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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정도전이 꿈꾼 세상은?

 이번 주 팟캐스트는 <정도전이 꿈꾼 세상> 편입니다.
 지난 주엔 정도전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정도전이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성계라는 군주를 택했음을 술김에 왕왕 발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꿈꿨던 세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정도전 자신과 같은 똘똘한 재상이 다스리는 유교국가였습니다. 그렇다면 군주란 존재는 누구였을까요. 군주란 바로 똘똘한 재상을 잘 뽑아서 그 재상과 더불어 정사를 논하는 존재라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과격한 사상이 아니었을까요. 너무 앞서간 정도전은 그만 왕권 중심의 이방원 세력에게 칼침을 맞고 맙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좌절됐지만 조선은 그의 밑그림대로 그려졌습니다. 정도전, 그는 조선왕조의 설계자였습니다. 
  

  새왕조 개창을 향한 정도전의 정력은 <불씨잡변> 저술에서도 엿볼 수 있다.
 1398년(윤 5월16일) 개국공신 권근이 쓴 <불씨잡변> 서문을 보자.
 “무인년(1398년) 여름(4~5월) 선생(정도전)은 병 때문에 며칠 쉬고 있는 사이 이 글을 만들어 나(권근)에게 보이며 말했다. ‘불씨(부처)의 해독은 사람을 금수로 만들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니~울분을 억제할 수 없이 이 글을 짓는 것입니다.’라고….”
 정도전은 더 나아가 “불교를 깨뜨릴 수 있다면 죽더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이 <불씨잡변>은 동양 역사에서 가장 수준높은 불교비판서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성리학을 조선왕조의 국교로 정착시킨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몸이 아파 쉬고 있는 사이에도 나라를 위한 정도전의 노심초사를 읽을 수 있다. 그보다 이 짧은 기간동안 이렇게 깊이 있는 저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니…. 그의 내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뿐이다.

정도전은 일일이 답사를 다니면서 17~18킬로미터에 달하는 한양도성을 설계했다. 가히 군주를 방불케하는 만기친람이었다.  

 ■군주의 권한은 딱 두가지 뿐
 그러나 정도전의 사상 가운데 으뜸은 역시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정치였다.
 1394년 <조선경국전>을, 1395년엔 그것을 보완한 <경제문감>을 지었다. 여기서 정도전 정치사상의 핵심인 ‘재상중심의 권력구조’ 의견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너무 혁명적이다.
 “인주(人主·군주)의 실제 권한은 딱 두가지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임명하는 권한이다.(人主之職 在擇一相) 다른 하나의 권한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이다.(人主之職 在論一相)”(<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경제문감> ‘상·재상’)
 여기서도 주안점이 있다. 군주는 국사에 관계된 큰 문제만 협의할 뿐, 그밖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재상이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사의 주도권은 군주가 아니라 재상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왜 재상에게 사실상의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왕의 자질은 어둡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이 한결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왕이 대중의 영역에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相·재상)이라 합니다. 도와서 바로잡는다는 것입니다.”(<조선경국전> ‘상·치전총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군주의 실권은 원래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왕위는 세습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왕이 현명하면 물론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재상만 훌륭하다면 괜찮다는 것이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군주는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정도전은 이와함께 군주는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된다고 단언했다. 군주의 사유재산권은 측근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경우 왕의 측근세력은 권세와 농간을 부려 만사의 폐단이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군주는 관념상으로 가장 많은 부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국가의 경비지출에 의해 생계를 지탱해야 하는 일종의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재상은 군주가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경비를 장악해서 군주가 사치와 낭비가 없도록 엄격히 통제해야 하는 존재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그래서인가. <경제문감>은 “천하의 교령(敎令)과 정화(政化)는 모두 재상의 직책에서 나온다”(재상지직·宰相之職)고 했다. 따라서 군주는 재상을 대할 때 반드시 ‘예모(禮貌)’ 즉 ‘예를 갖춘 얼굴’로 대해야 하며 함부로 언동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재상은 인사권과 군사권, 재정관할권, 작상(爵賞)형벌권 등 움켜쥔다는 것이다.(<경제문감> ‘상 재상지직’)

 

 ■정도전이 꿈꾼 세상
 정도전이 재상정치를 논하면서 전범으로 삼는 ‘재상’들이 있다.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성왕을 도와 왕조를 반석 위에 세운 이윤(요리사 출신의 재상)과, 주공(성왕의 삼촌이자 섭정 재상)이다.
 물론 한나라의 소하·조참·주발·진평과 당나라의 방현령·두여회·요숭 등도 명재상이긴 하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기 몸을 수양하고 임금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경제문감> ‘상·재상 상업’)
 정리해보면 미련하고 똑똑한 군주가 둘쭉날쭉할 수밖에 없는 세습군주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천하만민 가운데 뽑은 선비로 현인집단을 형성하고, 그 현인집단 가운데 선발된 관료를 중심으로한 관료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료정치를 이끌어가는 구심점은 천하만민의 영재 가운데 선택된 재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것으로 알려진 무덤에서 확인된 유물들. 조선 전기의 최고급 백자가 발굴됐다.  

 ■정도전의 천려일실
 1398년 8월26일, 정도전은 자신의 집(종로구청 자리)과 가까운 남은의 첩 집(송현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불의의 습격을 받아 참수 당한다. 당시의 <실록>은 정도전은 죽기 전, “예전에 공(정안군)이 나를 살렸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한영우 교수는 정도전이 죽기 전에 읊었다는 ‘자조(自嘲)’의 시를 보면 혁명가의 기개가 엿보인다고 주장한다.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操存省察兩加功) 책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不負聖賢黃卷中),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三十年來勤苦業)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松亭一醉竟成空)”(<삼봉집>)
 새왕조 건설을 위해 눈코뜰새없이 움직이던중 그만 순간 방심해서 술 한잔 마시다가 천려일실, 변을 당했음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현방은 바로 남은의 첩 집을 가리킨다.

 

 ■목만 발굴된 유골의 정체
 지난 1989년 3월,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서 삼봉 정도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굴됐다.
 발굴 묘는 <동국여지지> ‘과천현’편과 봉화정씨족보에서 정도전 선생의 묘로 추정한 바로 그 곳이었다. 봉화 정씨 종택이 그동안 이 묘소를 관리해왔다. 그런데 발굴결과 몸통은 없고, 머리만 남은 피장자의 유해가 발견됐다. 이와함께 상당히 정제된 조선초기의 백자가 함께 수습됐다.
 무덤을 발굴한 한양대박물관은 “무덤의 지체로 보아 상당한 신분의 피장자였음이 분명하다”면서 “삼봉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특히 정도전이 “정안군이 정도전의 참수를 명했다(令斬之)”는 실록의 기사(1398년 8월26일)가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마도 어떤 뜻깊은 이가 그의 잘린 목을 수습해서 정성스럽게 묻어두었을 것이다.
 조선을 설계한 위대한 혁명가이자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정도전의 최후는 이렇게 비참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장자방과 다른 점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장자방’을 자처했지만, 끝까지 장자방의 길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자방의 경우를 보자. 한 고조(유방)가 한나라를 개국한 뒤 정부인(여후)의 아들(태자)을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척부인)의 아들을 새 태자로 옹립하려 했다.
 그 때 장자방은 정부인을 위해 선묘한 계책을 내어 장자(여후의 아들)의 계승원칙을 지켜냈다.
 반면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가 정실이 아닌 후실(신덕왕후 강씨)의 어린 아들(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세자(방석)의 스승이 되어 미움을 자초했다.
 또 하나, 장자방은 한나라가 개국되자 “이제 세속의 일은 떨쳐버리고자 한다”고 선언한 뒤 적송자(전설상의 신인)의 삶을 좇아 유유자적했다.
 이 또한 정도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조선 개국 후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만기친람’하며 초인의 능력을 발휘했던 정도전과는…. 

정도전은 궁궐의 모든 전각과 문의 이름을 지었다. 도성을 드나드는 4대문과 4소문의 명칭은 물론 동네이름들까지 모두 지었다. 이름은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을 기초로 지었다.

 ■‘그 분과 견줄수 있는 영웅호걸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역사는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가 뿌린 씨앗은 조선왕조 500년은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1465년(세조 11년), 영의정 신숙주는 정도전의 손자 정문형의 부탁을 받아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이렇게 평했다.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 분(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 10월29일 낙성된 경복궁에서 연회를 베풀며 삼봉 정도전에게 네 글자를 대서특필해 선물했다. ‘유종공종(儒宗功宗)’. 즉 ‘유학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도 으뜸’이라는 글자였다. 핵심을 찌르는 당대의 평가다. 물론 삼봉의 속내는 달랐을 것이다. 이성계(한고조 유방)가 정도전(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기용한 것이라고…. 

 

   ■정도전, 출생의 비밀
 사족으로 언급할 내용이 있다. 정도전은 개국 초 이색·이숭인·우현보·설장수 등 56명을 반혁명 세력으로 간주하고 엄중한 처벌을 언급했다. 물론 이들은 태조의 감면으로 극형을 면했다. 그러나 이색의 아들 이종학과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홍득·홍명 등 8명은 유배 도중 곤장 70대를 맞고 사망했다.
 <태조실록>은 우현보 세아들의 죽음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이는 정도전과 우현보 가문의 오랜 원한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언급했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는 정도전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이 담겨있다.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문제’였다.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김진이라는 승려가 자신의 종의 아내와 사통해서 낳은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진이라는 승려는 우현보의 자손과 인척관계였다. 따라서 우현보의 자손들은 정도전의 ‘천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치사한 복수?
 그런데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를 때 대간(사간원)에서 고신(신분증)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 이 때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손들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퍼뜨려 그렇게 됐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훗날 우현보의 세 아들을 모함해서 개인감정으로 ‘치사하게’ 복수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으로서는 ‘천출(賤出)’이라는 것 때문에 무진 구설수에 시달려왔다.
 예컨대 고려 공양왕 말기인 1392년 4월, 간관 김진양 등은 정도전을 탄핵하면서 다음과 같이 폄훼했다.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에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때문에 그 미천한 근본을 덮고자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조)
 여기서 말하는 ‘본주’, 즉 본주인은 우현보 가문을 일컫는다. 정도전의 ‘출생 컴플렉스’가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거꾸로 이같은 출생의 한계 때문에 명문가 출신인 정몽주 등과 달리 세상을 완전히 갈아엎는 혁명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