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사적 제79호)에서 발굴된 어린아이 무덤에서 아주 희한한 유물이 나왔는데요. 이를 두고 학게에서 거센 논쟁이 벌어질 것 같네요.
어떤 유물이냐면요. 지난 3월8일 고분군 내 탐방로를 정비하거 무인카메라를 설치하기에 앞서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여러 기의 무덤이 확인됐는데요. 그중 5세기 무렵의 석곽묘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어린아이의 두개골편과 치아가 나왔고, 무엇보다 흙으로 만든 방울을 하나 수습했는데요. 직경이 약 5㎝ 정도되는 아주 작은 방울이어서 심드렁 하고 넘길 수 있는 그저 그런 유물이겠지 했다네요. 대가야 왕릉급 고분이 즐비한 지산동에서 뭐 이 정도의 유물이라면 아무 것도 아닐테니까….
고령지산동 고분군 석곽묘에서 발견된 토제방울에 새겨진 그림들. <삼국유사> ‘가락국 신화’에 묘사된 내용을 6개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는게 조사단의 해석이다. 즉 1)구지봉(혹은 가야산 상아덤)과 거북머리를 상징하는 남근 모양의 그림, 2) ‘거북아! 거북아!’하고 부르는 구지가를 표현한 거북그림, 3)9간 중 한명을 의미하는 관을 쓴 남자, 4)‘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여자, 5)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 6) 하늘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자루 등이 연속사진처럼 표현됐다는 것이다.|대동문화재연구원 제공
그런데 유물을 세척하는 과정에서 눈썰미가 아주 좋은 조사원이 방울에 새겨진 그림을 발견했다네요. 워낙 작은 그림이어서 현미경을 들이댔더니 아 글쎄 그림은 한 둘이 아니었답니다.
총 6개의 독립적인 그림이 방울 표면에 새겨져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림 중에 유독 눈에 띄는 문양이 있었는데요. 바로 거북이 문양이었답니다.
“아니 이것은?” 발굴단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양이었죠. 그도 그럴 것이 가야국의 건국신화 중에 거북이가 나오잖아요.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 머리를 내놓아라(首其現也) 내놓지않으면(若不現也) 구워먹으리(燔灼而喫也)”하는 ‘구지가’ 말입니다. 이 무덤을 발굴한 기관은 대동문화재연구원인데요. 배성혁 학예연구실장이 서둘러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신화’을 들춰보았답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고려 문종의 태강연간(1075~1084년)에 금관지주사인 문인이 지은 <가락국기>를 요약해서 <삼국유사>에 옮긴다”고 했어요.
토제방울에 새겨진 그림들. 직경 5㎝에 불과한 방울을 물로 씻어내자 선으로 그린 그림이 6개나 나타났다.|대동문화재연구원 제공
그런데 방울에 등장하는 그림 6편은 마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신화’를 연속 그림으로 설명한 것 처럼 보였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신화를 보면 후한의 광무제 18년(기원후 43년) 북쪽 구지봉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서 이 지역을 다스리던 9명의 간(干)이 200~300명을 이끌고 갔더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말소리만 들렸다는 거잖아요.
말소리의 내용은 이랬답니다.
토제방울이 출토된 지산동고분군 지역. 환경친화적인 탐방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시된 발굴조사 도중 가락국 신화의 실체를 밝힐 유물이 나왔다.|대동문화재연구원 제공
“하늘의 명에 따라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왔으니, 너희는…‘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자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9간을 비롯한 백성들이 그 말대로 노래하며 춤춘 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았고,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싼 금합(황금으로 만든 그릇)이 있었고…. <삼국유사>의 ‘가락국 신화’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있는데 태양처럼 빛났다.…알 6개가 모두 남자로 변했다…그 중 용처럼 생긴이는 수로라 했는데 가야국을 세웠고, 나머지 5명도 다섯가야의 임금이 됐다.”(‘가락국 신화’)
이게 ‘가락국 신화’의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방울의 첫번째 그림을 보면 남성의 성기 같은데 발굴단에서는 처음에 구지가의 설화를 낳은 구지봉(경남 김해 구산동)을 떠올렸데요. 거북의 목, 즉 머리는 외관상 남근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요. 구지봉은 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거든요.
석곽묘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 유물 전체가 대가야 제품이다. 가락국 신화가 새겨진 토제방울도 생활용품이었던 것 같다.|대동문화재연구원 제공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니 뭐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여겨졌데요. 즉 대가야 지역에서는 대가야아 금관가야의 시조 설화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신화’와 사뭇 다르게 전승되었는데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통일신라 최치원(857~?)의 <석이정전>을 인용해서 이런 전설을 전합니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아비지와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인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인 뇌질청예 등을 낳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신화’의 무대(구지봉)가 대가야에서는 가야산으로 바뀌고 있는 거죠. 그런데 고령 인근에 있는 가야산을 가보면 상아덤이라는 곳이 있는데 남성 성기처럼 우뚝 솟은 바위로 유명합니다.
대가야 지역에서는 바로 가야산과 가야산신이 사랑을 나눠 가야국 시조를 탄생시킨 상아덤을 창업주 신화를 간직한 성소(聖所)로 받들고 있어요. 그러니까 발굴단은 토제방울에 등장하는 성기 혹은 거북 목 모양의 그림은 대가야인의 성소인 가야산 상아덤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거죠.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방울을 보면 거북이가 등장하는데, 발굴단에서는 이 거북이 그림을 ‘구지가’와 연결시킵니다. 관을 쓴 남자 그림은 이 지역을 다스리던 9간 중 한 사람이며, 여인 그림은 ‘구지가’를 부르고 춤추고 있는 형상이라는 겁니다. 또 그림 중에는 어떤 이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가운데 하늘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자루 형상도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토제방울에 투영된 그림은 ‘가락국신화의 대가야 버전’이라는 게 배성혁 실장의 해석입니다. 무대를 구지봉에서 가야산 상아덤으로, 주인공도 수로왕이 아닌 뇌질주일(대가야 시조)로 바꾼….
그렇다면 <삼국유사> ‘가락국신화’는 무엇일까요. 생각해보면 일연스님이 문인의 <가락국기>에서 가락국신화를 옮길 때 “축약해서 기록했다”고 언급했잖아요. 그러니까 <삼국유사>에서는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만 자세히 기록했고, 다른 5개의 알에서 태어난 임금들이 각각의 지역에서 다스린 5가야의 역사는 ‘이하동문’으로 생략했다는 것이죠. 그럴듯한 해석이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림 하나하나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니까요. 그림 하나만 다르게 해석해도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되잖아요.
당연히 해석하는 연구자마다 다른 분석을 하게 되겠지요. 혹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그동안 가야사 연구에 너무 소홀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이후 전국적으로 가야붐이 일고 있는 것을 우려하기도 합니다. 예산을 차기 위해 너도나도 ‘가야’ ‘가야’ 한다는 거죠.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이 시작되면서 국내에서도 도에 지나친 고구려 붐이 일어 모든 유적 유물을 두고 ‘고구려 고구려’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그러나 저는 이번 ‘방울에 나타난 대가야 버전의 가락국 신화’ 이야기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렵니다. 발굴단에서 놓치기 쉬운 유물을 찾아낸 것이 일단 가상하기도 합니다. 가야시대에 태어났거나 살아본 사람이 없는만큼 어떤 주장이 잘되었다 잘못되었다 하고 쾌도난마처럼 판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원래 유물과 유적을 근거로 한 ‘상상의 학문’아닙니다. 터무니없는 상상은 안되겠지만 나름대로의 근거로 탄한 논거를 갖고 주장한다면 그 나름의 학설이 되겠지요. 방울 그림을 두고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나와서 건강한 논쟁을 벌여주기를 바랍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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