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15주년이라지만…. 국립고궁박물관은 개관 15주년을 맞아 조선왕실 문화의 진수가 담긴 ‘대표 소장품 100선’을 선정해 국립고궁박물관 누리집 온라인(소장품 100선 바로가기: https://www.gogung.go.kr/highlights.do)에 공개한다. 김동영 관장은 “이번에 공개하는 ‘소장품 100선’은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유물들”이라고 밝혔다.
‘일월반도도 병풍’(보물 1442호). 각 4폭으로 구성된 2점의 대형 궁중 장식화 병풍이다. 해와 달, 산, 물, 바위, 복숭아 나무 등을 소재로 하여 십장생도와 같은 의미를 나타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수정 연구사는 “공개 소장품은 국보와 보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을 포함하여 총 100선”이라고 전했다. 박물관측은 어보·인장, 의궤·기록, 궁궐·건축, 과학·무기, 공예, 회화, 복식, 어가·의장 등 주제별로 8개 분야로 나누어 내·외부 전문가의 검토를 거친 95점을 우선 선정했다. 나머지 5점은 탈락한 유물 중에서 1000명 가까운 시민이 참여한 온라인투표를 통해 추가했다. 탈락됐다가 시민투표로 ‘구제된’ 유물은 ‘고종 가상 존호 옥보와 옥책’, ‘이하응 인장’, ‘경우궁도’, ‘군안도 병풍’, ‘용 흉배 목판본과 지본’ 등이다.
이미 선정된 95점 중에는 대한제국 선포(1897년) 때 제작한 고종황제의 국새 ‘황제지보’(보물 1618-2호), 태조~철종까지의 방대한 기록을 담은 <조선왕조실록>(국보 151-3호·오대산사고본), 세조 연간 일등공신에 올랐던 무신 ‘오자치 초상’(보물 1190호), 1920년 황실 화가 김은호(1892~1979)가 그려 대조전에 붙인 벽화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등록문화재 제243호) 등이 포함됐다.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등록문화재 243호이다. 1920년 황실화가 김은호가 그려 대조전에 붙은 벽화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또 ‘영조어진’(보물 932호)와 ‘연잉군 초상화’(보물 1491호), ‘철종어진’(보물 1492호), ‘일월반도도 병풍’(보물 1442호) 등도 들어있다. ‘춘방 현판’과 ‘규장각 현판’, ‘돈의문 현판’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도 포함됐다. 과학문화재 중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국보 228호)와 ‘창덕궁 측우대’(보물 844호) 등도 들었다.
김정임 국립고궁박물관 연구관은 “개관 15주년을 맞아 엄선한 100선의 소장품은 고해상도의 다양한 개별 사진들과 설명 자료, 참고 사진 등과 함께 공개된다”고 밝혔다.
갈대와 기러기를 소재로 그린 ‘군안도병풍’. 노안도로 유명한 양기훈의 광무 9년(1906년) 작품이다. 대표유물 100선에 탈락됐다가 시민투표로 구제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그러나 조선 왕실 및 대한제국 유물을 주로 소장한 국립고궁박물관이 ‘고작’ 개관 15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이 의아스러워 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의 뿌리가 국내 최초의 박물관인 제실박물관(혹은 창경궁박물관)과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 등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박물관의 역사는 아픔에서 시작된다. 1907년 헤이그 밀사파견을 빌미로 강제퇴위된 고종에 이어 즉위한 순종의 취미생활을 위한다는 구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막 즉위한 순종은 부왕(고종)과 격리된 창덕궁에서 우울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이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잉군 초상’(보물 932호). 영조가 임금이 되기 이전(21살 때)에 제작된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다. 이 초상화는 가장자리가 불에 타서 3분의 1이 사라졌지만 얼굴, 흉배, 관대, 족좌 부분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에 당시 궁내부 차관 겸 제실재산정리국장으로 있던 일본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와 매국내각의 총리대신 이완용(1858~1926)과 궁내부 대신 이윤용(1854~1939) 등의 제안으로 창경궁 안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차례로 조성했다.
고미야는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고미야의 장인이 이토와 같은 조슈번(長州藩) 출신이어서 이토의 측근이 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고미야는 제실 및 국유재산 조사국 위원과 제실 재산 정리국 장관도 겸하는 등 대한제국 내에서 막강한 실권을 가지게 된다. 창경궁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건립한 것도 결국 이토 히로부미의 의중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1908년 이미 경성에서 사립동물원을 경영하고 있던 유한성의 동물, 즉 곰·원숭이·낙타·사슴·공작·타조·앵무 등을 구입하여 동물원과 온실설비를 갖춘 식물원을 만들었다. 이후 당시 조선에서 마구잡이로 도굴되었던 고려 도자기를 비롯, 회화와 불상 등 각종 예술품을 사들여 박물관을 조성했다. 특별한 이름은 없지만 이 박물관을 제실박물관 혹은 창경궁박물관이라 일컫는다. 순종은 1909년 동·식물원과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던 창경궁(원)을 일반에 공개했다.
이 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는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됐고, 1912년 12월까지 도자기·불상·회화 등 총 1만2300여점을 수집하게 됐다. 이른바 이왕가박물관이 수집한 유물 중 으뜸은 1912년 가지야마 요시히데(楣山義英)에게서 당시 돈 26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들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일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국보 228호). 직육면체의 돌에 천체의 형상을 새겨 놓은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권근, 유방택 등 11명의 천문학자들에게 명을 내려 만들도록 한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왕가박물관’과는 별도로 1915년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이 건립됐다. 이중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은 1938년 덕수궁으로 이전됐다. 해방 후인 1945년 덕수궁 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고, 1969년 마침내 국립박물관(훗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통합된다. 이때 국립박물관에 이관된 덕수궁미술관 유물 1만1000여 점은 ‘덕수’라는 관리번호로 분류됐다.
그러나 국립박물관으로 이전되지 않은 유물들이 있었다. 제실박물관(혹은 창경궁박물관)~이왕가박물관 수장품 중 일제강점기 창경궁 명경전을 비롯해 원내에 그대로 방치됐던 문화유물 일부(‘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과 ‘창덕궁 측우기’)와, 그밖에 궁중에서 계속 사용되던 전래품 등은 궁중유물전시관(1992년)을 거쳐 2005년 신설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왔다.
그렇다면 국립고궁박물관은 1908년 건립된 한국 최초의 박물관이었던 제실박물관(창경궁 박물관)과는 단절된 역사를 갖게 된 것일까. 필자의 궁금증에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들조차 “아직 연구가 되지 않았다”고 모호한 입장을 보였다. 따지고보면 1969년 국립박물관에 흡수통합되면서 제실박물관(창경궁박물관)~이왕가박물관의 공식컬렉션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 최초의 박물관 계보에서 국립고궁박물관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주장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창경궁 등 각 궁궐에 남아있던 궁중유물 일부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온 것 역시 분명하다. 게다가 조선왕실 및 대한제국 유물을 소장·관리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아닌가. 1908년 세워진 제실박물관을 국립고궁박물관의 뿌리로 삼을 수도 있다. 김성배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은 “이번 기회에 한국박물관의 뿌리를 제대로 찾는 노력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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