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하늘에 검은 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걸치더니 곧 부채꼴로 퍼지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세상이 밤처럼 깜깜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이 내려앉은 곳은 잎사귀를 볼 수 없는 황무지로 돌변했다. 아낙들은 모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고, 남정네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장대를 휘두르며 메뚜기 떼와 싸웠다.”
펄 벅(1892~1973)의 <대지>에 등장하는 풀무치(메뚜기) 떼의 습격 장면입니다. 1억 마리 이상의 풀무치 떼가 수확기 농촌을 휩쓸어서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했다는 해외토픽이 요즘도 가끔 보이는데요.
■풀무치를 꿀꺽 삼킨 군주
역사서는 ‘풀무치’를 ‘황충(蝗蟲)’이라 했습니다. ‘황충’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데요.
중국 역사상 위대한 명군으로 꼽히는 당나라 태종(626~649)입니다. 그런 태종에게 위기가 닥칩니다.(628년)
가뭄과 함께 황충 떼가 당나라 수도 장안을 뒤덮은 겁니다.
황충떼는 가뭄 때문에 별로 자라지도 않은 곡식까지 남김없이 훑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태종이 황급히 들에 나가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답니다. 태종은 안타까운 나머지 황충 떼를 향해 외쳤답니다.
“사람은 곡식으로 살아간다. 너희가 먹어대면 백성에게 해가 된다. 백성에게 허물이 있다면 나 한 사람에게 있다.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어라.”
태종은 이때 돌발행동을 벌였는데요. 말릴 틈도 없이 황충 두 마리를 잡아 삼키려 한 겁니다. 좌우의 대신들이 화들짝 놀라 “폐하. 제발 멈추소서. 병이 될까 걱정됩니다”라 하며 태종을 말렸는데요.
그러나 태종은 “황충의 재해가 짐에게 옮겨지기를 바라는데 어찌 병을 피하겠느냐”고 하면서 ‘꿀꺽 삼키고(呑蝗·탄황)’ 말았습니다. 그러자 황충 떼가 사라졌답니다.(<정관정요> ‘무농’)
이 대목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당 태종의 어록이 있습니다. “백성에게 허물이 있다면 나 한사람에게 있고 (황충과 같은) 재해가 나에게 옮겨지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무한책임의 자세죠. 이것을 당 태종의 ‘탄황(呑蝗·풀무치를 삼킴)의 고사’라 합니다.
■“벌레야!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먹어라”
이 ‘당태종의 탄황 고사’는 조선조 군주들에게도 귀감이 되었습니다.
1765~68년 황충 떼를 비롯한 해충이 극성을 떨고 가뭄까지 겹치자 영조(1724~1776)가 이 ‘탄황 고사’를 떠올립니다.
“옛날 당 태종은 황충을 삼킨 일이 있다. 아무리 어질고 의로운 군주라 해도 정성이 없었다면 어찌 황충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영조실록> 1765년 6월 3일조)
영조는 황충 등 해충과 가뭄이 3년 이상 계속되자 “황충을 잡아먹은 당태종의 마음이 정성스러워 효험이 있었지만 나(영조)는 부덕하고 또 노쇠(당시 75살) 했다”면서 “이 모든 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다 나의 부덕 때문이다”라고 자책했습니다.
영조는 그러면서 “아! 이 벌레는 어찌하여 내 살을 빨아먹지 않고 백성의 곡식을 먹느냐”면서 “만약 나의 정성이 있다면 벌레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벌레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한 사람(영조 자신)이 부른 것이다”라고 한탄했습니다.
영조는 이렇게 ‘내 탓이오!’를 외친 뒤에야 전국 각 지방관(유수·감사·수령) 등을 향해 “임금의 부덕함은 내가 아노니, 여러분들은 정성껏 황충 퇴치에 앞장 서달라”고 당부합니다.(<영조실록> 1768년 7월 12일자)
영조 역시 ‘당신의 무한책임론’을 개진한 겁니다.
■뽕나무 밭에서 외친 6가지 자책
동양에서는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까지도 군주인 자신의 부덕과 관련지었습니다.
3600년 전 인물인 상나라 창업주 탕왕(기원전 1600년)이 시쳇말로 원조 ‘프로자책러’인데요.
즉 하나라 폭군인 걸왕을 정벌하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에게 곧 위기가 닥칩니다. 7년 간이나 가뭄이 이어진 겁니다. 이때 “사람을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치면 된다”는 의견이 개진됩니다. 그러자 탕왕은 “내가 희생양이 되겠다”고 자청한 뒤 목욕재계하고 희생양의 모습으로 꾸민 뒤 상림(桑林·뽕나무밭)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습니다.
탕왕은 이 때 자책한 ‘6가지의 일(六事)’이 심금을 울립니다. 탕왕은 하늘을 향해 자신의 죄를 묻습니다.
“제가 정사를 펼치는 데 절제가 없어 문란해진 것입니까.(政不節歟) 백성이 직업을 잃어 곤궁에 빠졌습니까.(民失職歟) 궁궐이 너무 화려합니까.(宮室崇歟) 제가 궁궐 여인들의 청탁에 빠졌습니까.(女謁盛歟) 뇌물이 성해서 정도를 해치고 있습니까.(苞저行歟) 아첨하는 무리의 말을 듣고 어진 이를 배척하고 있습니까.(讒夫倡歟)”(<십팔사략> <제왕세기> <사문유취>)
탕왕이 간절한 자책의 기도를 올리자 금방 1000리에 구름이 몰려들어 배를 뿌린 덕에 수 천 리의 땅을 적셨습니다.
이 고사가 바로 탕왕의 ‘뽕나무 밭 6가지 자책’이라는 뜻에서 ‘상림육책(桑林六責)’이라 합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송나라 태종(977~997)인데요. 이때 황충 떼가 하늘을 뒤덮었답니다.
그러자 태종은 “하늘의 노여움을 산 것은 곧 나의 책임”이라는 자책조서를 내리면서 역시 돌발행동을 벌입니다. “짐이 내 몸을 태워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고자 한다”(<송감>)고 한겁니다. 신하들이 만류했지만 태종은 스스로 몸을 태우려 했는데요. 곧 하늘이 응답해서 비가 내리고 황충의 떼가 즉시 죽었답니다.
■공구수성과 구언
그럼 국가적인 재난에 맞딱드린 신하들의 자세는 어땠을까요.
심지어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모든 것은 주상이 부덕한 탓이니 공구수성(恐懼修省) 하시라”고 다그쳤습니다. ‘공구수성’은 ‘무서워할 공(恐) 두려워할 구(懼), 닦을 수(修), 살필 성(省)자 잖습니까.
“몹시 두려워하며 수양하고 반성한다”는 뜻이죠.
그러면 군주는 “기탄없는 직언으로 과인을 꾸짖어 달라”는 내용의 교지를 내렸습니다. ‘구언(求言)’이라 합니다.
‘신하의 바른 말을 구한다는 정식 절차’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1656년(효종 7) 5월27일 효종이 내린 직언교서를 한번 볼까요.
“내 정치가 보잘 것 없어서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두려움과 걱정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정말 죽고 싶구나. 직언을 구해서 이 어리석은 자질을 변화시켜 보리라.”
군주는 구언할 때는 “그 어떤 직언이라도 모두 허용한다”고 약속했습니다.
1690년(숙종 16) 가뭄이 극심하자 숙종은 “어떤 직언이라도 죄주지 않을 것이다. 재변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라 했습니다. 1723년(경종 3) 경종의 구언교서도 아버지(숙종)의 것과 판박이입니다.
“광망(狂妄)한 직언이라도 용납한다. 지금의 재변은 모두 내 부덕의 소치이니….”
■임금의 폐부를 찌른 직언
과연 신하들의 직언은 군주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못난 임금이라 할 수 있는 인조(1623~1649)를 한번 예로 들어볼까요.
1632~33년 사이에 잇달아 재변이 일어나자 홍문관(임금 자문기관) 등이 상소문을 올리죠.
“재앙은 괜히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災不虛生 必有所召)”면서 인조를 향해 비판의 칼날을 겨누는데요.
“지금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사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어서…군주의 초심이 위축된 것입니까. 예전의 폐단에 사로잡힌 것입니까. 혹 편파적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신상필벌에 미진한 것은 아닙니까.”(1632년 3월5일)
이 홍문관의 상소문은 리허설에 불과했죠.
1633년(인조 11) 7월21일 대사헌 강석기(1580~1643)는 인조 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립니다.
“최근의 재앙은 진실로 전에 없는 변고입니다…전하의 덕과 정치가 부족하고 잘못되어서….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10년동안 불행히도 위기가 계속되어 경악할만한 변고가 다달이 생기더니 급기야….”
강석기의 상소는 더욱 거침이 없었습니다.
“정책의 80~90%가 일관성이 없습니다. 모든 법도가 없어졌습니다. 인사도 마찬가집니다. 백성을 위해 일하는 관리가 없습니다. 시간만 보내며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승정원일기>)
심지어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진 책임도 ‘군주의 부덕’으로 돌렸습니다. 1563년(명종 18) 2월 18일 경상도 산음현 북리에 운석이 떨어지자 <명종실록>의 기자가 쓴 논평을 볼까요.
“운석이 떨어지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이다. 정사가 해이해지고 쇠퇴하는 날에 운석이 떨어지고, 혹은 국가가 쇠잔하고 혼란할 때도 떨어졌으니…. 군주가 허물을 반성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때이다.”(<명종실록>)
■조선판 세월호 사건 대처법
기상이변 같은 천재지변의 책임도 모두 군주가 지는 마당인데, 인재(人災)가 명백한 참사사고는 오죽했겠습니까.
1403년(태종 3) 5월5일 <태종실록>을 볼까요.
실록은 경상도에서 거둔 현물세금을 운반하는 조운선 34척이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태종 임금의 첫반응이 어땠을까요. “책임은 나에게 있다(責乃在予)”는 ‘자책 멘트’부터 시작합니다.
“책임은 내게 있다. 5월5일은 음양으로 볼 때 대흉일이고, 또 강풍이 불어서 배 운항이 불가능했는데, 배를 출발시켰다. 실로 백성을 사지(死地)로 몰고간 것과 다름없다.”
태종은 이렇게 먼저 ‘내탓이오’를 외치고 나서 “죽은 사람은 얼마이며, 잃은 쌀은 얼마인가?”고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신하들은 “쌀은 1만여 석이고, 사람은 1000여명”이라 하자 태종은 가슴을 칩니다.
태종이 “쌀은 아깝지 않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다”면서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느냐”고 애통해합니다. 또 이때 난파된 조운선의 선원이 도망하다가 붙잡힌 뒤 “운항이 너무 괴로워서 이 참에 다른 일을 찾고 싶다”고 진술했는데요. 이때 태종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조운선의 고통이 이렇게 심한데 선원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도망간 것은 처벌을 할 일이 아니다”라고 감싸준 겁니다.
이 참사의 원인을 알면 기가 막힙니다. 사고발생 후 3개월 후인 8월 20일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볼까요.
“올해 조운선을 올릴 때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의 중량을 제대로 감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수군 수백명을 수장시키고, 적재한 쌀 1만 여 석을 모두 물에 빠뜨렸습니다. 이로써 부모 처자가 하늘을 부르며 통곡했습니다.”
무리한 운항 강행과 과적이 과적이 사고의 큰 원인이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조선판 세월호’ 사건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태종은 부하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다 ‘내가 나쁜 사람이오. 내가 부덕해서 생긴 사고요’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미안하다’는 ‘가장 어려운 단어죠’
팝송 중에 엘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가 있죠. 따지고 보면 이 노래처럼 ‘사과’란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죠. 말 한마디에 천근만근의 정치적인 무게가 실리는 지도자에게 ‘사과의 한마디’란 더더군다나….
사과에 따른 엄청난 책임과 부담까지 지도자가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겠죠. 왕조시대엔 군주가 만백성의 어버이였죠.
그러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실수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했습니다. 고려말 대학자 이색(1328~1396)의 시가 심금을 울립니다.
“…죄를 자책하고 용서를 바라노니(引罪辜以謝過兮) 이미 지나간 일을 누가 책망하리요.(孰旣往之追責)”(<목은시고> ‘자송시’)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같은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지도자의 으뜸 덕목’을 떠올리게 됩니다.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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