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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동족상잔의 뿌리

“신과 고구려는 모두 부여 출신입니다(臣與高句麗 源出扶餘). 그런데 시랑(豺狼·승냥이와 이리), 장사(長蛇·큰 뱀)가 길을 막아…. 추류(醜類·추악한 무리)가 성해져서…. 소수(小竪·더벅머리 어린애)가….”(<삼국사기> ‘개로왕조’)

472년. 백제 개로왕이 중국 북위 황제에게 장문의 표(表·외교문서)를 올린다. 요컨대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是滅亡之期)이니 백제와 북위가 손을 잡자”는 것이었다. ‘삼국시대판 위키리크스’의 폭로였을까. 

문서에는 백제와 북위 간 외교의 전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리와 승냥이’ ‘추악한 무리’ ‘큰 뱀’은 모두 고구려를 욕하는 표현이다. ‘더벅머리 어린애’는 장수왕을 지칭한 것이다. 하기야 어디 백제뿐이랴. 고구려도 백제를 ‘백잔(百殘)’, 즉 백제의 잔당으로 비하했다.(광개토대왕 비문) 

 


작금의 남북한과 뭐가 다른가. 북괴나 빨갱이, 그리고 역도(逆徒)·‘철천지 원쑤’라며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조상이 같은’ 고구려와 백제가 으르렁댄 연원을 살펴보자. 주몽(동명성왕)대까지 올라간다. 주몽은 북부여 태자인 대소를 피해 졸본부여로 망명한다. 그런 뒤 재력가(연타발)의 딸(소서노)과 정략결혼한다. 소서노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비류와 온조)을 키우고 있었다. 초라한 망명객에게 소서노는 그야말로 ‘기화(奇貨)’였다. 소서노는 가산을 털어 남편의 창업을 도왔다.(기원전 37년) 

차기 대권은 누가 봐도 비류 혹은 온조의 몫이었다. 그러나 북부여에 주몽의 아들이 자라고 있었을 줄이야. 주몽은 북부여 시절 예(禮)씨와 혼인한 경력이 있는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주몽이 탈출할 당시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그 성장한 친아들(유리)이 아버지를 찾아오자 상황은 급반전한다.

“유리가 부러진 칼을 가져왔다. 대왕의 부러진 칼과 맞춰보니 꼭 맞았다.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의 배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누구 덕에 대업을 이뤘는데….

“이제 나라가 유리에게 속했구나. 우리는 혹(贅) 같은 존재구나.”(<삼국사기>)

형제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와 10신(臣)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한다. 임진강을 따라 늘어선 7~8기의 백제 적석총(사진)은 저간의 사정을 웅변한다. 주몽과 유리왕의 핍박을 피해 남쪽으로 와야 했던…. 동족상잔의 뿌리는 이처럼 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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