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가졌던 의문점 하나를 풀어보겠습니다.
옛 임금을 보면 어떤 분은 ‘X조’인데, 도 어떤 분은 ‘X종’일까요. 그러니까 세종은 왜 세종이고, 세조는 왜 세조일까요. 다 같은 반정으로 등극한 임금인데, 중종은 왜 중종이고, 인조는 왜 인조일까요.
또 있습니다. 원래 영조는 영종, 정조는 정종, 순조는 순종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영조, 정조, 순조가 되었다지요. 무슨 곡절이 있어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또 만고의 성군인 세종은 원래 문종이라는 묘호로 역사에 남을 뻔 했다지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8회는 ‘X조와 X종에 읽힌 비밀’을 풀어보려 합니다.
아래의 관련기사를 참조하면서, 혹은 단행본 <흔적의 역사>를 읽으면서 팟캐스트 내용을 귀담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예로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이 있지 않았습니다. 창업군주만이 홀로 ‘조’로 호칭됐고, 선대의 뒤를 이은 그 밖의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조’를 칭하지 않았습니다. 세조대왕의 경우도 (형인) 문종의 계통을 이어받았는데, ‘조’로 호칭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조대왕이 ‘조’를 칭한 것도 의리를 보아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중종대왕은 연산군의 더러운 혼란을 평정했지만 ‘조’가 아닌 ‘종’으로 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효종실록>)
1619년(효종 1년), 홍문관 응교인 심대부가 사나운 기세로 상소를 올린다. 선왕의 묘호(국왕이 죽은 뒤의 이름)로 결정된 ‘인조’ 가운데 ‘조’가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원래 인조의 ‘조’ 묘호는 별다른 이의없이 정해졌다. 반정을 통해 종사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으며, 윤기(倫紀)를 회복시킨 공이 있으니 조(祖)를 칭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하다는 것이 조정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심대부와 같은 대관들이 “세조와 선조의 경우도 원래는 잘못된 것”이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대행대왕(인조)의 경우도 조가 아니라 종을 칭하는 것이 맞다”고 벌떼같이 일어났다.
그러자 효종은 “망령된 의논”이라고 대꾸하면서 심대부의 상소를 일축했다. 홍문관 부수찬 유계를 비롯, 사헌부·사간원 등 3사의 관원들이 빗발치듯 상소를 올렸다. 분기를 참지 못한 효종은 가장 심하게 임금의 심기를 건드린 유계를 삭탈관직시키고 말았다. 도대체 ‘조와 종’의 호칭이 무엇이기에 격렬한 쟁론을 벌이게 됐을까. 심대부의 상소를 통해 그 사연을 살펴보자.
■종법이냐, 조공종덕이냐
심대부의 상소대로 창업군주만이 ‘조’의 호칭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예기> ‘대전’을 보면 “가계의 시조는 조(祖)가 되고, 그 후예는 종(宗)이 된다”고 했다. 묘호의 ‘조종’은 이같은 종법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예기> ‘제법’과 <사물기원> 등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도 나온다.
“공(功)이 있으면 조(祖)가 되고, 덕(德)이 있으면 종(宗)이 된다”고 한 것이다. 주나라 이전의 ‘조종’을 두고 후대 학자들이 단 주소(注疏·주석)을 보자.
“무릇 조란 창업하여 세세로 전한 데서 나온다. 조란 공이 있고, 종은 덕이 있어 사당을 허물지 않는다.”
이것을 ‘조공종덕’이라 한다. 중국이나 우리나 새롭게 왕조를 열었던 초대군주는 태조 혹은 고조의 이름을 얻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고조, 북위·송·명·청의 경우는 모두 태조였다. 고려를 세운 왕건과 조선의 창업주 이성계는 모두 태조였다. 그런데 그 다음의 국왕들을 위해 짓는 묘호는 간단치 않았다. 종법을 따르느냐, 혹은 조공종덕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다.
국왕의 선호도, 그리고 권력세력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치열한 논쟁이 벌였던 것이다. 특히 ‘덕이 있다’는 ‘종(宗)’보다는 ‘공이 있다’는 ‘조(祖)’를 더 선호하는 바람에 숱한 이야깃거리들이 양산됐다. ‘인조’의 묘호를 둘러싼 대간들과 임금이 벌였던 신경전이 단적인 예다.
■예외를 만든 세조
그런데 심대부가 언급한 세조·선조·중종의 예란 무엇인가.
세조 이전까지는 ‘조종’과 관련해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창업주인 이성계만이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고, 나머지 군왕들은 ‘종’을 썼다. 창업주 태조의 적통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세조가 계유정란으로 어린 조카(단종)를 폐하고 즉위함으로써 종법질서를 무너뜨리면서 생겼다. 문종과도 부자관계가 아닌 형제관계였기에 종호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런 세조가 죽자 논의 끝에 올라온 ‘삼망(三望·3배수 추천제도)’은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었다. 하지만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고개를 흔들고는 “재조(再造), 즉 나라를 다시 세운 대행대왕(승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시호가 없는 왕)의 공덕을 기려 ‘세조’라 하는 게 좋겠다”고 고집했다. ‘재조’란 단종을 몰아내고 이징옥과 이시애의 난을 평정. 종사의 증흥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세조’의 ‘세(世)’자는 전통적으로 사직을 다시 세운 공로를 인정할 때 주로 쓰는 ‘시(諡)’였다. 예종으로서는 정통성이 부족한 부왕(세조)의 정당성을 회복하고 왕권을 다지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정인지 등 신료들은 “‘세종대왕’이 계신데 세조라 하는 것은 감히 의논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반대입장을 피력했다.
그러나 예종은 “한나라 때도 세종(무제)와 세조(광무제)가 모두 있었다”면서 고집을 피웠다. 효종 때 상소를 올린 심대부는 바로 이 ‘세조’의 묘호가 잘못됐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종법의 원리에 따라 문종의 계통을 이어받은 세조가 창업주에게나 쓰는 ‘조’의 묘호를 받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 세조는 세조이고, 중종은 중종인가
반면 같은 반정의 주인공인 중종은 끝내 ‘조’가 아닌 ‘종’의 묘호를 받았다. 심대부는 그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중종이 죽었을 때도 조종의 논쟁이 있었다. 신료들은 여러 논의 끝에 묘호를 ‘중종(中宗)’으로 수렴했다. 연산군 시대의 혼란기로 종사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증흥한 공을 높여야 한다며 중(中)자를 써서 중종이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종은 “‘중’자 만으로 나라를 중흥시킨 공로를 높이는 데는 미흡하다”면서 “‘중’을 다른 자로 고치고, ‘종’을 ‘조’로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부왕(父王)께서~ 반정(反正)하고 종사를 40년 동안 또 편안하게 하셨으니, 중흥시킨 공이 작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조(祖)라 칭하고자 한다. ‘중(中)’자도 중흥의 뜻이라고는 하나 또한 흡족하지 못한 듯하니, 세조의 예에 견주어 고치고자 한다.”
하지만 신료들의 입장은 단호했다.
“세조대왕이 조를 칭한 것은 아우(세조)가 형(문종)을 이었기 때문이지만, 대행대왕은 곧바로 성종의 계통을 이었기 때문에 조를 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인종실록>)
인종은 장탄식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때는 ‘조공종덕’의 원리보다, 아버지(성종)를 계승했다는 ‘종법’의 원리가 승리한 것이다.
■선조는 조가 될 수 없사옵니다
심대부가 ‘잘못된 사례’라 지적한 선조의 경우는 어땠을까. 선조가 죽자 대신들은 ‘조’가 마땅하다는 의견을 냈다.
“대행대왕께서 임진왜란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시 세운 공렬이 있습니다. 조공종덕의 원리에 따라 마땅히 조(祖)라 해야 합니다.”(<광해군일기>)
아들인 광해군으로서는 ‘불감청이언정고소원’이었다. 하지만 판서 윤근수 등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창업주를 조라 하고, 계통을 이은 임금을 종이라 하는 것은 고금의 법입니다. 역대 왕조에서 서한의 고조, 동한의 세조(광무제), 송나라 태조, 고려 태조 이외에 ‘조’를 칭한 임금이 없었습니다. 부자 간에 왕통을 이었을 때는 모두 ‘종’으로 칭했습니다.”
이에 홍문관이 <예기>를 인용, “조공종덕의 원리는 있지만, 중국의 경우 역대 중흥한 임금은 모두 ‘종’으로 칭한다”고 거들었다. 처음에는 ‘조’를 선호했던 대신들도 “대행대왕이 나라를 다시 세운 공덕은 있지만, 대를 이어받았기에 ‘종’이어야 한다”고 입장을 바꿨다. 광해군도 할 수 없이 부왕이 묘호를 ‘선종(宣宗)’이라 결정했다.
하지만 무슨 연고인지, 8년이 지난 1616년, 광해군은 선왕의 묘호를 ‘선종’에서 ‘선조’로 슬그머니 바꿨다. <광해군일기> 등에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다만 정경세가 1623년에 올린 상소문을 기록한 <연려실기술>을 보면 내막을 짐작할 수 있다.
“정경세가 상소문을 올렸다. ‘선조께서는 왜란을 극복했지만, 조를 칭하기에는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윤근수 등이 반대해서 중지됐는데…. 그 후 허균·이이첨의 무리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기를 청했고, 광해가 그 일을 실행한 것입니다. 조를 다시 종으로 고치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그러니까 허균·이이첨 등 대북파가 ‘선종’의 묘호개칭을 광해군에게 상주했고, 광해군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뀐 상황. 정경세는 대북파와 광해군이 개칭한 ‘선조’의 묘호를 다시 ‘선종’으로 되돌리자고 상소문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조상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 인조는 정경세 등의 상소를 가납하지 않았다.
■영종(영조) 정종(정조) 순종(순조)의 묘호가 바뀐 까닭
선조~인조 이후 ‘조’가 대세로 자리잡았다.
특히 영조와 정조, 순조는 원래 영종, 정종, 순종이었는데, 훗날 ‘조’의 묘호를 읻었다.
영종(영조)의 경우 승하한 지 113년이 흐른 1889년(고종 26년), 김상현의 상소로 ‘영조’가 됐다. 영조의 애민절검과 초기에 일어난 각종 변란(이른바 김일경 무고사건, 목호룡 고번사건, 무신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또 정종(정조) 역시 1899년(고종 36년) 고종이 황제에 즉위 한지 3년 만에 조상을 추존하는 의식을 행할 때 ‘정조’로 바뀌었다. 또 순조(純祖) 역시 처음에는 ‘순종’이었으나 1857년(철종 8년), 서학(천주교)의 유포를 막고,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등의 큰 공을 세웠다면서 ‘순조’로 바뀌었다. 영중추부사 정원용의 말이 흥미롭다.
“조와 종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처음부터 차등이 없지만, 후왕(後王)이 공·덕을 찬양할 때 특별히 뚜렷하게 드러난 것을 표현하여 칭호를 더하는 것입니다. 순종(순조)께서는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정도를 지켰고, 서란(西亂·천주교)을 평정하여 큰 기반을 공고하게 한 것에 이르러서는 성대하신 공렬이 옛날의 제왕보다도 월등하게 뛰어났으니….”(<철종실록>)
정원용의 말에서 당시 ‘종’보다는 ‘조’의 호칭이 더 높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종은 문종일뻔 했다
‘종’의 묘호를 얻은 임금들의 사연도 흥미롭다.
예컨대 만고의 성군이신 세종을 보자. 세종은 원래 ‘문종’의 시호를 얻을 뻔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시호가 ‘세종’으로 결정됐지만 정인지와 허후 등이 이견을 내놓았다.
“역대로 세종이라고 일컬던 군주들은 혹은 중흥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창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행 대왕은 이와 같지 않은데도 세종(世宗)이라고 일컫게 되면 덕행(德行)을 기록하는 뜻에 결점이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문종(文宗)이라고 고쳐 실제의 덕행을 기록하게 하소서.”(<세종실록>)
그러나 문종은 가납하지 않았다. “선왕의 덕행을 모르는 이가 없으며, 또한 4군6진을 개척한 공로가 있으니 세종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성종의 사후에는 시호를 두고 훈구와 사림이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
윤필상 등 훈구세력들은 대행대왕이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성왕과 비견된다면서 성종(成宗)을 고집했다.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 등을 편찬함으로써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음을 이유로 꼽았다. 반면 홍문관 부제학 성세명 등 사림파는 대행대왕의 공덕이 송나라 인종과 견줄 수 있다면서 ‘인종(仁宗)’을 추천했다.
송나라 인종은 사림들의 정계진출을 이끌어 사림시대의 서막을 열어준 황제였다. 게다가 성리학의 원조인 주자가 존경했던 이가 바로 송 인종이었다. 두 세력 간의 치열한 싸움은 훈구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연산군이 “(인종을) 칭하면 중국(송나라) 황제의 시호를 침범하게 되는 셈”이라는 훈구세력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태종이 태종이 된 까닭
1422년(세종 4년), 부왕이 승하하자 세종은 아무런 이의 없이 ‘태종’의 묘호를 올렸다.
원래 ‘태종’이란 묘호는 나라를 창업할 때 창업주(태조)와 함께 가장 공덕이 큰 사람에 붙인다. 중국의 경우 송나라 때부터 태조를 계승한 2대 국왕을 ‘태종’이라 칭했다.
하지만 조선의 2대왕(정종)은 태종의 묘호를 얻지 못한다. 대신 동생이자 3대왕인 정안군 이방원이 ‘태종’이 된다.
세종은 이미 부왕(태종)의 생전에 “부왕의 만세 후에는 반드시 태종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세종실록>)
세종이 이렇듯 강조한 까닭은 부왕인 태종이 태조 이성계의 적통을 잇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부왕인 태종이야말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나라를 개국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의 적통은 태조-정종-태종이 아니라 태조-태종이라는 것이다.
■백성은 어육이 됐는데…
이쯤해서 이런 생각이 든다. 묘호 결정이 한 시대를 풍미한 국왕의 한평생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중대사라지만…. 죽은 다음에 얻은 이름이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선조면 어떻고, 선종이면 어떠며, 인종이면 어떻고, 인조면 어떠리. 순종이면 어떻고 순조면 어떠리. 뭐가 달라지는가.
그 임금들의 시대에 백성은 어육이 되고, 백성들의 해골이 길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는데…. 예컨대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다 병자호란의 환란을 당한 인조는 “차라리 광해군 시대가 낫다”는 저주에 가까운 원성을 듣고 말았다. 그러자 결국 “이번 전란은 모두 나의 죄”라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말았다.
“이 한사람의 죄로 모든 백성들이 해를 입었다. 죄없는 백성들을 모두 포로가 되게 했고~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했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그런데도 무슨 ‘종사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윤기(倫紀)를 회복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의 이름을 얻는단 말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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