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에서는 때아닌 바둑 관련 이벤트가 잇달아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4월에는 쪽샘 44호 발굴현장에서 아마 바둑기사 두 사람이 참여한 ‘천년수담-신라바둑 대국’ 행사가 열렸구요. 지난 11일에는 경주 시민들을 위한 ‘대담 신라-신라 바둑, 바둑돌’ 행사가 개최되기도 했습니다. 행사를 주최한 쪽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구요.
이상한 일 아닙니까. 신라 유적의 발굴과 조사, 연구를 담당하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왜 이런 뜬금없는 ‘바둑행사’를 벌인단말입니까. 왜 그런건지 시계를 2019년으로 돌려 보겠습니다.
■쪽빛 샘 동네의 비밀
경주 시내 한복판에 ‘쪽샘’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쪽빛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샘이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은 곳인데요. 그런데 이 쪽샘 지구는 4~6세기에 살았던 신라 귀족들의 무덤이 800여기가 집중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1960년대부터 주택과 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고분 훼손이 심해지자 2002년부터 사유지를 매입하고 2007년부터 20년 예정으로 본격발굴하기 시작했답니다.
초대형 왕릉급이 집중된 대릉원보다는 작은 무덤들이 모여있기에 귀족들의 공동묘지라 규정한 거구요.
특히 주목을 끄는 쪽샘 고분 중에는 2014년부터 조사가 이어진 44호분(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 있는데요.
그런데 2019년 신라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와 말 문양 토기, 그리고 제사와 관련된 유물 110여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중 말 타고, 춤추는 사람과 사슴·맷돼지·말·개 등을 기하학 문양과 함께 새긴 토기는 안악 3호분(4세기 중반)과 무용총(5세기 전반) 등 고구려 행렬·수렵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당연히 화제를 뿌렸죠.
■아담 사이즈 신라 공주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1년 뒤인 2020년 바로 이 44호 고분에 묻힌 주인공이 키 150㎝ 정도 되는 ‘신라공주’로 추정되는 증거들이 확인되었는데요. 왜 ‘신라공주’로 특정할까요.
우선 쪽샘 44호의 봉분의 규모는 중형급이지만 돌무지의 규모(16~19m)는 금관총(20~22m)·서봉총(16~20m) 등 왕릉으로 추정되는 비슷한 시기의 고분과 맞먹을 정도거든요. 쌓인 돌무지의 무게가 5t 트럭 198대분(992.41t)에 이르거든요.
주변에 10여기의 고분이 함께 조성되었기 때문에 봉분은 크게 할 수 없어 중형급(30m)이 됐지만 금관총·서봉총 등 왕릉급에 준하는 돌무지로 그 위상을 나타냈을 겁니다. 그렇다고 ‘신라 공주’라고 지목할 수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왜냐면 금동관(1점), 금드리개(1쌍), 금귀걸이(1쌍), 가슴걸이(1식), 금·은 팔찌(12점), 금·은반지(10점), 은허리띠 장식(1점) 등 당대 최고의 명품을 풀세트를 치장하고 있었거든요.
예컨대 금동관에 매달린 순금의 드리개 장식은 왕릉이 분명한 황남대총 남분의 출토품과 비슷하답니다.
또 ‘가슴걸이’는 남색 유리구슬과 달개가 달린 금구슬, 은구슬을 4줄로 엮어 곱은옥을 매달았는데요. 이런 형태는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같은 최상위 계층 무덤에서만 확인된 디자인이라는 겁니다. 또한 영롱한 녹색(또는 금록색)의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하트 문양의 펜던트도 주목되는 데요. 비단벌레의 날개 2매를 겹쳐 물방울 모양으로 만들고, 앞뒤판 둘레를 금동판으로 고정하여 만든 거죠. 이 비단벌레 장식은 황남대총 남분, 금관총, 계림로 14호 등 최상급 무덤에서만 출토된 바 있거든요.
무엇보다 이 쪽샘 44호분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의 특징은 ‘아담 사이즈’라는 데 있는데요. 노출된 44호분 금동관의 추정 높이(약 18㎝)는 황남대총 북분(높이 27.3㎝)과 금관총(27.5㎝) 및 금령총(27㎝) 등에 비해 상당히 작은 편이거든요. 관테와 세움장식 역시 상대적으로 작구요. 출토된 허리띠의 좌우 폭(34㎝) 역시도 작은 편에 속합니다.
그렇다해도 ‘어린 왕자’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러나 고고학 발굴조사에서 남성의 표지유물로 평가되는 장식대도가 아니라 은장도가 출토됐거든요. 은장도가 나오면 일반적으로 여성 무덤으로 분류됩니다. 출토유물의 착장 흔적으로 신장을 가늠해보니 150㎝ 되었거든요. 그래서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쪽샘 44호분의 주인공=키 150㎝ 내외의 신라공주’로 추정한 겁니다.
■돌 863개의 정체
그런데 이 ‘(추정) 신라 공주’ 고분을 발굴하던 조사원(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들이 고개를 갸웃거린 유물들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공주의 발치 아래에 부장된 토기군 사이에 모여있던 바둑돌(추정)이었습니다. 다 세어보니 무려 863점이나 되었습니다.
색깔은 크게 흑색·백색·흑색 등으로 나눌 수는 있는데요. 분류해보니 검은 돌이 425점, 흰 돌이 438점으로 띠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둑돌의 크기는 지름 1.0~2㎝, 두께 0.5㎝ 내외였으며, 평균 1.5㎝ 정도였습니다.
이 돌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사원들은 과거의 발굴사례를 들춰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쪽샘 44호분 뿐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금관총(1921·247점)을 시작으로 천마총(1973·350점), 황남대총 남·북분(1973~75·243점) 등 왕·왕족 무덤은 물론이구요. 7세기 무렵 조성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인 용강동 6호분(253점)에서도 확인된 바 있었습니다.
발굴단에서는 경주 분황사지에서 출토된 가로·세로 15줄이 그어진 바둑판 모양의 전돌을 주목했는데요. 그러니까 조사단이 쪽샘 44호분, 즉 신라 공주의 무덤에서 출토된 863점의 돌이 바둑돌일 가능성을 제기한 겁니다.
관련해서 나중에 밝혀진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칠기의 바닥에 ‘마랑(馬朗)’ 명문이 보였는데요. 이 ‘마랑’은 중국 서진(266~316) 시대에 활약한 바둑 최고수인 ‘기성(棋聖)’의 칭호를 얻은 인물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당대 바둑책을 29권이나 편찬할 정도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죠. 그렇다면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마랑’명 칠기는 불세출의 기성인 ‘마랑’의 사인이 새겨진 바둑돌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둑 간첩 때문에 쇠망한 한성백제
이 대목에서 두가지 궁금증이 생기죠. 아니 바둑이 신라시대에 그렇게 유행했다는 걸까요.
그리고 또하나 그 시대엔 신라 공주까지 바둑을 즐겼다는 얘기일까요. 그래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공주의 무덤에 생전에 그토록 즐겼던 바둑알을 넣어주었던 걸까요.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柯) 썩는(爛) 지 모른다’는 ‘난가(爛柯)의 전설’이 있죠. 그 전설이 바로 바둑을 일컫는 말이죠. 동양에서는 예부터 바둑을 우주의 삼라만상에 빗댔는데요. 그래서 바둑판의 한가운데 점을 천원(天元)이라 했구요. 바둑을 치세의 도로 여겼습니다.
서진 시대 인물인 장화(232~300)가 편찬한 <박물지>는 “요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어리석은 아들 단주를 가르쳤다”고 했구요. 공자는 “온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데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혁(바둑과 장기)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그걸 하는 게 그래도 현명한 일이다.(不有博혁者乎 爲之猶賢乎已)”(<논어> ‘양화’)이라고 했습니다.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는 ‘수담(手談)’, ‘앉아서 은둔한다’는 ‘좌은(坐隱)’, ‘근심을 잊는다’는 ‘망우(忘憂)’ 등이 모두 바둑을 가리키는 고차원적인 표현이죠.
중국 뿐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도 대유행했죠. <북사>와 <주서>, <수서> 등은 일제히 “고구려와 백제인들이 바둑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바둑 때문에 한성백제 500년 사직이 무너졌다는 생생한 <삼국사기> 기록도 있지 않습니까.
즉 백제 개로왕(455~475)은 “바둑을 가르쳐 준다”며 접근한 고구려의 국수(國手) 도림(道林)에게 흠뻑 빠졌죠. “내가 왜 그대를 이렇게 늦게 만났느냐”고 한탄할 정도였죠. 바둑으로 개로왕을 홀린 도림이 마각을 드러내죠. 개로왕에게 “국력에 걸맞게 성곽과 궁실을 크게 쌓으라”고 속삭인 겁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참언을 그대로 믿었죠. 대대적인 토목공사에 국고가 텅 비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죠. 결국 한성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413~491)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신라-당나라 반상대결
그럼 신라는 어떨까요. 한국과 중국 사서에 심심치않게 보이더라구요.
특히 효성왕(737~742) 연간의 기록이 눈에 띄던데요. <삼국유사> ‘피은·신충괘관’조를 볼까요. 즉 효성왕이 태자시절, 어진 선비 신충과 함께 궁궐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굳게 약속했죠.
“내 잊지 않으마. 혹여 나중에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효성왕은 신충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신충이 원망하면서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죠.
그러자 나무가 갑자기 말라버렸구요. 노래가 삽시간에 퍼졌구요. 그때서야 왕은 신충을 기억해냈구요. 신충에게 벼슬을 내리자 잣나무는 다시 살아났답니다.
738년(효성왕 2)의 일화는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과 <삼국사기> 등 한국 사서에 자세하게 나오는데요.
당나라 현종(712∼756)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두가지를 당부했다는 겁니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란다. 그들에게 대국(중국)의 유교가 융성함을 자랑해라.”
현종의 또 다른 당부가 있었습니다. “당의 바둑실력을 뽐내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종은) 신라인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여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을 부사로 삼아 보냈다. 신라의 고수들이 모두 그의 아래에서 나왔다. 이때 왕(효성왕)이 당나라 사절단에게 금·보물·약품 등을 하사했다.”(<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당시 당나라는 ‘기대조(棋待詔)’라 하는 제도를 두었는데요. 요즘의 전문기사제도 같은거죠.
그런데 <삼국사기>는 자세한 승패의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는데요. 당시 신라-당나라 최고수 간의 반상대결로 서라벌 시내가 들썩거렸을 것 같습니다.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측 사료는 “그 나라의 바둑 수준은 양계응보다 낮았다”면서 “양계응 등이 신라인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고 했는데요. 그럼 신라 고수들이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걸까요.
2006년 분황사에서 발견된 15줄짜리 바둑판이 하나의 실마리가 될 것 같은데요. 당시 당나라에서는 19줄 바둑을 두고 있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15줄 바둑에 익숙했던 신라의 고수들이 19줄 바둑으로 무장한 당나라 바둑 기사들에게 연전연패한 것은 아닐까요.
당나라에서 유학한 신라 바둑기사의 실력이 대단했다는 문헌기록도 있는데요.
즉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전서> 등은 당나라 시를 모은 전집(<전당시>·1705년 편찬)에 등장하는 시 한 수를 소개했는데요. 당나라 시인 장교(생몰년 미상)가 신라로 귀국하는 ‘기대조’ 박구(생몰년 미상)를 전송하는 시(‘송기대조박구귀신라·送棋待詔朴球歸新羅’)입니다.
“해동(신라)에 그대의 적수 누가 있을까(海東誰敵手). 고국에 돌아가면 바둑 둘 상대가 없어 외로우리(歸去道應孤). 당나라 대궐에 새로운 묘수 전파하고서(闕下傳新勢) 귀국하는 뱃전에서 옛 기보 펼쳐보네(船中覆舊圖)….”
어떻습니까. 쪽샘 44호분을 비롯한 신라 고분에서 수백개씩의 바둑돌들이 출토될 만 하죠. 바둑이 엄청 성행했으니까요.
■신라판 최정 9단
그렇다해도 “바둑을 신라공주까지 즐겼을까”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분들도 있겠죠.
그러나 ‘바둑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등식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근거가 없습니다. 실제로 8세기 중반에 조성된 투르판 아스타나 187호묘에는 ‘바둑 두는 여성 그림(위기사녀도·圍棋仕女圖)’이 그려져 있거든요. 경주가 어디입니까. 경주는 실크로드의 가장 동쪽 도시잖습니까. 신라 여성들이라고 바둑을 두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쪽샘 44호분에서는 공주가 입은 수의(壽衣)에 장식한 것으로 보이는 운모(雲母)가 눈에 띄는데요. 도교에서 운모는 장기간 복용하면 불로장생을 할 수 있는 선약으로 인식됩니다. 이를 두고 바둑돌과 연관짓기도 합니다. 즉 ‘바둑=신선놀음’이라 했잖습니까.
결국 바둑돌과 운모의 등장을 도교의식과 연결지을 수 있지 않느냐는 해석도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요즘 세계 여성 바둑계를 평정하고 있고, 정상급 남자 기사들과도 이겼다 졌다 하는 최정 9단을 떠올리게 되네요. 그렇다면 쪽샘 44호분의 주인공은 ‘신라판 최정 9단’으로 일컬어도 좋지 않을까요.
벌써 6년이 훌쩍 지났죠. 2016년 1월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신의 경지’(入神)에 도달했다는 이세돌 9단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죠. 지금 와서는 어떻습니까.
최정상급 프로 9단도 이제는 2~3점을 깔고 둬야 겨우 인공지능에 맞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이고, 인간이 돌을 놓는 한 바둑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사범(알파고 사범)에게 바둑을 배우고, 인공지능이 매기는 승률그래프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좀 안타깝습니다.
아마 1500년 전 신라공주는 바둑을 신선놀음으로 여기며 두었겠죠.(이 기사를 위해 어창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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