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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역사를 왜곡한 공자

“너를 봉하노라.”

성왕(成王·재위 기원전 1042~1021)은 코흘리개 나이로 주나라 2대 천자가 됐다. 철부지는 동생(우·虞)과 매일같이 장난을 쳤다. 어느 날 오동나무 잎으로 규(珪·천자를 알현할 때 쥐는 예기)를 만들었다. 그걸 동생에게 주면서 ‘제후로 봉’한 것이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관(史官)이 득달같이 나섰다. 
 
“빨리 책봉 날짜를 잡으십시오.”(사관) 

“응? 장난이었는데(吾與之戱耳)?”(성왕) 

“천자는 농담하면 안됩니다. 사관은 천자의 말씀을 기록하고….”(사관)

“알았다. 알았어.”(성왕)


성왕은 동생을 제후로 봉했다. 그렇게 ‘장난’으로 건립된 나라가 춘추시대의 강국 진(晋)이었다. 

제나라 장공(기원전 554~548) 때의 일이다. 난봉꾼이었던 장공은 대부 최저의 부인과도 사통했다. 화가 난 최저는 주군(장공)을 척살했다. 그러자 사관이 나서 “최저가 임금을 시해했다”고 썼다. 최저는 태사를 죽였다. 그러자 태사의 동생이 나섰다. 그 역시 피살됐다. 이번에는 막내가 “최저, 임금을 죽였다”고 썼다. 최저도 더는 어쩌지 못했다. 이때, 다른 사가가 서판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최저의 암살’이 기록됐음을 확인한 뒤에야 물러났다. 지독한 역사가의 자세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사가는 의심나는 것은 공백으로 남긴다”(<논어>·위령공편)고 했다. 하지만 그런 공자도 역사를 왜곡한 사례가 있었다.
기원전 632년 진(晋) 문공이 주나라 천자(양왕)와 제후들을 ‘불러’ 회맹(會盟)했다. 그러나 공자의 <춘추>는 “천자가 사냥하러 갔다”고만 기록했다. 제후(진 문공)가 감히 천자(주 양왕)를 ‘오라가라’ 한 사실을 차마 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사기> 같은 역사서는 공자가 역사를 왜곡한 ‘팩트’를 3번이나 기록했다.(‘주본기’ ‘진세가’ ‘공자세가’) 

최근 정부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슬쩍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려 했다. 그걸 경향신문 기자들이 밝혀냈고, 후속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기록하고, 포폄(褒貶)하는 이가 기자이니만큼 그 또한 사관이라 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한 특별전(‘문자 그 이후-한국 고대문자전’·11월27일까지)에 흥미로운 고구려 덕흥리 벽화가 전시돼있다.(사진) 사관의 모습인 듯하다. 뭔가를 열심히 적는 품새가 수첩을 들고 취재하는 요즘 기자를 빼닮은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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