르면 이궁인은 지원19년(1282) 궁궐에 들어가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이궁인은 세조의 서거(1294) 이후에도 궁궐에 머물며 연주활동을 펼쳤고, 어머니 봉양을 위해 출궁(1318)한 이후에도 종종 공연을 위해 궁중으로 불려갔다.

원나라 학자 원백장(1266~1327)의 시(‘이궁인비파행·李宮人琵琶行’)에도 이궁인이 등장한다.
“…이씨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비파 줄을 튕기니 봄바람마저 깊어지고, 지나는 구름도 맑은 태양도 걸음을 멈춘다.”
왕계학(생몰년 미상)은 9편의 ‘이궁인비파인(李宮人琵琶引)’을 지었다. 그중 일부를 보자.
“…빼어난 곡조는 천상의 악보라.(一曲六요天上譜) 군왕이 자하주를 하사한 적이 있다네.(君王曾進紫霞觴)…”(<이선원시> ‘권5 이궁인비파인’)
이궁인은 빼어난 비파 실력으로 황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원나라 말기 문인인 곽익(1305~1364)의 <임외야언> ‘권하 제상행’)에 수상한 구절이 보인다.
“고려의 여자는 구슬을 팔뚝에 꿰어 차고(高麗女兒珠腕繩) 귀를 뚫어 옥귀고리 하고 배의 무대에 앉아있네.(玉環穿耳坐船棚)…구리제 비파로 아름답게 울리네.(銅作琵琶책책鳴)”
이렇게 구슬 팔찌에 옥귀고리를 달고 청동제 비파를 연주한 고려여인이라면 누구일까. 원 세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이궁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700년전 ‘원조 K팝’이 세계제국 원나라를 점령했음을 알려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통곡의 공녀 차출
그러나 그 출발은 ‘굴욕’이었다. 왜냐면 원조 K팝의 주역이 다름아닌 ‘공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공녀(貢女)’란 문자 그대로 ‘공물로 바치는 여자’라는 뜻이니…. 1274년(고려 원종 15) 3월의 일이다.
“‘남송에 새로 편성된 군인들의 처를 구하니, 고려국 부녀자 140명을 뽑으라’고 급히 독촉했다, 가을까지 민간에서 홀어미, 역적의 처, 승려의 딸들을 샅샅이 찾아내여 겨우 수를 채웠다. 원성이 크게 일었다.”(<고려사> ‘세가 원종’조)
<고려사>는 “막무가내 차출에 통곡 소리가 하늘에 진동하였고, 보는 사람도 탄식했다”고 전했다.
고려 조정은 공녀 차출을 위해 ‘결혼도감’ 또는 ‘과부처녀 추고별감’을 설치했다. 공녀는 1년에 두 번, 적게는 2년에 한번 꼴로 ‘차출’됐다.

이때면 왕의 호위부대가 전국의 민가를 이 잡듯 뒤졌다. 민가에서는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딸을 시집보내는 조혼풍습까지 성행했다. 때로는 위장결혼까지 서슴지 않았다. 보다못한 고려 문신 이곡(1298~1351)이 피눈물나는 상소문을 올린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친족이 모여 밤낮으로 통곡합니다. 공녀가 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너무 비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고려사> ‘열전·이곡’전)
끝내 붙잡혀 원나라행 가마를 탄 어린 소녀들의 심정을 노래한 시가 있다.
“집안 깊숙한 곳에 숨어 조심했는데, 선발하는 저 많은 눈길 어찌 감당할까나…부모의 나라가 멀어지니 혼(魂)이 바로 끊어지고, 황제의 궁성이 가까워지니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나.”(김찬의 ‘동녀시’)

■원나라 황실은 고려여인 독차지
이렇게 끌려간 공녀들은 대부분 고된 노동과 성적인 학대에 시달리면서 평생 살아야 했다. 하지만 고려 여인들이 누구인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원나라 황족이나 황태자, 혹은 귀족의 배우자가 되어 벼락출세한 케이스도 심심찮게 나타났다. 비파 연주로 원 세조 쿠빌라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정3품 후궁(첩여)이 된 이궁인이 선두주자다.
또 마지막 황제인 순제(혜종·재위 1333~1370)의 3번째 황후가 된 기자오(1266~1328)의 딸 기씨(1315~?)와, 인종(1311~1320)의 황후로 추봉된 김심(1262~1338)의 딸 다마시리-카톤(達麻實利·1262?~1338?) 등이 출세했다.
오죽했으면 원나라 황실의 안방이 모두 고려 여성들이 독차지 했을까. 고려 문신인 이곡(1298~1351)은 “고려 부녀자들이 황후나 황비의 지위에 있고, 왕과 제후의 배우자가 되었으니 원나라 고관 대작들이 고려의 외손에서 많이 나왔다”(이곡의 <가정집> ‘권8·대언관청파취동녀서’)

■원제국의 안방마님
이중 으뜸은 역시 원나라 조정을 쥐락펴락했던 여걸 기황후였다.
고려 후기 무관인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난 기씨는 14세 꽃다운 나이(1333)에 공녀로 끌려갔다. 원나라 궁정에서 첫 직책은 황제(순제)의 차와 음료를 주관했던 궁녀였다. 총명한 데다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기씨는 황제의 넋을 뺐다. 당시 원나라 궁정의 비사를 읊은 장욱의 ‘원궁사’는 “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볼, 그리고 버들같이 한들한들한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杏검桃薏弱柳腰)”고 묘사했다.
또 <원사> ‘후비열전’은 “기씨가 영할(영민하고 총명)했다”고 표현했다. 기씨가 원제국의 황후가 되기까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를 질투한 첫번째 정실황후(타나시리·答納失里·?~1233)는 여러차례 채찍으로 기씨를 때렸고(<원사> ‘후비열전’) 야사에 따르면 인두로 지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기씨는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제2황후가 되어 원제국의 실질적인 ‘안방마님’이 되었다.(1340)
14세로 이역만리로 끌려온 소녀가 불과 7년 만에 이룬 꿈이었다. 기황후는 교양과 기품을 갖추는데 최선을 다했다.
“황후는 틈만 나면 여효경(女孝經ㆍ여성의 도리를 강조한 경전)과 사서(史書)를 탐독…역대 황후의 덕행을 공부했다.”(<원사> ‘후비열전’)
마침내 기황후의 아들이 드디어 황태자로 책봉되고(1353년), 2년 뒤인 1355년 성대한 책봉식을 거행한다. 10년 뒤(1365) 2번째이자 당대 제1황후였던 바얀코톡토(伯顔忽都·1324~1365)가 죽자 마침내 제1황후로 등극했다.

■고려스타일(高麗樣)의 유행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원나라에 ‘고려 열풍’을 불어넣은 이는 단연 기황후였다.
당대 야사를 정리한 명나라 권형(생몰년 미상)의 <경신외사>에 매우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기황후는 고려의 미인을 많이 모아두고 권세가들에게 보내주었다. 고관대작은 고려의 여인을 얻은 후에야 명가(名家) 소리를 들었다.”
<경신외사>는 무엇보다 “고려의 여인은 예쁘고 사람을 잘 섬겼기에, 총애를 한몸에 빼앗았다”고 덧붙였다.
“황제(순제) 재위 중 궁중의 급사와 사령은 태반이 고려의 여인이었다. 이 때문에 사방의 의복과 신발, 모자, 기물이 모두 ‘고려’를 따라 대유행 되었으니 온 세상이 미친 듯하였다.(皆방高麗擧世若狂)”(<속자치통감> ‘권214·순제’)
앞서 ‘원조 K팝’ 열풍을 살펴보았지만 그외에도 패션과 푸드, 뷰티 등에서도 ‘원조 K 컬처’라는 명칭을 붙일 만 하지 않은가. 700년 전에….
당시 대륙에서 ‘K컬처 열풍’을 두고 ‘온 세상이 미친듯 했다’고 혀를 내둘렀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원조 K 패션 및 K 뷰티 열풍
“고려 여인들이 구슬 팔찌를 차고, 뚫은 귀에 옥귀고리 꿰고…무대에 앉아…구리제 비파를 아름답게 연주한다.”(임외야언>)고 했다.
“궁중 의복 새로이 고려 양식 숭상하니 허리 지난 모난 깃에 짤막한 옷소매네. 밤마다 궁중에서 앞 다투어 구경하니…”(‘궁중사’)
“…당번이 된 여자(궁녀) 짝이 보자기를 잘 만드니 고려 여인 흉내 내어 보자기를 받쳐 입궁한다네.”(‘가한노인집’)
원나라 궁중에 ‘고려풍 패셔니스타’가 따르고 싶은 ‘워너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민간에서도 ‘고려 스타일’이 유행했다. 원말명초의 문인 도종의(?~1369)의 <남촌철경록>에 기록이 남아있다.

즉 원말 의학자 두청벽(1276~1350)이 유생들과의 모임에 참석했을 때 당대의 유행풍조를 비웃으며 지은 시를 소개했다.
“모자는 자색의 종등(종려나무와 등나무)로 묶고, 신발은 고려 모양으로 만든다. 처사들은 문 앞에서 잡역부를 담당한다.”
이 뿐이 아니다. “공차기 할 때 신은 수놓은 신은 고려의 것을 닮았다”(양유정의 ‘무제 효상 은제’)는 것이다.
민간에서는 특별히 고려풍의 모자와 신발이 대유행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하나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볼’을 뽐낸 기황후는 필시 ‘원조 K 뷰티’의 실력을 과시했을 것이다,

■원조 K푸드(약과·쌈) 돌풍
K푸드는 어떤가. 조선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원나라 양윤부의 시를 인용하면서 ‘원나라에 불었던 고려의 쌈문화 열풍’을 소개했다.
“양윤부의 시에, ‘맛좋은 고려 생채를 다시 이야기하니(更說高麗生菜美) 향기로운 새박나물과 줄나물을 모두 수입해 들여온다.(摠輸山後마菰香)’는 내용이 있다. 양윤부는 이 시를 쓰면서 ‘고려인들은 생나물로 밥을 쌈싸 먹는다’는 각주를 달았다.”(<성호사설> ‘권5 만물문 생채·괘배’)
약과로 대표되는 ‘고려 유밀과’ 또한 유명했다. (<고려사>는 1296년 11월 원나라 황실에 등장한 고려 유밀과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왕(충렬왕)이 고려 세자(충렬왕의 아들·충선왕)와 원나라 계국대장공주와의 혼인식을 참석하려고 원나라 황실에 들어섰다. 혼인식이 끝난 뒤 열린 연회에서는 모두 고려의 유밀과를 썼다….”
고려의 유밀과는 이후 고려병(高麗餠)으로 일컬어지며 후대 청나라 상류층까지 즐겨먹던 ‘소울 푸드’가 되었다.(<만문로당> ‘상책’)
유밀과는 밀가루를 꿀·참기름으로 반죽하여 식물성 기름에 지져 꿀에 담가 두었다가 먹는 과자다.
본래 팔관회나 연등회 등 불교 의식에 고기와 생선을 대신해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연회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음식이었습니다.
과자의 모양에 따라 여러 이름이 있으니, 다식판에 박은 다식과, 약과판에 박은 약과가 유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약케팅’이 생길 만큼 마치 아이돌 공연의 티켓을 사려고 줄서서 사야 할 정도로 인기템이 되었다.

■원 황제가 인정한 고려문화
물론 700년전 ‘원조 K컬처’ 열풍은 지금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K컬처’와는 사뭇 다르다.
앞서 밝혔듯 몽골-원나라의 간섭기에, 그것도 공녀로 끌려간 소녀들의 고초와 한(恨)을 자양분으로 자란 ‘눈물의 K컬처’가 아닌가 싶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고려는 1231년 이후 6차례나 몽골(원)의 침략을 받았다.
때로는 항쟁으로, 때로는 줄타기 외교로 원나라의 애간장을 태웠지만 결국 항복하고 만다.(1259) 이때 쿠빌라이(훗날 원세조)는 “고려는 예전에 당태종도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인데, 그런 나라가 제발로 항복했으니 이는 하늘의 뜻”(<고려사절요>)이라고 반색했다. 쿠빌라이는 이때 고려의 제도와 풍속 만큼은 존중하겠다고 약속한다.(<원고려기사> 1260년 6월) 쿠빌라이는 한발 더 나아간다.
“고려는 작은 나라지만 공예(工藝)는 모두 중국인(한인·漢人)보다 낫다. 특히 고려의 유자(儒者)들은 경전과, 경전의 주석서에 통하고 공자·맹자를 배우고 있다….”(<원사> ‘열전 조양필’)
훗날 세조가 된 쿠빌라이가 붕어했을 때도 원나라의 고려 존중은 특기할만 했다.
“1294년(충렬왕 20) 1월 황제(세조)가 붕어했을 때…원나라 장례 제도에는 그 나라 사람이 아니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려만은 장례에 참례할 수 있었다…비록 고려의 가마꾼과 같은 천인들도 출입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고려사> ‘세가 충렬왕’)
이렇게 세계제국을 완성한 세조(쿠빌라이)가 존중한 ‘고려’였으니 ‘원조 K컬처’가 대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박은옥, ‘중국으로 간 공녀의 음악활동 양상’, <한국음악사학보> 53권, 한국음악사학회, 2014
박은옥, ‘한·중 문화교류에서 공녀의 역할-복식·음식·음악을 중심으로’, <중국학> 53권, 대한중국학회, 2015
박경자, ‘공녀 출신 고려 여인의 삶’, <역사와 담론> 55권55호, 호서사학회, 2010
이종묵, ‘중국 황실로 간 여인을 노래한 궁사(宮詞)’, <고전문학연구> 40권, 한국고전문학회, 2011
이명미, ‘몽골에 대한 고려의 공녀 양상과 배경’, <학림> 52집, 연세사학연구회, 2023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똥화석, 신라 이모티콘, 조선판 댓글…33번의 역사여행, ‘하이-스토리 한국사’ (23) | 2024.10.02 |
|---|---|
| '일본인의 피가 흐른다'…3·1운동 급소환한 '금동관 고분' (2) | 2024.02.16 |
| ‘7일의 왕비’, 233년만의 '복위'에 538명중 537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130) | 2024.02.10 |
| "뼈가 가루가 되도록 싸웠다’…사료 만으로 따져본 양규의 7전승 신화 (17) | 2024.02.01 |
| '고려도경' 서긍은 간첩단 두목이었다…송나라 사신단의 ‘넘버4맨' (1) | 2024.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