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황오리 1호분), 98호(황남대총), 125호(봉황대), 126호(식리총), 127호(금령총), 128호(금관총), 129호(서봉총), 140호(호우총), 155호(천마총)…’. 일제가 1915년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경주 시내의 고분에 일련번호를 붙였습니다.
그후 몇몇은 이름을 얻었지만, 여전히 일제가 붙인 번호만 갖고 있는 고분들이 많습니다.
그중 황남동 120호분이 있습니다. 경주 시내에 조성된 왕·귀족 무덤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조성되어 있는데요.
해방 이후 이 120호분의 봉분을 깎아 민가가 조성되었구요. 봉분 상부와 주변의 교란이 매우 심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죠. 아무래도 ‘왕과 왕비릉’(황남대총, 서봉총, 천마총, 금관총 등)과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진 고분으로 여겨졌죠. 그러다 2018년부터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담당한 발굴조사가 벌어졌는데요.
조사과정에서 120호 일부를 깎고 후대에 조성한 고분 두 기를 뜻밖에 확인했답니다. 두 고분에 편의상 ‘120-1호’, ‘120-2호’의 이름을 붙였구요. 먼저 두 고분을 조사한 뒤 주인공인 120호분으로 마무리짓는 것으로 조사계획이 수정되었습니다.
■딸린 고분에서 뜻밖에 출현한 금동관
그런데 예상밖 유물이 120-2호분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금동 허리띠 장식과 각종 금동 말갖춤새, 청동 다리미, 쇠솥 등은 양념에 불과했구요. 발굴과정에서 120-2호의 피장자 발치에서 금동신발 1쌍을 확인한 겁니다.
조사단은 이 금동신발의 출현 사실을 언론에 급히 공개했는데요.(2018년 6월2일) 그도 그럴 것이 금동신발이 발굴된 것은 1977년 인왕동 고분 발굴 이후 43년 만의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무렵 발굴단이 눈여겨 본 유물 노출 상태가 있었답니다.
바로 피장자의 머리 부분에서 노출된 여러 점의 금동 달개였습니다. 그렇다면 금동관의 부속이 아닐까, 발굴단의 기대가 커졌습니다. 과연 그 예상이 맞았습니다. 추가 발굴 결과 금동관이 모습을 드러냈구요.
금동신발, 금드리개, 금귀고리 등 온갖 금·금동제와 금은장도, 은허리띠, 은팔찌, 은반지 등 금은동제 유물 등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4~6세기대에 유행한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피장자의 착장품이 풀세트로 출토된 것이 몇 년 만입니까. 1973~75년 황남대총 발굴 이후 45년만이었습니다.
금동관의 장식 또한 매우 특이했는데요. 관테에 여러 개의 거꾸로 된 하트 모양 구멍을 끌이나 망치로 뚫어 장식했습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6세기초 무덤의 금동관에서는 이런 하트 모양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일본 군마현(群馬縣) 금관총 고분의 금관에서 관찰되는 형식”이라고 전했습니다. 일본 군마현 금관총 고분의 주인공이 신라 계통이거나 신라 문물을 받아들인 인물이었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거죠.
■키 170㎝가 넘는 장신의 여인
120-2호 주인공은 여성일까요, 남성일까요.
일반적으로 신라 고분에서 주인공이 ‘굵은고리 귀고리’와 ‘가락바퀴(실감는 도구)’, ‘(금)은장도’ 등을 착장하고 있으면 ‘여성’으로 추정하구요. ‘가는고리귀고리’와 ‘큰칼(대도)’ 등을 달거나 차고 있으면 ‘남성’으로 특정합니다.
120-2호 고분에서는 피장자가 ‘굵은 고리 귀고리’와 ‘금은장도’를 착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이라고 특정했습니다.
이 여성의 허리띠 양 끝에서는 ‘4점 묶음’의 은팔찌와 은반지도 확인됐구요. 오른팔 팔찌 표면에서는 크기 1㎜ 가량의 초소형 황색유리구슬이 500여 점 넘게 출토됐습니다. 작은 구슬 팔찌를 은팔찌와 함께 끼고 있었던 겁니다.
이 여성의 신장(키)이 특히 눈길을 끌었는데요. 백골이 진토되어 인골은 보이지 않았는데요.
그렇지만 착장한 그대로 노출된 ‘금동관의 중앙부~금동신발 발뒤꿈치’의 길이를 재어보면 어느 정도 주인공의 키를 알 수 있겠죠. 그렇게 재보니 176㎝ 정도 됐는데요. 무덤 주인공의 신장은 최소한 170㎝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1500년전 이 무덤에 묻힌 여성이 170㎝가 넘는 장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신라의 여성들도 금관(혹은 금동관)을 썼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금관 혹은 금동관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금령총(1924년 발굴)과 서봉총(1926년 발굴), 황남대총 북분(1973~75년)의 금관 주인공은 어린이(금령총)와 여성(서봉총)으로 알려져 있죠. 그러니 120-2호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이라 해도 하등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럼 120호분에 딸린 또다른 고분, 즉 120-1호분은 어떨까요. 이 고분은 120호분의 북쪽 가장자리와 불과 20㎝ 간격을 두고 나란히 조성되어 있는데요. 하필이면 이 고분 위로 민가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크게 훼손된 것이 유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남색 및 상감 유리구슬이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요. 발굴단에서는 이 중에 금동관의 장식품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120-1호의 주인공 역시 여성으로 추정하는데요.(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실장)
■무덤 바닥에 깔린 덩이쇠의 정체는?
이렇게 120-1, 120-2호분의 발굴이 마무리되었구요.
2021년 4월부터 발굴조사의 핵심인 120호분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120호분의 주인공은 왕과 왕족은 아니어도 신라 최상위 귀족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봉분의 지름(28m)이 왕릉급(평균 40~60m)은 아니어도 중형급 정도는 되거든요.
무엇보다 그 120호분에 딸린 부속 고분, 즉 120-2호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금·금동·은의 풀세트를 장식한 여성이 출현했잖습니까. 비록 크게 훼손된 무덤이지만 120-1호 주인공도 만만치않은 존재였을 가능성이 짙구요.
120호분은 어떨까요. 무덤의 규모를 보면 ‘메인’인 120호(매장주체부 길이 10m80, 너비 7m)는 120-1호(길이 6m10㎝, 너비 3m80㎝), 120-2호(길이 7m20, 너비 5m)의 두 배 정도 되거든요.
그렇다면 핵심인 120호 출토 유물이 얼마나 대단할까, 뭐 이런 생각으로 발굴작업에 돌입했답니다.
그 결과가 며칠전(12월8일) 발표되었는데요. 과연 그 유구양상과 출토유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검칸에는 납작한 덩이쇠를 여러 점 깔아놓은 뒤에 주인공을 안치했구요.
가장자리에는 석단을 놓았는데요. 석단에서는 굽다리접시, 입이 곧은 항아리, 받침대가 있는 목긴 항아리 등의 제사도구가 출토됐는데요. 장례 및 제사행위가 이뤄졌음을 알리는 유물이죠.
주인공의 목과 가슴 부근에는 금제 가는고리 귀고리와, 유리구슬 가슴걸이가, 허리 부분에는 은제 허리띠, 철제 큰 칼(대도) 등을 착장하고 있었습니다. 또 머리 부근에서는 금속판의 일부를 도려내고 남은 부분을 무늬로 표현한 관장식(은제 투조관식)과 금동 투조 관모가 확인됐습니다.
또 주변에서 금동제 말갖춤을 비롯해 청동 다리미, 운모, 각종 토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됐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가는고리 귀고리’와 ‘큰칼(대도)’을 착장하면 ‘남성’으로 추정한다고 했죠.
그래서 120호 주인공 역시 ‘남성’으로 특정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다리 부근에 정강이뼈로 추정되는 인골 흔적이 남아 있는데요. 그걸 토대로 키(신장)를 추정하면 ‘최소한 165cm 이상’으로 판단할 수 있답니다.
■신라 공주와 제철 가문의 정략결혼?
그렇다면 120호와, 그에 딸린 120-1, 120-2호 무덤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세 무덤의 위치와 출토 유물을 토대로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 가능합니다.
우선 세 무덤 주인공들의 신분 차이입니다.
120-2호의 주인공(여성)은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비롯한 금·금동·은제 유물을 풀세트로 착장했죠. 그래서 연구자들은 120-2호의 주인공을 신라 왕족 여성, 그 중에서도 공주일 가능성을 개진하고 있어요.
반면 정작 핵심인물인 120호분의 주인공(남성)은 어떤가요.
물론 금동관모와 관장식 등 만만치않은 유물이 들어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120-2호 여성만큼은 아니죠.
대신 120호의 남성은 덩이쇠(철정)를 바닥에 깔고 누워 있었죠.
다수의 신라 및 가야 고분의 관 밑바닥에 깔아놓았던 덩이쇠는 죽은 자의 부와 권력을 상징했죠. 덩이쇠는 금괴처럼 돈으로도 쓰였고, 실제로 철제도구를 만들 때도 사용됐으니까요.
이 대목에서 고고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해볼까요. 당대 철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당대의 ‘재벌’이 신라공주와 정략 결혼을 한 것이 아닐까요. 신분상승을 위해? ‘지나친 억측’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겠죠.
그러나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가 출신이면서 신라에서 엄청난 부를 쌓은 세습재벌이 있죠. 바로 김유신(595~673)의 가문인 ‘재매정택’인데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39곳의 금입택(金入宅·부자)’ 중 독보적인 가문이죠.
그런 김유신 장군이 바로 여동생(문희)을 왕가(태종무열왕 김춘추·재위 661~681)에 시집보냈잖아요. 김유신 자신도 훗날 태종무열왕의 셋째딸(지소부인)과 혼인했구요.
신라에서 돈많은 재력가와 권력가 남성이 공주와 혼인하지 말라는 법이 없죠.
이 대목에서 신라의 4대 임금인 탈해 이사금(57~80)을 거론하는 분도 있더라구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탈해왕은 “나는 본래 대장장이 출신(我本冶匠)”이라고 소개하는데요. 탈해왕의 성는 석(昔)씨죠. 16대 흘해왕(재위 310~356)까지 왕 8명을 배출했죠.
그렇다면 덩이쇠를 무덤 바닥에 깔아놓은 120호분의 주인공은 혹시 흘해왕 이후 100년이 훌쩍 지나 퇴락한 석씨의 후예가 아닐까요. 이제 왕위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래도 한때는 신라의 왕통을 이었던….
물론 이것은 순전히 제 상상력이 가미된 ‘팩션’이라는 점을 확실히해두고 싶어요.
또하나 재미있는 것은 120호 남성과 120-2호 여성의 신장(키)인데요.
120호 남성은 ‘최소 165㎝ 이상’으로, 120-2호 여성은 ‘170㎝ 이상’으로 추정되었는데요. 두 분이 부부였다면 부인의 키가 남편보다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공주 본부인보다 사랑받은 후처?
이밖에 120호 주인공 남성과, 두 여성(120-1, 120-2호)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우선 각 고분 출토 유물의 연대로 보아 120호(남성)는 5세기 말, 120-1호·120-2호(이상 여성)는 6세기 초로 해석됩니다.
120호분 남성이 죽은 뒤 20년 사이에 120-1, 120-2호가 비슷한 시기에 묻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가족묘로 볼 수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무덤 조성의 간격 등으로 미뤄보면 남편(120호)과 두 부인(120-1, 120-2호)의 고분으로 추정하는 게 상식적이라는군요.
두 부인의 무덤 중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이 확인된 120-2호분은 남편(120호분)의 남쪽에 조성됐구요. 남편묘의 일부를 뚫고 들어섰습니다. 또 다른 부인묘인 120-1호는 남편(120호분)의 봉분 위 흙을 굴착하고 들어섰는데요.
그런데 남편 무덤의 돌무지 북쪽 가장자리와 불과 20㎝ 간격을 두고 조성된게 눈에 띈다는군요. 무엇보다 남편묘와 마치 나란히 누운 것처럼 ‘북서~남동’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반면 120-2호 부인은 120-1호 부인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고, 또 방향(‘동-서’) 또한 약간 다릅니다.
이 대목에서도 고고학적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데요.
이런 겁니다. 무덤 바닥에 덩이쇠를 깔아 부를 과시한 제철 가문이 신분상승, 정략 결혼의 차원으로 신라 공주(120-2호)와 혼인했다, 그 공주는 남편(120호)의 정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남편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부인은 다른 분(120-1호)이었다, 뭐 이런 상상은 어떻습니까. 물론 이 또한 지나친 억측이 아니냐고 무시하는 분들도 있겠죠.
아닌 말로 그냥 최상위 귀족 가문의 직계가족묘일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120호를 중심으로 확인된 세 고분의 정체를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한번 흥미롭게 정리해본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역사는 스토리텔링이니까요.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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