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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명품 고려청자를 '참기름병', '꿀단지'로…침몰선, ‘900년만의 증언’

“무슨 무병장수? 농담이겠지!” 2020년 4월 충남 태안 신진도에서 이 일대 바다(안흥량)를 지키던 조선 수군의 지휘소 건물이 확인되었는데요. 폐가로 남아있던 건물에서 확인된 명문 기록 2점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나는 벽지 형태로 발견된 한시인데요. ‘사람이 계수나무 꽃 떨어지듯 지니(人間桂花落)…’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수군지휘소의 현판 글씨(무량수각·無量壽閣)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무명장수라고? 농담이겠지”
불교에서 ‘무량수’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수명’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무량수각은 ‘무병장수하는 집’라는 의미입니다. 대개 전란이나 재해가 심한 지역의 사찰에 주로 세워진답니다. 
신진도 수군지휘소의 ‘무량수각’ 현판에는 ‘무량’ 부분에 낙관처럼 쓰인 단어가 있죠. ‘구롱(口弄·농담)’입니다.
왜 공공 건물의 현판에 ‘농담’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 건물은 이곳 해안의 안전운항을 관장하는 수군 지휘소라 했죠. 그러나 한시에서 보듯 해난사고가 계속 일어나고 인명피해가 줄지 않았죠. 그래서 ‘무병장수’를 바라며 쓴 현판에 훗날 누군가가 ‘무병장수는 무슨! 농담(구롱)이야!’라는 풍자문구를 써놓았다는 겁니다. 억측 같지만 ‘안흥량’ 해역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사고를 들춰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10척 중 7~8척이 침몰”
1123년(인종 1)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을 볼까요. 
“안흥량 물길이 격렬한 파도 때문에 열 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옛날엔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이 누차 침몰했기 때문에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는데, 훗날 사람들이 ‘편(安)하고 흥(興)하라’는 염원을 담아 ‘안흥량’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안흥량’은 인당수(황해도)·손돌목(강화도)·울둘목(전남) 등과 함께 ‘4대 험로’로 꼽혔습니다.

안흥량은 해안선의 출입이 가장 심하고 다수의 섬이 분포돼있는 데다 수중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조류의 변화가 심합니다. 
여기에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로 물살이 더욱 빨라지죠. 간조(썰물) 때나 계절적으로 풍랑이 거셀 때 안흥량을 통과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습니다. <승정원일기> ‘1667년 윤 4월9일’조는 “안흥량을 왕래하는 선박 중 뒤집혀 침몰하는 것이 10척 중 7~8척에 이르고…한 해에 바람을 만나 사고가 많으면 40~50척에 달한다”고 기록했어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안흥량을 통과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라·경상·충청도 등에서 거둔 세곡(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개경·한양)로 운반하는 ‘피할 수 없는’ 조운선의 항로이기 때문이었죠. 

■운하개통에 매달렸지만… 
고려·조선 등 역대 왕조이 대를 이어 마련한 매력적인 대안은 ‘운하 개통’이었습니다. 
처음 계획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인 1134년(인종 12)의 일이었는데요. 
요컨대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물길(운하)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사>는 “군사 수천명을 총동원한 이 대역사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고 기록했습니다.
1154년(의종 8)과 1391년(공양왕 3) 공사가 재개되었지만 중도 포기됐습니다. 공사구간이 파기 어려운 화강암 암반층이었고, 용케 팠다 해도 조수가 들락날락 하는 바람에 족족 다시 메어지는 난공사였기 때문입니다.

조선개국 후에도 운하를 향한 새 왕조의 열망은 식지 않았는데요. 개국공신인 하륜(1347~1416)은 나름 묘안을 짜냅니다.
일종의 갑문식 공법을 쓰겠다는 겁니다. 고려 때 뚫어놓은 미완성 운하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건데요. 
그 사이 높낮이에 따라 5개의 저수지를 만들고, 저수지마다 소선(작은 배)를 둔 뒤 포구에 도착한 조운선의 짐을 차례로 옮겨 싣는 방법을 쓴다는 겁니다.(1413년) 그러나 이 공법 또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무엇보다 세곡을 첫번째 저수지에 옮겨 실으려면 대선(大船·큰 배)이 우선 정박할 수 있어야 하겠죠. 
그러나 안흥량의 바람이 워낙 세고 암초가 험한 데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세곡을 잔뜩 실은 대선이 정박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싣는다는 말입니까.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죠.
그럼에도 운하계획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종 때인 1537년 대안 노선인 ‘의항운하(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의항리)’ 건설공사가 강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거센 조수간만의 차이 등으로 공사 직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 이 지역에서의 해난참사가 빈발했습니다. 조선 전기의 기록만 따져볼까요. 
1395년(태조 4) 5월 경상도 세곡을 싣고 안흥량을 통과하던 조운선 16척이 침몰했습니다. 
이건 사고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1403년(태종 3)과 1414년(태종 14)의 침몰사고는 대형 참사였습니다. 
1403년 사고로 조운선 34척이 침몰, 선원 1000여 명과 쌀 1만여석이 수장됐습니다. 이때 태종이 “모두 부덕한 과인의 책임(責乃在予)”이라면서 “내가 백성을 사지(死地)로 몰고 간 것과 다름없다”이라고 사과한 것으로 유명하죠. 1414년에는 66척이 침몰, 미곡 5000석이 가라앉았습니다. 1455년(세조 1)에는 조운선 54척이 침몰했구요. 
1395~1455년 사이 60년간 안흥량에서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에 달했습니다. 이로써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함은 물론 국가재정 또한 고갈되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
그렇게 거센 풍랑 속에 빨려 들어간 ‘난파선’이 이제와서 ‘보물선’이 되어 떠오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2007년 5월 14일 밤이었는데요. 충남 태안 안흥항 인근에서 주꾸미를 잡던 어민 김용철씨는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꿈을 꾸었답니다. 어민들 사이에서 ‘물꿈’은 길몽이랍니다. 다음날 아침 태안 대섬 앞바다로 조업을 나간 김씨는 통발에서 주꾸미 800여 마리를 낚았답니다. 그중 푸른 빛깔의 접시를 발로 끌어안고 있던 주꾸미 한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원래 주꾸미를 잡으려면 그물에 소라 껍데기를 달아놓습니다. 그러면 주꾸미가 그 안에 들어가 알을 낳은 뒤 입구를 자갈 같은 것으로 막아놓는데요. 그런데 문제의 주꾸미는 자갈이 아닌 청자접시로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겁니다.
이 사실이 태안군청에 신고되었구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발굴에 돌입했는데요. 발굴 3일만(7월6일)에 수심 15m 정도에서 95도 가량 기울어진 침몰선의 선체가 드러났습니다. ‘태안선’이라는 공식명칭이 붙은 이 난파선의 별명이 있죠. 
‘주꾸미가 찾아낸 고려청자선’이었죠.

2만3815점의 인양유물 가운데 2만3771점이 자기였구요. 절대다수가 12세기에 제작된 청자였습니다.
대부분의 청자들은 완충재(짚)와 목재를 이용하여 끈으로 묶어 포장한 그대로 쌓여있었습니다. 
그 중의 백미는 사자머리 모양 향로 2점(보물)이었습니다. 두 점 모두 날카로운 이빨과 매섭게 뜬 눈이 예사롭지 않지만 마냥 무서워할 수 없는 해학적인 모습입니다. 또 ‘퇴화문(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무늬) 두꺼비형 벼루’도 올라왔는데요.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 다리를 웅크리고 고개를 든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지죠. 
이 사자모양 향로와 두꺼비 벼루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태안선에서는 명문 목간도 다수 인양됐는데요. 
이 중에는 ‘탐진(耽津·강진) 재경(在京·개경)…’과 ‘최대경댁상(崔大卿宅上·최대경댁에 올림)’ 등의 목간이 주목됩니다. ‘강진에서 제작된 청자가 개경의 왕실이나 귀족층(최대경 등)에 납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참기름, 꿀을 담은 고려청자
그렇게 태안선 발굴이 한창이던 2007년 7월 20일과 27일이었는데요.
태안 마도 인근에서 어부 심선택씨가 청자 26점을 인양했다는 신고가 접수됩니다. 이곳은 ‘태안선’ 발견지점에서 약 2㎞ 떨어진 섬 앞바다였는데요. 이번에는 주꾸미가 아닌 청자가 그물에 걸렸답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본격 발굴이 이어졌구요. 이곳에서 고려시대 침몰선 3척(마도 1·2·3호)가 잇달아 인양됐습니다. 
세 척의 화물 대부분은 쌀·콩·메밀·조·피·기장 등 곡물과 건어물 및 메주, 젓갈류 등이었습니다. 
태안선이 ‘청자운반선’이라면 마도 1·2·3호선은 전라도 각지에서 거둔 곡물 등 먹거리를 개경으로 운반하다가 난파된 ‘식량운반선’이었습니다. 마도 1호선의 경우 명문 목간을 분석하면 1208년(무진년) 출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해난사고가 빈발하는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서울(개경·한양)로 무사히 이송하는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1134년(인종 12) 나름 묘안이 나왔다. 천수만~가로림만을 통과하는 물길(운하)을 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운하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마도 2호선 출토유물 중 백미는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과 죽찰(국화 모란 버드나무 갈대 대나무 무늬 매병과 명문 대나무 조각’과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과 죽찰’(연꽃 줄기 무늬 매병과 명문 대나무 조각)’ 등 2점의 청자였는데요.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에 제작된 2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죠. 그런데 이 두 점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요소가 따로 있습니다. 청자 두 점의 목에 걸려있던 명문 죽찰(대나무 조각)이었는데요.

두 점 모두 ‘중방(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의결기구) 소속 무관(도장교·정 8품) 오문부에게 보낸 참기름과 꿀’이었음을 밝혔습니다. ‘모란~’ 매병에는 ‘참기름(眞)’자가, ‘연꽃가지~’ 매병에는 ‘꿀(精蜜)’자가 들어있었거든요. 명문 대나무 조각은 지금의 택배 물품표였던 겁니다. 놀라운 일이죠. 이렇게 아름다운 명품 청자를 생활용기로 썼다니 말입니다.

하륜의 갑문식 공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안흥량의 바람이 세고 암초가 험한 데다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세곡을 잔뜩 실은 대선이 정박하기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어떻게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싣는다는 말인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다.

■장기 두다가 수장된 선원의 시신?
또 마도 3호선은 1265~1268년(고려 원종 연간) 사이에 난파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당대 최고 권력자인 무인집정 김준(?~1268) 등에게 보내는 곡물과, 젓갈·전복·홍합·상어 등 각종 식품을 실었던 배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그중 마도 3호만의 시그니처 유물은 장기알인데요.
모두 46개의 장기알이 선원들의 생활공간인 선체 중앙부에서 나왔는데요. 적어도 2벌 이상의 장기알이 있었을 겁니다.
모서리가 둥근 조약돌을 이용해 앞뒤에 차(車), 포(包), 졸(卒) 등을 적은 게 확인됩니다. 
750년 전 고려시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증거할 유물이 현현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선상생활의 지루함을 달래려고 장기를 두고 있던 선원들이 갑작스런 풍랑 속에 배가 난파되고 침몰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수장되었다는 생각에….
새삼 태안선에서 인양된 인골이 떠오르네요. 이 선원은 선박의 침몰 당시 5겹으로 켜켜이 쌓은 청자 더미에 깔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답니다. 인골이 정면을 위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약간 틀어진 상태였는데요. 오른쪽 팔을 뻗고 있었구요. 견갑골(어깨뼈)과 척추가 정면에서 살짝 들려져 있었구요. 이런 인골의 상태로 미루어보면 안타까운 추론이 가능했습니다.
즉 이 불행한 고려 선원은 너무도 빨리 침몰한 선박과 함께 선적된 상자가 무너지면서 상자 아래에 깔렸다, 선원은 사력을 다해 몸을 틀어 상반신을 일으켰지만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뭐 이런 스토리가 되겠네요.   

마도 3호선은 당대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인 무인집정 김준(?~1268) 등에게 보내는 곡물과 젓갈, 전복, 홍합, 상어 등 각종 식품을 실었던 배였음이 밝혀졌다.

■‘재난은 사람이 부른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안행량 등에서 일어난 잦은 해난참사가 단순히 ‘거센 바람과 암초,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1473년(성종 4) 4월 20일 성종 임금의 말씀을 한번 볼까요.
“안흥량이 험악하다고? 아니다. 험악한 지형 때문만이 아니라 항행에 조심하지 않아서 사고가 일어난다. 해당 관리들이 제대로 지휘·고찰한다면 조운선의 침몰을 면할 수 있다.”
1633년(인조 11) 7월21일 인조 임금의 하교가 귓전을 때립니다.
“재변이란 까닭없이 생기지 않고,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災不虛生 由人所召)
이제와서 ‘바다속 경주’니, ‘보물선으로 환생한 침몰선’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참사는 사람만 조심하고 제대로 관리했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인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출귀물 고려청자’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내년 6월 25일까지 충남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특별한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요. 
안흥량 해역 발굴 유물 중 보물로 지정된 고려청자들을 한자리에 모은 ‘신출귀물(新出貴物), 태안 바다의 고려청자’ 주제전(테마전)인데요. ‘사자형뚜껑 향로’와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과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 등 보물들이 선을 보입니다. ‘난파선의 무덤’에서 ‘바닷속 경주’로 거듭난 안흥량 해역에서 ‘보물’로 떠오른 명품청자들을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와함께 거센 풍랑 속에 희생된 분들의 넋도 빌면서….(이 기사를 위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김현용·김동훈·진호신 학예연구관, 신종국 전시과장 등이 자료 및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려청자보물선-태안 대섬 수중발굴보고서 본문 및 도판>(학술총서 제17집), 2009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 마도 1·2·3호선 수중발굴보고서>, 2010·2011·2012
서태원·문광균·박범·문경호, <태안 안흥진의 역사와 안흥진성>(태안 안흥진성의 사적진성을 위한 학술세미나), 태안시, 2020
진호신, ‘태안 신진도 고가(古家) 발견 유물의 종류와 성격’, <해양문화재> 16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