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거 ‘답(畓)’자네.” 지난 6일 경북 경산 소월리에서 사람 얼굴 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된 목간을 판독하던 전문가들의 눈이 빛났다. 이 목간은 마을(谷)에 쌓은 제방(둑·堤) 덕분에 혜택을 본 주민들에게 이른바 이익분담금을 할당하면서 토지 단위인 ‘결(結)과 부(負)’를 기준으로 삼은 내용으로 얼개가 읽혔다.
통일신라 시대의 공문서인 촌락문서에 보이는 답(畓)자. 촌락문서에는 ‘전답’이라는 표현이 많다.
그런데 94자에 달하는 글자를 한자한자 읽으면서 특히 눈에 밟힌 것이 있었으니 바로 논을 뜻하는 ‘답(畓)’자였다. 김재홍 국민대 교수 말마따나 이 ‘답’자는 중국에도 없고, 심지어 인근 백제에서도 쓰이지 않던 신라 고유의 글자이기 때문이다. 답(畓)은 글자 형태가 보여주듯 물 수(水)자와 밭 전(田)자를 합한 글자다. 말하자면 요즘의 인터넷 줄임말인 ‘갑분싸’니 ‘소확행’이니 ‘비담(비주얼 담당)’을 연상케하는 1500년전 신라인 특유의 줄임 신조어(답·畓)를 발견한 것이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답’자가 경남 창녕 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에서 처음 보인 글자”라 소개했다. 창녕 진흥왕척경비는 신라가 창녕 지역을 점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561년(진흥왕 22년) 세운 비석이다. 그런데 비석 가운데 진흥왕이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와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해주백전답(海州白田畓)’이라고 기록했다. 밭과 논을 구별지어 전답(田畓)으로 표시한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답(畓)’자다.
백제 복암리에서 확인된 7세기 백제 목간에서는 논을 ‘수전(水田)’이라 표현했다. 신라인들은 ‘수전(水田)’이라는 두 글자 대신 ‘답(畓)’이라는 줄임단어를 즐겨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소월리 목간을 검토한 연구자들은 바로 이 ‘답’자 때문이라도 목간의 연대를 대체로 ‘6세기 중반 이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신라 바로 옆 나라인 백제의 경우 7세기까지도 논을 가리킬 때 ‘수전(水田)’이라는 중국 단어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예컨대 7세기대 유구인 나주 복암리 3호분 인근 구덩이에서 확인된 목간을 보면 “경(涇·지명)의 수전(水田·논) 2형(면적 단위)에서 72석을 수확했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까지의 발굴자료로 봐서는 백제가 답(畓)이 아니라 수전(水田)이라는 단어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신라는 수(水)와 전(田)을 합쳐 ‘답(畓)’이라는 한글자로 줄였다. 7세기 이후 신라중앙정부가 4개 지방의 촌명과 촌역, 가구와 인구, 우마, 토지, 수목 등의 현황과 변동 등을 촌 단위로 기록한 일종의 촌적(村籍)인 신라촌락문서(일본 쇼소인·正倉院)에도 ‘답’자가 여러차례 등장한다. 논 몇 결(結), 밭 몇 부(負)라 하면서 ‘합(合)해서 논(畓) 71결 67부, 밭(田) 77결 19부’라는 등으로 표기한 것이다.
답(畓)자는 561년(진흥왕 22년) 창녕에 세운 척경비에 ‘전답(田畓)’으로 표기된다. 논을 두 글자인 ‘수전’ 대신 답(畓)으로 줄여 논밭을 ‘전답’으로 표현했다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신라인들이 밭과 논을 표기하면서 밭은 전(田)으로 했고 논은 두글자인 ‘수전(水田)’ 대신 한 글자로 줄인 ‘답(畓)’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비단 답(畓) 자 뿐이 아니다. 신라문서를 보면 유난히 한글자로 줄여 표현한 예가 눈에 띈다. 관직명이나 숫자처럼 많이 쓰는 표현을 줄여 기록한 것이다. 김재홍 교수는 “단적인 예로 8세기대 통일신라시대 비석인 사천신라비를 보면 상대등(上大等·최고관등·국무총리)을 쓰면서 ‘상(上)’자는 정자로 쓰고 ‘대등(大等)’은 ‘大 밑에 木’라는 한 글자로 표기했다”고 밝혔다. 이용현 학예사는 “591년(진평왕 13년) 경주 남산의 신성을 쌓을 때 전국에서 일꾼을 동원하고 이를 기념하여 새긴 남산신성비(제4비)를 보면 ‘일벌(一伐·지방 관직 중 8번째)’을 쓰면서 ‘一자 밑에 伐’자를 마치 한 글자처럼 표기했다”고 전했다. 일척(一尺·지방관직 중 9번째)과 시월(十月), 주인(主人) 등 많이 쓰이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591년 건립된 남산 신성비에 등장하는 일벌(一伐)과 일척(一尺). 마치 한 글자처럼 보이게 한 일(一)자 밑에 벌(伐)자와 척(尺)자를 썼다.
김재홍 교수는 “성질 급한 어떤 인물이 먼저 쓴 것을 다른 이들도 따라 하다보니 정식 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용현 학예사는 6세기 소월리 목간과 7세기 이후(695~875년설 등 다양한 학설이 있다)의 신라촌락문서를 비교했더니 “단적인 예로 결(結)자의 서체가 똑같았다”면서 “소월리 목간과 신라촌락문서가 ‘관공서가 인정한 일정한 서체에 따라 쓰여진 공문서’였다는 사실을 일러준다”고 해석했다. ‘수전(水田)의 줄임말인 ‘답’자가 이미 6세기부터 공문서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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