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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암각화에 새긴 ‘신석기시대 풍속화’…4000년의 삶이 조개무덤에 켜켜이

올해 최고의 화제작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고래가 인구에 회자되었죠. 고르기 힘든 것을 골라야 할 때 남들은 “산이냐 바다냐,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부먹이냐 찍먹이냐”고 했지만 우영우(박은빈 분)는 “대왕고래냐 혹등고래냐”고 고민했죠. 특히 유명세를 탄 고래가 바로 ‘혹등고래’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 등장하는 고래죠. 또 자폐 때문에 변호사 일을 더는 할 수 없어 퇴사를 결심한 우영우에게 ‘국민 섭섭남’ 이준호(강태오 분)가 대회의실에서 보여준 것도 ‘혹등고래’ 사진입니다. 그 많은 고래 중 왜 하필 ‘혹등고래’였을까요.

■이상한 변호사의 혹등고래
우선 혹등고래는 평균 몸길이가 15m, 체중이 약 30t에 달하는 대형고래이구요. 등 위에 혹 같은 등지느러미가 있고, 위턱과 아래턱에 혹들이 산재하고 있기 때문에 ‘혹등고래’라는 이름을 얻었는데요. 그런데 큰 몸집에도 물 위로 힘차게 솟구쳤다가 다시 수면으로 떨어지는 이른바 ‘브리칭(breaching)’으로 유명한 고래 중 하나가 바로 혹등고래입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조용한 수면에서 갑자기 물보라를 일으키며 솟구쳐 오르는 혹등고래의 모습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새로운 반전이 일어나는 이미지를 담고 싶었을 겁니다. 
혹등고래는 또 보호본능이 강한 고래로 알려져 있는데요. 2009년에 남극 바다에서 포악한 범고래의 공격으로부터 위기에 처한 빙하 위의 새끼 물범을 배 위에 올려 구조하는 사진이 촬영됐구요. 2017년에는 남태평양 쿡 제도 연안에서 상어의 접근을 감지한 혹등고래가 여성 다이버를 보호하는 영상이 공개되었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우영우를 낳고 모른척했던 어머니(태수미·진경 분)가 등장하잖아요. ‘혹등고래’가 이 드라마에서 여러가지 이미지로 활용된 겁니다.

■“혹등고래냐 대왕고래냐”
제가 최근에 부산 동삼동 패총(조개무덤)에서 발굴된 신석기 시대(5000년 전)의 동물 유체를 다룬 보고서(복천박물관의 <동삼동패총 정화지역 동물유체 연구보고서>, 2011)를 보았는데요. 
단 50평 정도만 팠는데,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자취가 발견되었구요. 특히 갖가지 동물 중 포유류(1만3000여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요. 그중 고래류(2172점), 사슴(1666점), 강치(941점) 등이 주류를 이뤘구요. 
이중 제 눈에 들어온 동물은 뭐니뭐니해도 고래류였죠. 특히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니시모토 도요히로(西本豊弘) 교수 등의 분석에 따르면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뼈가 검출되었답니다. 

어떻게 밝혀냈을까요. 사실 발굴된 고래뼈 대부분이 잘게 부서져 있어서 정확한 종의 분류는 쉽지 않았는데요. 
연구팀은 그나마 종의 분류가 가능한 대형 고래류의 고실골(고막 안쪽에 청각기관을 감싸고 있는 일종의 귀뼈) 6점에 주목했는데요. 고래 연구자인 안용락 국립해양생물자원관 국가해양생명자원 전략센터장에 따르면 이 고실골은 소리를 잘 들리게 하는 일종의 증폭기관이라는군요. 그런데 6개의 고실골 중 완전한 1점은 길이 93.7mm, 최대폭 86.7mm, 두께 53.4mm 정도였는데요. 
니시모토 교수가 일본 국립과학박물관에 있는 현생 혹등고래의 ‘고실골’ 표본과 비교해봤는데요. ‘둥그런 것’이 특징인 혹등고래라는 사실을 확인했답니다. 혹등고래 뿐이 아닙니다. 
당시 분석팀에 소속되었던 김헌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은 “파편만 남은 2점 중 1점의 고래뼈가 77.8mm, 두께 63.4mm 정도였는데, 일부에서 둥근 형태의 홈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대왕고래로 판단됐다”고 밝혔습니다.

극중에서 우영우 변호사가 “대왕고래냐, 혹등고래냐, 그것이 문제로다”라 했던 바로 그 두 고래가 6000년전 유적에서 그대로 나온 겁니다.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잡이 장면
사실 동삼동 패총 뿐이 아닙니다.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바위그림인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는 총 353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요. 그중 핵심은 역시 57점에 달하는 고래 그림입니다. 그만큼 고래의 비중이 높다는 건데요. 
안용락 센터장의 설명으로 반구대 그림 속 고래를 한번 짚어볼까요.
암각화의 왼쪽 아래에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고래 세 마리를 살펴보죠. 머리 위에 양쪽으로 갈라진 고리 같은 문양이 보이는데요. 세 마리 모두 등지느러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셋 다 북방긴수염고래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이 세마리의 오른쪽에는 머리를 아래로 둔 고래 한마리가 있습니다. 그 고래가 바로 혹등고래일 가능성이 짙다는 겁니다. 
복부의 주름이 항문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는 겁니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모든 고래 그림이 옆이나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이 고래만 유달리 뒤집힌 채 복부의 주름을 강조하여 표현했습니다. 

과연 혹등고래는 복부(배)를 하늘로 향해 드러눕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는데요. 이것인 대왕고래, 참고래, 브라이드 고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는군요. 또 혹등고래는 고래뛰기, 가슴지느러미치기, 꼬리지느러미치기 등 다양한 행동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답니다. 더욱이 혹등고래는 해안 가까운 바다를 천천히 유영하고 죽더라도 유체가 가라앉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이 혹등고래의 꼬리지느러미 왼쪽에는 목 부분에 5개의 줄을 그려놓은 고래가 있습니다. 귀신고래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귀신고래 역시 유영 속도가 느리고 연안에 가까이 분포한답니다. 그림 중 새끼를 밴 것 같은 고래가 보입니다. 혹자는 새끼를 업고 있는 고래라 하고, 또 혹자는 고래에 기생하는 물고기라고도 하죠. 또 작살을 맞은 고래도 보입니다.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 중에는 새끼를 밴 것 같은 고래가 보인다. 혹자는 새끼를 업고 있는 고래라 하고, 또 혹자는 고래에 기생하는 물고기라고도 한다. 또 작살을 맞은 고래도 보인다. 고래사냥의 증거로 거론된다.

배 그림도 4곳이나 나타나는데요. 가운데 암각화 군의 맨 위쪽에 있는 배가 가장 선명한데, 길이가 19㎝에 이릅니다.
이 배 그림은 하늘에 오르듯 둥실 떠 있습니다. 중심 바위 면에 두 척의 배가 더 있는데요. 고래 떼 사이에 한 척이 있고, 그보다 가늘게 처리된 또다른 배가 보입니다. 이 배의 길이는 18.5㎝이며, 배에 탄 인원만 20명 가량 됩니다. 
중심 바위 서쪽 면에 떨어진 곳에는 고래잡이 배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배 밑에 고래의 꼬리가 묘사되어 있어요. 물 속의 고래를 공격하는 고래잡이배로 해석됩니다. 2004년 BBC 인터넷판은 “반구대 암각화엔 배 위에서 작살과 낚싯줄을 사용하는 모습이 보인다”면서 “이것이야말로 고래사냥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이와 같은 고래잡이 모습은 물론,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된 인물이 춤을 추는 장면도 보이구요. 또 과장되게 표현한 팔과 다리를 수평으로 벌린 인물상이 있는데요. 
연구자들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제사장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 추정하죠. 손·발가락을 쫙 편 인물상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보이는데, 접신의 경지에 접어든 제사장 같습니다. 긴 성기를 앞세우고 선 채로 긴 나팔을 불고 있는 인물도 인상적이죠. 이와같이 반구대 암각화는 7000년 전부터 대대로 그렸던 신석기인들의 생생한 ‘삶의 장면’이라 할 수 있죠. 
신석기인들이 그린 ‘풍속화’라 할까요.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고래잡이 모습은 물론,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된 인물이 춤을 추는 장면도 보인다. 손·발가락을 쫙 편 인물상은 접신의 경지에 접어든 제사장 같다. 성기를 앞세우고 선 채로 나팔을 불고 있는 인물도 인상적이다.

■신석기 시대 풍속화와 실증유물
동삼동 패총 유적은 어떨까요. 반구대 암각화가 ‘신석기 시대 풍속화’라면, 동삼동 패총은 그 풍속화를 입증할 ‘실증 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등고래와 대왕고래의 고실골(이석) 등 2172점에 달하는 고래뼈 조각이 그렇습니다.   
이 고래뼈 외에도 반구대 암각화가 제시한 신석기인들의 삶을 복원할 고고학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는데요. 패총은 신석기부터 청동기 시대까지 선사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 무덤이죠. 석회질로 된 조개껍데기는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바꿉니다. 
덕분에 패총 안에 들어있는 유물들은 잘 썩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토)기와 석기, 뼈연모, 토제품 등 생활도구는 물론 무덤과 집자리, 화덕시설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많죠. 만약 선사인들이 지금처럼 ‘쓰레기 분리수거’를 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선사시대가 남긴 숱한 삶의 정보를 잃어버렸겠죠. 

동삼동 패총은 1929년 동래고보 교사인 오이가와 다미지로(及川民次郞)가 처음 발견했답니다. 그후 30년이 지난 1962년 미국 위스콘신대 출신인 A. 모아와 L.L 샘플 부부가 발굴을 주도했다가 떠났구요.
1969~71년 국립중앙박물관(서울대와 공동발굴)의 3차례 조사로 이어지는데요. 
여기서 조기 신석기 시대(기원전 6000년)부터 청동기 시대(기원전 2000~기원전 1000년)가 시작될 때까지 4000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고고학 자료가 나옵니다. 동삼동 패총은 신석기 문화의 전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적이 된 겁니다.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되는 덧무늬(융기문) 도기들은 유적의 첫 조성연대가 기원전 6000~5000년임을 알려준다. 중국 동북방의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와 제주도 고산리, 강원 고성 문암리 출토 덧무늬 도기 등과 같은 시기임이 판명되었다.

■동삼동에서 출토된 곰 인형
찬찬히 뜯어볼까요. 이곳에서 숱하게 출토된 덧무늬(융기문) 도기들은 유적 조성연대가 기원전 6000년임을 알려줍니다.
중국 동북방의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과 울산 세죽유적, 강원 고성 문암리 출토 덧띠무늬 도기와 같은 시기임이 판명된겁니다.

중국 동북방부터 한반도 남부까지가 기원전 6000년 전부터 같은 문화권임을 알 수 있는 증좌가 나온거죠.  
또 다양한 문양의 빗살무늬 도기류가 쏟아졌는데요. 신석기인들이 토기에 이렇듯 갖가지 문양을 새기면서 예술적 감각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유물 중에는 크기가 12.9㎝, 11.8㎝ 정도인 조개 가면이 있는데요. 가리비에 사람의 눈과 입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형상입니다.  곰(熊) 모양의 흙인형도 의미심장합니다. 이 유물은 기원전 4500~기원전 3500년 문화층에서 확인됐는데요.
이것은 동시기 중국 훙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 유적지인 중국 뉴허량(牛河梁) 유적에서 발굴된 곰이빨과 흙으로 만든 곰 소조상 및 옥기 등과 흡사합니다. 곰을 숭상했던 단군 조선이 연상됩니다.
또하나, 2003년 유물 정리 과정에서 극적으로 찾아낸 사슴 그림이 있죠. 뼈나 대칼 같은 도구로 그렸는데요. 세밀한 형상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 특징만 잡아 묘사함으로써 대상물의 이미지를 간결하고 단순하게 형상화했습니다. 신석기인이 이토록 첨단의 미술기법을 발휘하다니요. 발굴자들이 놀란 유물이 또 있었습니다.

■신석기 시대 명품 팔찌 공장
혹등고래와 대왕고래뼈가 확인된 1999년 조사에서 1500여 점에 이르는 조개팔찌(패천·貝釧)가 쏟아져나왔다는 겁니다. 
이들 조개팔찌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완제품은 물론 파손된 제품과 아직 제작되지 않은 제품 등이 섞여 있었습니다. 
출토 팔찌의 70~80%는 중간단계에서 파손됐고, 일부는 마연 및 마무리 단계에서 깨졌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조개팔찌의 생산공정을 웅변해주고 있죠. 동삼동에는 대규모 ‘팔찌공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죠. 
또 이 팔찌의 재료가 투박조개(90%)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투박조개는 수심 5~20m 사이의 모래밭에서 서식하는데요. 
바위가 많은 일본 쓰시마(對馬島)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시 하인수 복천박물관 보존연구실장은 실증적인 연구 끝에 ‘동삼동 조개팔찌=광안리산 투박조개’일 가능성을 개진했습니다. 투박조개는 매끌매끌하고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데요. 

그만큼 가공하기도 어렵죠. 조개팔찌를 만드는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였던 셈입니다. 출토된 유물에서 보듯 실패율이 높았어도 투박조개만 고집한 이유가 있었죠. 투박조개 팔찌가 최고급 명품 장신구였다는 겁니다. 
또 일본 규슈(九州) 사가(佐賀)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팔찌 113점 가운데 투박조개 팔찌가 84%(95점)나 되는데요.
일본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투박조개 팔찌가 규슈에서 나온 이유가 있죠. ‘동삼동산 조개팔찌’가 일본으로 대량 수출됐다는 이야기죠. 반복하자면 동삼동은 당대 수출용 명품 팔찌를 제작한 ‘산업단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으로부터 8000년전부터 4000년전까지 신석기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삶을 살았죠.
바다에서는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등 각종 고래들을 관찰·사냥했고, 또 육지의 첨단 수출단지에서 대량 생산한 최고급 명품 팔찌를 수출하면서 말입니다.(이 기사는 안용락 국립해양생물자원관 국가해양생면전략센터장, 김헌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하인수 전 복천박물관장, 임수진 동삼동패총전시관 학예사, 전호태 울산대 교수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동삼동패총전시관, <동삼동 패총문화>(동삼동패총전시관 학술총서 Ⅲ>, 2008
복천박물관, <동삼동 패총 정화구역 동물 유체 연구보고>(복천박물관 학술연구총서 제36책), 2011
울산대 반구대 암각화 유적보고연구소, <한국의 암각화-2020>, 2020
임세권, <한국의 암각화>, 대원사, 1999
전호태, <울산의 암각화-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론>, 울산대 출판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