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며칠전 이주화 안중근의사기념관 학예팀장이 약간 곤혹스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얼마전 문화재청이 안중근 의사의 유묵 5점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거든요. 일종의 항의 전화 요점은 이겁니다.
역사상 3대 명필 중 두 분인 한호 석봉(1543~1605)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예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두 분보다 결코 잘 썼다고 할 수 없는 안 의사의 유묵이 너무 많이 보물로 지정되는거 아니냐, 뭐 이런 문제제기 였습니다.
■개인최다 33점이 보물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5점은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하기 전인 1910년 3월에 쓴 유묵입니다. 이중 ‘인무원려필유근우(人無遠慮必有近憂)’는 다롄(大連) 세관에 근무하던 일본인 가미무라 쥬덴(上村重傳)에게 써 준 것인데, ‘사람이 깊은 사려가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는 <논어> ‘위령공’ 편의 구절입니다.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은 일본인 간수과장 기요타(淸田)에게 써준 글귀입니다. “날마다 고상하고 청아한 말을 소통하던 분”으로 풀이되는데요. 중국 동진 시대 시인 도연명(365~427)의 시(‘은진안과 헤어지며’)의 “이틀 밤을 머물러 고상하고 청아한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친해졌음을 알았네(信宿酬淸話 益復知爲親)”라는 글이 연상됩니다.
‘황금백만냥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은 일본인 경수계장 나카무라(中村)에게 써준 것으로, “황금 백만 냥이라도 자식에게 하나의 가르침만 못하다”는 <명심보감>의 문구에서 따왔습니다.
‘지사인인살신성인(志士仁人殺身成仁)’은 안중근 공판을 지켜봤던 일본인 기자 고마쓰 모토코(小松元吾)에게 써준 겁니다.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이는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라는 <논어> ‘위령공’ 편의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마음을 씻는다’는 뜻의 ‘세심대(洗心臺)’는 가운데 ‘세심대’ 글자와 함께 왼쪽에 작은 글씨로 ‘경술삼월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렇게 5점인데요. 한꺼번에 5점이라니 좀 많아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다”고 문제 제기할 수준은 아니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문화재청 사이트의 ‘문화재검색란’에서 ‘안중근’이라는 키워드를 쳐보십시요. 보물로 지정된 유묵만 이번 5점을 포함해서 31점이 검색됩니다. 3대 명필에 꼽히는 한호 석봉과 추사 김정희는 어떨까요. 지정건수로 보면 한호 석봉은 4점, 추사 김정희는 8점으로 검색됩니다. 개인의 유물이 31점이나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유례가 없습니다. 그러니 “안중근 의사 유묵이 지나치게 많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던 겁니다.
■안의사 유묵을 받으려 줄 섰던 일본인들
과연 그런 소리를 들어도 되는건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유묵을 집중적으로 쓴 것은 사형언도를 받은 1910년 2월 14일부터 집행 때인 3월26일까지 40여일 동안입니다. 안의사의 자서전(<안응칠 역사>)에 그 이유가 나와있는데요.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법원과 감옥의 관리들이 내 필적을 기념하려고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했다. 나는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매일 몇시간씩 글씨를 썼다.”
보물로 지정된 5점에서 보듯이 이 유묵들은 모두 일본인들에게 써줬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극적인 예가 있죠.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안의사가 사형집행장으로 나가기 직전 호송관인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상등병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며칠전 안의사에게 “휘호 한 점을 받고 싶다”는 지바의 요청을 떠올린 겁니다.
안의사는 급히 준비한 비단천과 필묵으로 단숨에 글씨를 써내려갔는데요.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행서 8자였습니다. 안의사는 지바에게 “동양에 평화가 찾아오고 한·일간 우호가 회복되는 날 다시 태어나서 만나고 싶다”고 작별인사를 해주었습니다.
지바 뿐이 아닙니다. 안의사를 뤼순 옥중에서 취조한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 靜四朗) 검찰관, 감옥의 간수 시타라 마사오(設樂正雄), 경관 야기 마사노리(八木正禮), 의사 오리타 다다쓰(折田督), 경수계장 나카무라(中村), 감옥을 찾은 경시 타케시(猛), 감옥 간수 미쓰이 도쿠이치(三井德一), 한국통감부 경시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뤼순 초교 교사 히시다 마사모토(菱田正基) 등도 안의사의 유묵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사형수 신분인 안중근 의사를 승려(쓰다 가이준·津田海純)도 안의사의 유묵을 3점이나 보관했습니다. 뤼순 감옥의 교도소장과 간수, 경찰, 검찰관, 통역, 세무관, 교사, 교화승까지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했다는 거죠.
안의사가 어떤 분입니까. “내 거사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척살한 독립전쟁의 일부”라고 강조했죠.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 중 하나가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이거든요. 따라서 안의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 보통 일본인들의 양식을 일깨워 당신의 동양평화 의지를 심어주고 싶었을 겁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안의사의 학식
안중근 의사의 삶과 학식, 철학을 알 수 있는 저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수의 저작과 글들은 수감 후 나왔는데요.
그 기간에 쓴 자서전(<안응칠 역사>)과, 미완성으로 남은 <동양평화론> 등이 있습니다. 그밖에 뤼순 형무소 이감 직후 검찰관에게 제출한 ‘한국인 안응칠 소회’와, ‘이등박문 죄악 15개조’ 등의 글이 있죠.
그 가운데 마지막 40여일간 붓을 휘둘러 써내려간 것이 바로 유묵입니다.
생각해보면 옥중에 무슨 참고문헌이 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필체로 확인된 유묵은 62점 정도에 달하는데요. 그중 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과 32살에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깊고도 넓은 학문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안의사가 인용한 중국 고전 중에는 공자의 <논어>가 유독 많습니다. 이중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더불어 논의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는 유묵은 <논어> ‘이인’에서 인용했구요. ‘(일신상) 이익을 얻으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하면 목숨을 바친다(見利思義 見危授命)’는 글은 <논어> ‘헌문’에서 따왔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도 인용된 ‘날이 추운 뒤에야 소나무·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는 유묵의 출전은 <논어> ‘자한편’입니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룰 수 없다(人無遠慮 難成大業)’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절제한다(博學於文 約之以禮)’도 <논어> ‘헌공’과 ‘안연’ 등을 인용했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와 시도 두루 인용했는데요. ‘서툰 목수는 아름드리 좋은 목재를 다룰 수 없다(庸工難用 連抱奇材)’(<자치통감>)와 ‘오로봉을 붓으로, 삼상을 연지로 삼고, 푸른 하늘만한 큰 종이에 내 마음 속의 시를 쓰리라(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靑天一丈紙 寫我腹中詩)’(이백의 시)는 유묵이 그렇고요. 중국 진(秦)나라 말 인물인 황석공의 병법서(<소서>)와 옛 선현의 구전 문장까지도 인용했습니다. ‘홀로 자만하는 것보다 더한 외톨이는 없다(孤莫孤於自恃)’(<소서>)와, ‘백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함이 있다(百忍堂中有泰和)’(구전 문장)이 그것입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는 유명한 유묵도 있죠.
우국충정이 나타낸 유묵들도 있습니다. ‘천리밖 임(나라) 생각에 바라보는 이 눈 뚫어질 듯 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 표하니 행여 이 마음을 저버리지 말아달라(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와, ‘장부는 비록 죽을 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이 단단하고 의사(義士)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상은 구름같이 드높다(丈夫雖死 心如鐵 義士臨危 氣似雲)’는 유묵이 그렇습니다.
‘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노심초사한다(國家安危勞心焦思)’는 글도 심금을 울리죠. 사형집행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눈이 뚫어질듯’ ‘노심초사’하며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걱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의사의 염원인 동양의 평화가 일본의 침략야욕 때문에 어려워 진 것을 비판하는 유묵도 있습니다.
‘동양의 대세 생각하면 아득하고 어두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구나. (동양)평화시국 이루지 못한게 개탄스럽기만 한데, (일본이) 침략 정책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엾도다.(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글씨로 동양평화 외친 안의사
순수한 서예의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요. 안의사는 “필법도 능하지도 못하고 남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나 이것은 겸손의 소치라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글씨는 해서(정자체)와, 해서와 행서(흘림체)의 중간인 해행(楷行)이 주가 되고 있는데요.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는 “엄정하고 단아한 해서(정자체) 중에서도 필묵이 정확하고 법도가 엄격한 안진경(709~786)류의 필법을 구사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천여불수반수기앙이(天與不受反受其殃耳)’, 즉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뿐’이라는 유묵인데요. 사람을 전율시키는 송곳 같은 필획이 돋보인다고 합니다. 안 의사의 성정·기질과 정신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네요.
안 의사의 작품으로 확인된 62점 가운데 국내에 소재한 것이 39점 정도입니다. 그럼 안중근 의사 유묵의 소장자가 보물 지정 신청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모두 보물로 지정되겠죠. 소장자 중에는 문화재 지정을 기피하는 분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다면 한 인물의 작품이 31점이나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은 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유묵들은 단순한 붓글씨가 아닙니다. 안의사의 삶과 학식, 정신, 사상을 오롯이 담은 것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유묵 한 점 한 점이 안의사의 유언이자 분신입니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의 언급이 심금을 울립니다.
“안의사는 1910년 2월 14일부터 집행 때인 3월26일까지 40여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유묵을 썼습니다. 안의사는 글씨로 죽음을 극복했고, 글씨로 동양평화를 외친 분입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너무 많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한호 석봉이나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 너무 적게 지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뭐 이런 얘기입니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그동안 서양의 잣대로 서예는 미술도 예술도 아니라는 인식이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홀대받았다”면서 “앞으로는 한호와 김정희의 작품도 적극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 대우해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백범 김구(1876~1949)와 만해 한용운(1879~1944),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 등의 유묵도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차고 넘친다고 합니다. 이제는 이 분들의 작품도 국가지정문화재의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분실된 청와대 소재 유묵
참 제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언급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요.
청와대가 소장하고 있다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유묵(보물)이 있습니다.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더불어 논의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는 작품인데요.
문화재청의 문화재정보란에 이 유묵의 소재지가 ‘서울 종로 세종로 1 청와대’라 되어 있는데요.
도난 문화재 정보란에 ‘청와대에서 도난 분실’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청와대가 갖고있던 안중근 유묵이 사라져서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건데요.
이 유묵은 1976년 3월17일 당시 소유자인 이도영 홍익대 이사장이 청와대에 기증했다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감쪽같이 사라졌다네요. 도대체 언제 어떻게 분실되었는지 알 수 없답니다. 청와대가 어수선할 때인 1979년 10·26 사태 이후나 1980년대 중후반 누군가가 슬쩍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정말 기가찬 노릇이죠. 문화재 사범단속반이 포기하지말고 끝까지 추적해주기 바랍니다.(이 기사를 쓰는데 이주화 안중근의사기념관 학예팀장과 이동국 예술의 전당 수석큐레이터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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