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숨이 아직 붙어있던 1383년,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 동북면을 방문했답니다. 거기서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는 이렇게 속삭였답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요컨대 당신의 군대는 고려를 갈아엎고 혁성혁명을 일으킬만큼 매우 훌륭한 위용을 갖추고 있다고 운을 뗀 것입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무슨 말이냐”고 딴청을 피웠답니다. 선문답을 주고받은 셈이죠.
이로써 조선 개국을 위한 두 사람의 의기가 투합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술자리에서 종종 이런 말을 했답니다.
“한고조(유방)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고조를 쓴 것일 뿐이야.”
이 무슨 말일까요. 조선을 개국하려고 내(정도전)가 이성계를 기용한 것 뿐이지 이성계가 나(정도전)를 등용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정도전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던 겁니다.
여하튼 조선은 정도전이 그린 틀에 따라 개국하게 됩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 팟캐스트는 정도전의 삶을 알아 보고, 그가 추구했던 재상정치의 요체는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이번 주는 파란만장했던 정도전의 삶을 추적해보겠습니다. ‘흔적의 역사’ 블로그와 <흔적의 역사> 단행본(책문)에도 관련 자료가 있으니 읽으면서 들으시면 귀에 쏙쏙 들어오실 겁니다.
①“(1383년)정도전이 이성계를 따라 동북면을 방문했다. (이성계) 정예부대의 호령과 군령이 자못 엄숙한 것을 보고 이성계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美哉此軍 何事不可濟)’ 이성계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정도전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동남쪽 왜구를 칠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②“조선이 개국할 즈음, 정도전은 왕왕 취중에 슬며시 말했다. ‘한 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네. 장자방이 곧 고조를 쓴 것 뿐이라네.(不是漢高用子房 子房乃用漢高)’라고…. 무릇 임금(태조 이성계)을 위해 모든 일을 도모했으니 마침내 큰 공업을 이뤘다. 참으로 상등의 공훈을 이뤘다.(凡可以贊襄者 靡不謀之 卒成大業 誠爲上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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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부음기사에 담긴 것은
①②, 두 인용문 모두 <태조실록> 1398년 8월26일자에 기록된 삼봉 정도전의 졸기(卒記), 즉 부음기사(Obituary)이다. 이날 새벽 정도전을 비롯, 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 등은 정안군(이방원)을 포함, 여러 정실 왕자들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죄로 참형을 당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세자로 옹립됐던 이방석과 방번 등도 피살됐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 죄로 참형을 당했으니 대역죄인에 해당된다. 대역죄인의 졸기인만큼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실록>의 이 ‘천인공노할 대역죄인의 부음기사’는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물론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보복하기를 좋아했고, 이색을 스승으로 삼고, 정몽주·이숭인 등과 친구가 됐으나 조준 등과 친하려고 세 사람을 참소했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애교가 아닐까. 대역죄인의 부음기사치고는 매우 관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부음기사는 되레 정도전에게 매우 긍정적인 단서를 남긴다. 즉 정도전의 사후, 최초의 기록인 이 ‘졸기’는 정도전과 정도전의 생애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자방(장량)이 한 고조(유방)를 기용한 것 뿐”
우선 ①의 기사를 보자. 정도전이 조선개국 전, 동북면을 지키던 이성계를 방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그릇이 되는 지를 탐색하려 한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군대의 엄정한 군기와 군세를 보고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고 운을 뗐다. ‘역성혁명을 할 만한 기세’라고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성계는 이 질문에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정도전도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①의 실록 기사는 두 사람이 새 왕조 개국을 위한 운명적인 만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②는 더욱 흥미로운 기록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뒤 술자리 때마다 취중진담의 형식을 빌어 ‘한고조(유방)와 장자방(장량)’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도전이 언급한 장자방, 즉 장량이 누구인가. 장량은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개창한 한 고조 유방의 둘도 없는 책사였다.
지금 이 순간도 ‘책사의 전범’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고조는 훗날 “군영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일만큼은 나(유방)도 장량만 못하다”(<사기> ‘유후세가’)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도전은 술자리에서 큰 일 날 소리를 해대고 있다. ‘한 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유방을 이용해서 제국(한나라)을 개창했다’는 것이 아닌가. 두 말 할 것 없이 한고조는 태조 이성계, 장자방은 정도전 자신이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고, 이성계를 기용했다는 이야기를 술자리 때마다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춘추대의’에 반하는, 즉 역심을 한껏 드러낸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록>은 정도전이 취중에 말했다는 ‘한고조와 장자방’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팩트만 담아 전하고 있다.
정도전 일파를 죽인 태종이 <태조실록>을 편찬했는데, 정도전의 역심을 이토록 담담한 필치로 쓸 수 있을까. <실록>은 더 나아가 “태조(이성계)와 함께 조선개국에 모든 힘을 쏟은 정도전이야말로 ‘참으로(誠)’ 상등의 공훈을 세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참으로(誠)’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면,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정도전의 목을 벤 태종마저도 그를 ‘조선의 개창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를 죽인 것이다.
사실 삼봉 정도전의 젊은 날은 당대의 여느 사대부와 다르지 않았다.
백성을 군자가 가르쳐야 할 어리석인 대상으로 여겼으니까. 정도전이 다섯살 연상의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백성들은 어리석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모릅니다. 백성들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할 줄 알았지, 도가 바르고 나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면서 “따라서 바람이 불면 풀이 반드시 눕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삶은 부친·모친상으로 인한 3년 여의 낙향(1366~69)과, 부원파 이인임의 미움으로 인한 9년 여의 긴 유배 및 유랑(1375~84)으로 완전히 바뀐다.
먼저 ‘절친’이었던 포은 정몽주가 건네준 <맹자>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씩 차근차근 정독했다. 아마도 맹자를 읽음으로써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정도전이 ‘꽂힌’ 맹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맹자> ‘양혜왕 하’일 것이다. 무엇이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상나라 성군)이 하나라 걸왕을 내쫓고, 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죽였는데 그렇습니까.”(제 선왕)
“기록에 있습니다.”(맹자)
“신하가 군주를 죽여도 됩니까.”(제 선왕)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사내’에 불과합니다. 주 무왕이 ‘한낱 사내’(상 주왕을 뜻함)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맹자)
그러니까 주나라 창업주인 무왕(기원전 1046~1043년)은 ‘어짊과 올바름을 해친 한낱 사내’인 상(은)의 폭군인 주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무시무시한 ‘맹자의 말씀’이다. 또 <맹자> ‘이루’는 “걸주(桀紂·폭군의 상징인 하 걸왕과 상 주왕을 뜻함)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은 것”이라 했다.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과 같다.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이다. 그 백성을 얻는 데도 도가 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은 것이다.”
그는 조선개국 후 펴낸 <조선경국전>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임금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한다. 하나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조선경국전> ‘정보위·正寶位’)
■질타당한 선비의식
9년 간의 유배 및 유랑생활에서 마주친 백성들의 비참한 삶도 정도전의 혁명의식을 깨웠다.
바야흐로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 등의 외우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내환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물푸레 나무(水靑木)로 만든 회초리로 농민을 압박, 토지를 빼앗기에 혈안이 돼 토지 하나에 주인만 7~8명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반면 방방곡곡이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략으로 싸움터가 됐다.”(<고려사절요> 등)
유배지(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만난 백성들은 ‘교화해야 할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 가난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질곡의 하루하루를 보내던 백성들은 정도전에게 ‘탁상공론하는 유학자들의 허위의식’을 사정없이 일깨워주었다.
정도전의 <금남야인>이란 글을 보자. 어떤 야인(野人)이 “선비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선비의 몸종이 선비를 위해 대신 대답한다.
“우리 선비님은 천문·지리·음양·복서에도 능통하고 오륜 윤리에 통달하고 역사와 성리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입니다. 후진을 가르치고 책을 쓰고 의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진정한 유학자임을 자부하는 선비입니다.”
그러자 야인은 슬쩍 비웃으면서 단칼로 정리한다.
“그 말은 사치입니다. 너무 과장이 아닙니까. 실상도 없으면서 허울만 있으면 귀신도 미워할 겁니다. 선생은 위태롭군요.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까 두렵네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선비의 허위의식을 사납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숭인과 정몽주 등이 유배 중이나 유배가 풀렸을 때 임금을 향한 ‘연군시(戀君詩)’를 남겼지만, 정도전은 일절 쓰지 않았다. 백성에게 배웠는데 왜 임금에게 고마워한다는 말인가.
■이성계를 만난 날
정도전은 맨처음 인용한 대로 유랑 중 도지휘사로 동북지방 국토방위 책임자였던 이성계를 만나 혁명의 감(感)을 잡았다.
이 때가 1383년(우왕 9년)이었다. 정도전의 나이 42살이었고 이성계의 나이 49살이었다. 정도전은 이듬해(1384년) 여름 함주(함흥)를 찾았다. 아마도 이때는 ‘이성계의 장자방’으로서 본격적인 혁명모의를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1392년 7월 17일, 드디어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은 새왕조의 실질적인 설계자가 됐다. 그의 직책은 어마어마 했다.
1품인 숭록대부에다 봉화백이라는 작위는 덤이었다.
문하시랑찬성사(시중 다음 직책), 동판도평의사사사(최고정책결정기구 수장), 판호조사(국가경제 총괄), 판상서사사(인사행정 총괄), 보문각대학사(문한의 총책임자), 지경연예문춘추관사(역사편찬과 국왕 교육책임), 의흥친군위 절제사(태조 이성계의 친병 두번째 책임자)….
그러니까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인사행정을 도맡으며, 국가재정·군사지휘권·왕의 교육과 교서작성·역사편찬 등 전 분야를 총괄하는 직분을 감당해낸 것이다.
■혁명공약 쓴 정도전
그의 지위는 7월28일 발표한 이른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이 발표됨으로써 구체화했다. 이것은 일종의 혁명정부의 공약같은 것이었다.
정도전의 연구자인 한영우 교수(서울대)는 이 편민사목 편찬을 두고 “정도전이 조선왕조의 설계자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묘사직의 제도. 왕씨 처리 문제, 과거제도 정비. 국가재정의 수입과 지출, 군대진휼, 과전법의 준수, 공물 감면 등 혁명개혁공약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정도전은 그야말로 새 왕조 설계를 위해 그야말로 ‘만기친람’했다. 그가 한 일을 일별만 하더라도 과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사은사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동북면 도안무사가 되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태조는 그런 정도전을 두고 “경(정도전)의 공이 (고려 때 동북 9성을 경영한) 윤관보다 낫다”고 치하했다.(<태조실록> 1398년 3월30일)
그 뿐인가. 악곡까지 만들었다. 즉 문덕곡(文德曲·이성계의 문덕을 찬양), 몽금척(夢金尺·신으로부터 금척을 받았음을 찬양), 수보록(受寶錄·태조 즉위전에 받았다는 참서), 납씨곡(納氏曲·몽고의 나하추를 격퇴한 것을 찬양), 궁수분곡(窮獸奔曲·왜구 격파의 공로를 찬양), 정동방곡(靖東方曲·위화도 회군을 찬양) 등 6개 악사를 지어 왕에게 바친 것이다. 정도전이 작사·작곡·편곡한 이 6곡은 춤으로 형상화됐다. 종묘와 조정의 각종 행사 때 연주돼 궁중무용으로 자리잡았다.
참 재주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은 정도전에게 음악가의 재능까지 선사한 것이다.
그는 또 한의학에도 천착, <진맥도지(診脈圖誌)>까지 펴냈다. 의사는 맥을 짚는데 착오가 없어야 한다면서 여러 학자들의 설을 참고해서 그림을 곁들여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대체 정도전의 ‘능력의 끝’은 어디까지였을까.
■병법에 군사훈련까지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오행진출기도>와 <강무도>,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등 병서를 지어 태조에게 바쳤다는 점이다.
이것은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정도전은 각 절제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인 가운데 무략이 뛰어난 자들을 골라 ‘진도(陣圖)’를 가르쳤다. 자신이 제작한 ‘진도’를 펴놓고 일종의 제식훈련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사병 성격의 군대를 정도전 자신이 직접 장악, 장차 요동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394년, 정도전은 중앙군 최고책임자인 판의홍삼군부사가 됐다. 사실상 군통수권자가 된 것이다. 이성계의 친병인 의흥친군위도 이 기구에 통합됐다.
그러나 정도전의 병권장악은 순조롭지 않았다. 정안군(태종) 등 여러 왕자와 종친, 그리고 절제사들이 저마다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절제사들이 철갑을 입고 군대깃발에 제사를 지내는 제독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절제사들의 수하들에게 태형이 집행됐다.”(<태조실록> 1394년 1월28일)
“절제사와 군사들에게 진도를 익히도록 강요하고 사졸들을 매질하니 이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태조실록> 1398년 윤5월29일)
정도전은 특히 1394년 2월29일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들을 혁파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군제개혁안을 관철시켰다.
사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모든 군통수권이 국왕 한사람에게 모여야 하는게 옳았다. 때문에 정도전의 군제개혁안은 당연한 과업이었다.
■요동정벌의 야망
또 누누이 강조하지만 이 군제개혁안이야말로 정도전이 외쳐온 ‘요동정벌’을 위한 선행조건이었다.
예컨대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한 고려 태조의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宏規遠略)”이라고 칭송했다. 더불어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태조의 조처를 ‘매우 어질고 은혜로운(沈仁厚澤) 정책이었다’고 숭상했다.(<삼봉집> 중 ‘경제문감별집’ ‘군도君道·고려국 태조 高麗國太祖)
정도전의 요동정벌 의지는 확고했다. 예컨대 1397년(태조 6년) 정도전은 측근인 남은과 결탁해서 태조 임금에게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태종실록> 1405년 6월27일)
남은의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태조는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이냐”고 정도전에게 물었다. 그 때 정도전은 “예전에도 외이(外夷)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요동정벌을 촉구했다. 정도전은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 등 이른바 이민족의 나라가 중국 중원을 점령한 일을 거론하면서 요동정벌의 정당성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군제개혁안과 요동정벌 계획은 극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예컨대 정도전의 편에 선 대사헌 성석용이 정도전의 <진도>를 익히지 않은 모든 지휘관의 처벌을 강력히 주청한 일이 일어났다.(1398년 8월9일)
당시 절제사를 비롯한 군부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면 정안군(태종)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개국공신들이었다. 그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러자 태조는 “정안군(태종) 등 왕자 및 종친들과 이지란 등 개국공신들은 사면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이들의 반발을 무마했다.
여기에 병상에 누워있던 개국공신 조준은 태조 임금을 알현하고 ‘요동정벌 불가론’을 조목조목 따졌다. “(고려말 조선초의) 잦은 부역으로 백성들이 지쳤고, 신생 명나라의 국력이 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인데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도전의 야망은 전방위적인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고 만다.
■도성설계에, 동네이름까지
이밖에도 새 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한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찰만 했다.
1394년 <조선경국전>의 편찬은 그의 혁혁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역대부병시위지제>라는 군제개혁안을 그래픽을 곁들여 편찬, 임금에게 바쳤다.
얼마나 병법에 해박했으면 그림까지 그려 설명할 정도였을까.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 뿐인가. 정도전은 한양 신도읍지 건설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도성건설의 청사진을 설계한다.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까지 그려 태조 임금에게 바쳤다. 새 도읍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자 <신도가>라는 노래까지 지어 공역자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흥을 돋우어 주었다.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 덕중하신 강산 좋으매 만세 누리소서.”
경복궁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등 궁궐 및 전각의 이름과 융문루·영추문·건춘문·신무문 등 궐문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지금도 상당 부분 남아있는 한양도성을 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그는 직접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타산(낙산)에 올라 거리를 실축하고 17㎞가 넘는 도성을 설계했다. 오행의 예에 따라 숭례문·흥인지문, 돈의문, 소지문(숙정문) 등 4대문과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종로의 종각은 오행의 신(信)에 해당됐다. 한양은 이로/써 인의예지신 등 오덕을 갖춘 도시의 상징을 띠게 됐다. 신도시 한양의 행정구획을 정리하고 구역의 이름을 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한양을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수십개의 방(坊)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정했다. 예컨대 연희·덕성·인창·광통·낙선·적선·가회·안국·명통·장통·서린 등의 이름이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냥 지은 게 아니었다.
인의예지신와 덕(德)·선(善) 등 유교의 덕목을 담은 명칭이었다. 정도전은 완성된 한양의 모습을 찬미하는 6언절구의 <신도팔경시>를 지었다.(1398년 4월 26일) <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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