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는 ‘매맞는 남편 열전’입니다.
고려 때 23살 어린 부인에게 지팡이로 맞고 그저 울기만 했던 임금이 있었답니다. 충렬왕입니다.
충렬왕은 왜 어린 부인에게 얻어터졌을까요. 왜구 섬멸의 주인공인 최운해 역시 독한 부인 때문에 식겁했답니다.
부인은 도망가는 남편을 쫓아가 칼로 내리치기까지 했다는군요. 조선 시대 어떤 부인은 “너는 추한 얼굴에 나이도 늙고 기력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결혼했냐. 빨리 죽어라”고 남편을 구박했답니다. 이 때문에 남편은 파직되고 부부는 강제이혼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뿐인가요. 어떤 아내는 장애인 남편을 구박하면서 “이 애꾸눈 놈아!”하고 외치는 등 못할 말을 내뱉었답니다. 태조 이성계의 사촌동생은 아내에게 급소를 잡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답니다.
실학자 박제가가 통탄했다네요. “요즘 ‘대장부답게’ 집안을 다스리는 남자가 전혀 없다”(<북학의>)고….
그렇다면 ‘대장부다운’ 게 무엇일까요. 요즘은 어떻습니까. 밑의 기사를 참조하고 들어주세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단행본(책문 2014)도 참고하세요.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하동사후(河東獅吼)’란 말이 있다.
무슨 말이냐. 중국 송나라 때 진조라는 인물이 있었다. 호는 ‘용구거사(龍邱居士)’라 했다.
그런데 그는 서슬퍼런 아내 유씨 때문에 오금을 펴지 못했다. 얼마나 유명한 공처가였는지 소동파(蘇東坡)는 이런 시를 남겼다.
“용구거사 또한 불쌍한 사람이다.(龍邱居士亦可憐)/공(空)이 어떻니, 유(有)가 어떻니 하다가 밤잠을 못 이룬다.(談空說有夜不眠) 그러다가 느닷없이 ‘하동 사자후’를 듣자 지팡이를 떨어뜨리며 망연자실 한다.(忽聞河東獅子吼 주仗落水心茫然)”
■‘하동사후’에 벌벌 떤 영웅호걸들
아내 유씨 부인의 본관은 하동(河東)이었다. 사자후는 사자의 울부짖음이기도 하지만, 불가에서는 위엄있는 부처의 설법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하동사후’는 진조의 부인 유씨가 화를 벌컥내며 지르는 고함소리였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집밖에서는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집안에서는 ‘하동사후’의 위세에 눌려 숨죽였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예컨대 당나라 곽자의(郭子義·697~781)은 안녹산의 난을 평정한 난세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손님이 가득 모인 잔칫상에서 처첩이 대판 싸움을 벌였다. 곽자의는 한마디도 거들지 못한채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본처 앞에서는 고양이앞의 쥐였던 것이다. 또 한 사람 있다. 왜구섬멸의 영웅인 명나라 전설적인 명장 척계광(戚繼光·1528~1588)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첩을 들이기기만 하면 내쫓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본처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첩의 편이 되지 못했다. 두 장군의 변명이 들리는 듯 하다.
“만 명의 원수(怨讐)는 무섭지 않지만, 집안에 있는 단 한 명의 원수(元帥)는 무서워 한다.”
■엄처시하에 무릎꿇은 왕양명
어디 그 뿐이랴. 양명학의 창시자인 성리학자 왕양명(王陽明·1472~1529)은 어땠나. 밖에서는 제자들에게 ‘인간의 도리와 사물의 이치’를 가르쳤겠지만 안에서는 설설기는 공처가일 뿐이었다. 청사에 빛나는 성리학자인데 여색을 탐해 첩을 줄줄이 들였으니 제 아무리 현모양처라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왕양명의 처는 여름이면 한적한 대나무 밭으로, 겨울이면 눈덮인 땅바닥으로 남편을 끌고 갔다. 그리곤 무릎을 꿇린 뒤 ‘반성하라’고 일갈했다. 천하의 성리학자가 아내의 서슬퍼런 명령에 무릎을 꿇어야 했으니 딱한 노릇 아닌가. 무엇보다 그렇게 아내에게 괴롭힘을 당하고도 여색을 탐해 계속 첩을 들인 왕양명도 대단한 남자이기는 하다. 어떤 경우에는 조정이 나서 악처를 둔 남편을 파직시키기도 했다. 당나라 시대 계양현 현령을 지낸 완숭(阮嵩)은 대청에 손님들을 초청해 밥을 먹다가 흥에 겨운 나머지 계집종들을 불러 노래를 시켰다.
그러나 아내 염씨가 사실을 알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에 팔을 걷어붙인 뒤 칼을 들고 달려왔다. 완숭은 상밑으로 숨고, 손님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고…. 이 때문에 완숭은 “아내 하나 제대로 거느리지 못한 자가 어찌 백성을 다그리겠는가”라는 촌평과 함께 ‘인사고과’에서 최하등급을 맞았다. 그는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송나라 때 여정기(呂正己)라는 인물도 친구집에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횡액을 당했다.
반대로 엄처시하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이는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양홍무(楊弘武·?~668)라는 인물이 사융소상백(司戎少尙伯·병부시랑)이 됐을 때 고종이 “무슨 이유 때문에 고관직을 수락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양홍무는 “마누라 때문”이라고 답했다.
“성격이 강하고 사나운 처제 처(위씨)가 어제 저에게 지엄한 분부를 내렸습니다. 만약 그 직함을 맡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고종 황제는 ‘쿨’하게 공처가임을 인정한 양홍무를 칭찬한 뒤 웃으면서 “빨리 부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세종, “질투는 부인지상사(婦人之常事)이니라”
꼭 중국의 예만 들출 필요가 있을까. 산다는 것이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똑같은 것일진대 부부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종 때(1440년)의 일이다.
행호군 이맹균의 처 이씨가 계집종을 때려 죽였다. 사헌부는 “이맹균의 처가 아들도 낳지 못한 데다, 남편을 질투한 나머지 여종을 죽였다”면서 “이씨를 처벌해 달라”고 세종에게 아룄다. 하지만 세종은 되레 남편 이맹균을 벌했다. 그 까닭인즉은 ‘질투는 부인지상사(婦人之常事)라는 것이니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되레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남편의 잘못이 크다’는 것이었다.
“옛 성현이 말하기를 질투는 ‘부인의 보통 일(婦人之常事)’이라 했느니라. 도리어 남편이 아내를 통제하지 못한 죄가 크니 남편의 관직을 빼앗고 황해도 우봉현으로 쫓아내라.”(<세종실록>)
그러나 아무리 질투가 ‘부인의 상사’라지만 남편을 괴롭히고 구타하는 아내는 어떨까.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문헌을 들춰보면 생각보다 ‘학대받고 매맞는 남편’이 많았다.
심지어는 23살 연하인 왕비에게 방망이로 얻어맞고도 ‘끽’소리 못한 국왕도 있었다. 바로 고려 충렬왕(재위 1274~1308)이었다.
1275년 5월, 고려의 세자 왕심(충렬왕)이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서 혼례를 올렸다. 39살 때였다. 신부는 다름아닌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홀도르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였다.
제국대장공주는 꽃다운 이팔청춘 16살 소녀였다. 쿠빌라이(재위 1260~1294)는 칭기즈칸의 손자로, 원나라 제국을 건설한 희대의 영웅이었다.
충렬왕은 바로 그 무시무시한 세계제국 황제의 친딸과 혼인한 것이었다. 그랬으니 얼마나 기세가 등등했을까. 사실 충렬왕에게는 조강지처가 있었다. 24살 때 혼인한 정화궁주였다. 하지만 제국대장공주가 개경에 도착하자 15년간이나 충렬왕의 본부인이었던 정화궁주는 별궁에 유폐됐다.
■외국인 부인에게 얻어맞고 울기만 한 충렬왕
설상가상으로 제국대장공주가 왕자(충선왕)를 낳자 정화궁주는 두려움에 떨었다. 정화궁주는 “제국대장공주의 출산을 하례한다”며 잔치를 베풀겠다고 했다. 그게 화를 불렀다.
훗날 세종의 말마따나 ‘질투는 부인의 상사(常事)’인가. 정화궁주가 단상 아래서 무릎을 꿇고 제국대장공주에게 술잔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충렬왕이 힐끗 정화궁주 쪽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화근이 됐다.
제궁대장공주가 충렬왕을 몰아붙였다.
“흰 눈으로 날 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정화궁주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그런 겁니까.(何白眼視我耶? 豈以宮主궤於我乎)”
제국대장공주는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며 쏘아붙였다.
“잔치를 그만 두세요.”
연회는 싸늘하게 식었다. 그것은 ‘약과’였다. 어느 날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와 천효사라는 절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왕이 먼저 절에 도착한 것이다. 뒤따라온 공주는 먼저 온 충렬왕에게 화를 벌컥 냈다. “날 따르는 수행원이 왜 이리 적냐”며…. 그러면서 “나 돌아가겠다”며 변덕을 부리며 행차를 되돌렸다. 당황한 남편이 공주를 따라 말머리를 돌렸다. 공주는 그런 남편을 맞아 지팡이로 때렸다.(公主以仗迎擊之)
그 순간 충렬왕의 대응은? <고려사>를 보자
“(공주가 지팡이로 왕을 때리자) 충렬왕은 사모를 벗어던지며 홀라대(공주의 시종)를 쫓아가 마구 꾸짖었다. ‘다 네 놈 때문이야. 널 반드시 처벌할거야’라고 했다. 그러자 공주의 노여움이 풀렸다. 다시 절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남편이 자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욕하고 때렸다.~ 이 모습을 본 문창유는 ‘이보다 큰 모욕이 어디 있겠느냐’고 한탄했다.”(<고려사>·‘제국대장공주’)
세상에 일국의 왕이 부인에게 매를 맞고, 화풀이를 남에게 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23살이나 연하인 부인에게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구타를 당했으니…. 이 뿐이 아니다. <고려사>를 보자.
“공주가 흥왕사의 황금탑을 파괴하여 금을 쓰려고 하자 왕이 ‘안된다’며 금했다. 그런데도 공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았다. 충렬왕은 그저 울기만 했다.(王禁之不得 但涕泣而已)”
23살이나 어린 딸같은 부인에게 수모를 당하고도 그저 울기만 했다는 것이다.
■못생겨 구박받고 파직까지 당한 불쌍한 남편
여말선초 때 왜구를 무찌르는데 공을 세운 최운해(崔雲海·1347~1404) 역시 아내를 다스리지 못했다. <고려사>는 “아내 권씨의 성품이 질투가 심하고 사나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광주에 있을 때 투기하여 남편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옷을 찢었으며 양궁(良弓)을 꺾어버렸다. 심지어는 말(馬)의 목을 자르고, 개(犬)를 쳐서 죽였다.”(‘열전·최운해’)
아내 권씨는 심지어 도망가는 남편 최운해를 쫓아가 칼로 내리치려 했다. 달아난 최운해는 겨우 화를 면했다. 아내의 칼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는 장군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라.
남편더러 “못생겼다”며 모욕하고 멸시한 못된 부인도 있었다. 1517년(중종 12년)의 일이다. 중종은 남편을 멸시한 판관 홍태손의 부인 신씨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온다.
내용인즉은 이렇다. 홍태손은 얼굴도 추악했고, 전처와 후처 사이에서 모두 아들이 없었다. 나이 50살에 이르러 후사가 끊어질 것을 걱정한 홍태손은 다시 장가를 들 생각을 했다. 혼담의 상대는 바로 신씨였다. 누군가 혼인을 앞둔 신씨를 놀려댔다. “꽃다운 나이에 그렇게 얼굴도 못생기고 늙은 남자와 혼인해서 같이 잘 수 있겠느냐”고…. 그럼에도 혼사는 결정됐다. 천성이 사납고 완악했던 신씨는 결혼 후 6~7년간이나 남편과 동침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남편을 대놓고 구박하며 악다구니를 냈다.
“너는 추한 얼굴에 나이도 늙고 기력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혼인해서 나를 초라하게 만드느냐. 빨리 죽어라.”
홍태손은 남편보고 “빨리 죽으라”고 저주한 아내를 사헌부에 고소했다. 중종은 이 소송에서 ‘홍태손과 그의 아내 신씨는 이혼하라’고 선고했다. 홍태손도 수안군수직에서 파직됐다. 홍태손은 얼굴도 못생겨 아내에게 구박당하고, 공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장애인 남편 학대한 아내
또 있다. 1457년(세조 3년) 행호군 박윤창의 아내 귀덕 이야기다.
귀덕은 성질이 사납고 모질어 남편을 위협하고 억눌러 종처럼 부렸다. 남편 박윤창은 한쪽 눈을 잃은 사람이었다. 부부는 어느 날 새 집을 지을 때 창문을 어디다 둘 것이냐는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 때 아내가 남편에게 해서는 안될 욕을 마구 해댔다.
“이 애꾸눈 놈아! 애꾸눈 놈아!(할漢!할漢!) 네가 뭐 아는 게 있느냐?”
그리고는 장대를 잡고 처마와 기와는 물론 당실과 창벽을 다 부셔버렸다.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여주인공이 남편에게 한 ‘부셔 버릴거야’라는 저주가 떠오른다.
귀덕은 설상가상으로 키가 크고 멀끔한 사내종을 귀여워했다. 여종이 귀덕과 사내종의 사통(私通) 소식을 발설했다. 귀덕은 즉시 그 모자를 때려죽였다. 귀덕은 이 살인사건이 발각됨에 따라 체포됐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박윤창은 “그럴 리가 없다”고 아내를 변호했다. 옥관(獄官)은 남편의 주장에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은밀한 규방의 일을 자네가 어찌 별일이 없었다고 보장하는가.”
남편은 애꾸눈을 닦으면서 구슬프게 울었다. 사람들은 악처를 애써 변호라는 남편을 안타까움 반, 비웃음 반으로 바라보았다.
■남편을 상습구타하고 저주한 부인
중종 때의 인물인 허지(許遲)의 아내(유씨)도 온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든 ‘악처의 대명사’였다. 1522년(중종 17년) 사헌부가 유씨 사건을 임금에게 아뢴다.
“허지의 아내 유씨는 투기가 너무 심해 사생결단으로 남편을 ‘상습구타(毆辱)’해왔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볏짚을 사람처럼 만들고는 사지와 몸통을 절단하면서 ‘이것이 허지다’라고 계집종들로 하여금 축하하도록 했습니다.”
또 있었다. 허지가 사신(使臣)으로 나갈 때면 다시 계집종들에게 시켜 문밖에서 곡(哭)소리를 내도록 했다. 그러면서 “허지가 죽었으니 초상을 알리려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남편의 부재중에 과거시험 감독관으로 임명됐음을 알리는 명패가 집으로 배달됐을 때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이 명패를 남편에게 전달하지 않아 죄를 받게 만든 것이다. 또 이웃집 수탉이 암닭을 쫓다가 자기 집 담장을 넘자 그 수탉을 잡아 날개를 뽑고 사지를 찢어죽이며 말했다.
“너네 집에도 암닭이 있는데 남의 집 암탉을 쫒는 까닭이 뭐냐. 그러고보니 허지(남편)같은 류의 짐승이로구나!”
허지 아내의 악행은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소문이 퍼진 뒤이므로 조정 안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유씨는 구속당하지도, 이혼 당하지도. 처벌도 당하지 않았다. 특히 중종은 “(허지의 아내 유씨가) 간음하지도 않았는데 옥에 가둘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대신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지만 중종은 일축한다.
“사족의 부녀는 사형으로 다스릴 수 없다. 또한 이혼은 위에서 명령할 일이 아니다. 남편 허지가 결정할 일이다.”
■간통한 부인에게 불알 잡혀 죽은 남편
태조 이성계의 사촌동생(從弟) 중에 이지(李枝)라는 인물이 있었다. 사촌형 이성계를 따라 왜구섬멸전에 나섰고, 위화도 회군 때도 이성계의 사저를 방위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섣달 그뭄(어머니)과 정월 초하루(아버지)에 죽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찾았다. 1427년(세종 9년) 1월3일, 향림사를 찾아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있던 이지가 갑자기 죽었다. 향년 79세였다. <세종실록>은 그의 졸기(卒記·부음)를 전하면서 ‘사람들의 말’을 빌어 이렇게 ‘사족’을 달아놓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지가 후처 김씨와 더불어 수일 동안 절에 머물렀는데, 밤중에 중과 간통했다. 이 때 이지가 간통하는 현장을 붙잡아 꾸짖고 구타하니, 김씨가 남편 이지의 고환(불알)을 끌어당겨 죽였다.(金拉枝腎囊而殺之)”
망측한 일이다. 간통현장을 들키자 이를 꾸짖는 남편의 거시기를 붙잡아 결국 죽이고 말았으니…. 사건현장에는 김씨의 노비들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쉬쉬하며 묻힐 뻔했다.
하지만 부고를 듣고 달려온 이지의 전처 아들(절제사 이상흥)에 의해 들통났다. 피의자 김씨는 “이상흥이 형조에 사건을 고할 것”이라는 말을 듣자, 어쩔줄 모르다가 그만 실성해버렸다.
그런 탓일까. 전처 아들 이상흥은 끝내 형조에 사건의 전모를 밝히지 않았고, 세종 또한 김씨가 이미 종친의 아내였음을 감안, 처벌을 면했다. 졸지에 아내의 간통현장을 잡고도 ‘급소’를 붙잡힌채 죽은 남편만 불쌍하게 된 셈이다.
■아내가 무서운 세가지 이유
당나라 초기 어사대부를 지낸 배담의 ‘공처가론’은 심금을 울린다. 배담은 ‘아내가 무서운 세가지 이유’를 이렇게 논한다.
“젊고 예쁠 때는 보살 같아서 무섭다. 세월이 지나 집안에 자식이 많아지면 구자마모(九子魔母·동자를 잡아먹는 불경의 여신)처럼 변하니 무섭다. 그뿐이랴. 60~60이 되면 검은 얼굴에 온통 분을 발라 마치 ‘구반도(鳩盤茶·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불경 속 귀신)처럼 변한다. 어찌 무섭지 않으랴.”
동진(317~419) 때 황제 다음으로 권세를 떨쳤던 사안(謝安·320~385)이라는 인물은 음주가무와 주색잡기에 능했다. 기생을 데리고 놀러다니던 사안은 첩을 들일 결심을 했다. 하지만 아내는 결사반대했다. 사안의 조카들이 숙모(사안의 아내)를 설득하려고 <시경>의 ‘관저(關雎)’와 ‘종사(종斯)’ 등의 작품을 인용했다.
“‘관저’와 ’종사를 보면 ’‘옛 사람들은 질투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냥 삼촌(사안)의 말을 들어주시면….”
사안의 부인이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이 <시경>의 ‘관저’와 ‘종사’는 누가 쓴 것입니까?”
“주공(周公·주나라 무왕의 동생)이 썼습니다.”
사안의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테지. 남자니까 그런 시를 쓴 것입니다. 여자였다면 이런 시를 썼겠습니까.”
조카들은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어느 누가 대꾸할 수 있단 말인가.
실학자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에서 친구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탄했다.
“여자들 저고리는 날로 짧아지고, 치마는 날로 길어진다. 이런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이할 때 이러 차림으로 휘휘 젓고 다니니 부끄러운 일이다. 한 친구가 말했다. ‘요즘 사람 중에 집안을 대장부스럽게 다스리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그로부터 300년도 훌쩍 지난 지금 이 순간 박제가의 말을 떠올려보자. 그래, 과연 ‘대장부 스럽게’ 집안을 ‘다스리는’ 가장인가? 아니면….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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