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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따비질'하는 그 남자는 왜 벗고 있었을까…청동기 노출남의 정체

‘한반도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만 거쳤다.’ 1907~1934년 김해 회현동 패총 유적을 발굴한 일본학자들이 반색했습니다. 
이곳에서 석기와 철기가 동시에 나오자 ‘얼씨구나!’ 했던 건데요. 
이들은 ‘맞아 한반도에는 독자적인 청동기 시대가 없었어. 석기만 쓰고 있던 미개사회였는데, 중국(한나라)에서 철기로 무장한 선진문화가 밀려 들어와 석기-철기가 공존한 것일 뿐이야!’, 뭐 이렇게 단정한 겁니다. 일본학계는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파행·정체되어 있었음을 강조하는 식민사관의 하나로 이 ‘금속병용기설’을 주장했는데요.

■터무니 없는 금석병용기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 상서로운 조짐이 보입니다. 1967년 대전 괴정동에서 한 주민이 밭을 갈다가 심상치않은 청동기 유물을 수습하는데요. 국립중앙박물관의 긴급조사 결과 돌널무덤에서 ‘칼손잡이 모양 청동기(검파형동기·劍把形銅器)’, ‘방패모양 청동기’, ‘청동방울’, ‘거친무늬 거울’ 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한국식 동검이 출토되었는데요.
지금의 중국 동북방에서 널리 유행한 ‘비파형동검’보다는 검의 폭이 좁아서 ‘세형(細形)동검’으로 알려져있죠. 청천강 이남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한국식 동검’이라 합니다.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없다는 일본 학계의 강변이 무색해진 대목이죠. 지금 대전시립박물관이 개관 10주년 특별전(‘뜻밖의 유물’·~2023년 1월29일)에 출품됐으니까요.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각설하고요. 한번 쏟아져나온 청동기 유물이 1960~70년대 붐을 이룹니다. 그 무렵 김양선 숭실대 교수(1907~1970)가 고운무늬 청동거울(정문경·국보)과 석제 청동기거푸집(전 전남 영암 출토·국보) 등을 숭실대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이중 고운무늬 거울은 1960년대 충남 논산 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발견한 청동기 세트 중 하나였는데요. 그 중 고운무늬 거울은 숭실대로, 청동방울 등 다른 유물은 호암미술관으로 각각 넘어간 겁니다. 1971년에는 전남 화순 대곡리에서 한국식동검 3자루와 함께 고운무늬 거울과 팔주령, 쌍두령 등 청동기세트가 쏟아졌는데요. 11점 모두 국보로 지정됐죠. 1976년엔 충남 아산 남성리에서도 한국식동검 9자루와 방패형·칼손잡이형 등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왼쪽 인물은 추수한 곡식을 항아리에 저장하는 여성을 묘사한 듯 하다.

■녹슨 청동기에 새겨진 새 두마리
역시 그 즈음인 1970년 말 국립중앙박물관에 한 골동품상이 찾아옵니다.
그 골동품상은 녹슨 청동제품 1점을 내밀면서 ‘대전에서 출토된 유물’이라 했습니다. 
좌우 12.8㎝, 높이 7.8㎝에 두께는 불과 1.5㎜ 정도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청동유물이었습니다. 사실 출토지가 확실치 않은 유물의 고고학적 가치는 뚝 떨어집니다. 출처를 모르는 유물이니, 연대를 알 수 없고, 더구나 진위여부도 가리기 힘들기 때문이죠.
그래도 박물관측은 이 유물이 가품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비교적 싼 가격으로 구입했습니다. 이 녹슨 유물이 바로 한국의 청동기 후기를 대표하는 ‘농경문 청동기’입니다. 당시 한병삼 학예연구관(1935~2001)의 반응은 다소 회의적이었습니다.

“외양은 괴정동에서 출토된 방패형 청동기와 유사했다. 그러나 밑부분이 부러져 나간 상태였고, 그나마 남아있는 윗부분마저 둘로 절단돼있었다. 녹까지 슬어있어서 전체 문양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아! 괴정동에서 나온 방패형 청동기와 똑같은 자료가 하나 더 나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청동기에 잔뜩 묻은 녹을 제거하자 반전의 모양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Y자 형의 무늬 끝에 몸에 반점이 찍힌 두마리의 새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표현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한병삼 연구관은 대번에 ‘솟대’를 떠올렸습니다. 솟대가 무엇입니까. 20~30척의 장대 위에 가로목을 걸치고 그 위에 나무새 혹은 돌새를 1~3마리 올려놓은 신간(神竿)이죠. 신간은 ‘하늘에서 신령이 하강하는 통로로 인식되는 나무’를 뜻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에 심상치않은 대목이 등장하죠. 
“마한 사람들은 귀신을 믿었다. 백성들이 뽑은 천군(天君)이 천신을 위한 제사를 주관했다. 이들 나라에 각각 소도(蘇塗)라는 별읍이 있었다. 이곳에서 ‘큰 나무를 세운 뒤’(立大木)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예부터 나무와 새는 천계와 현세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인식되었죠. 지금도 히말라야 산맥 주변인 네팔이나 티벳 등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조장(鳥葬)을 한다지 않습니까. 시신을 뜯어먹은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계로 운반하는 장례식이죠. 새는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희망을 하늘에 알려주는 영물로 인식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나무 위에 앉은 새 그림은 무엇인가. 제사 때마다 등장한 솟대의 원조일 수도 있고, 혹은 인간에게 풍요를 안겨주는 곡령신(穀靈神)을 나르는 매개자일 수도 있죠. 어떤 경우든 하늘신의 가호 아래 풍년과 다복의 꿈을 펼치려던 청동기인들의 소박한 꿈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라는 겁니다. 한병삼 연구관은 이와 관련해서 중국 전국시대 유물 중에 새와 관련된 의식을 표현한 연관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청동기에 새겨진 3명의 인물
다른 면의 그림은 더욱 흥미진진했습니다. 모두 3명의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왼쪽에는 아가리가 좁은 토기 항아리에 추수한 곡물을 담고 있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여성 같았습니다.
그 면의 오른쪽 아래에는 상반신만 남은 인물이 괭이를 치켜들고 있었습니다. 
문제적 인물은 오른쪽 위에 새겨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손으로 삽자루를 잡고 한쪽 발은 삽을 밟고 있었습니다. 
삽날이 길고 끝이 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한병삼 연구관은 대번에 ‘따비’(논이나 발을 갈 때 쓰는 작은 쟁기)를 떠올렸습니다. 또 그 사람의 뒷머리에는 아주 긴 무언가가 달려있었습니다. 

농경문 청동기 속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 모양은 솟대를 연상시킨다. 솟대는 하늘에서 신령이 하강하는 통로로 인식되는 나무를 뜻한다.

다리 사이에는 삼각형 형태의 돌출부가 보였습니다. 수상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아! 그것은 남성의 성기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변태가 아닌가? 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따비질(쟁기질)을 하는 걸까.’ 
그러나 당시 한병삼 학예연구관은 왜 이 남성이 천연덕스럽게 성기를 노출한채 밭을 갈고 있는지 깊게 검토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 남근 숭배사상이 성행했고, 중국 진한시대의 청동기 남근이 있으며, 한자 ’조상 조(祖)‘자가 남근을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남근형 유물’은 조상숭배사상과 관련이 있는게 아니냐고 추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체’ 부분만 빼고 정리해볼까요. 청동기에 ‘출연’한 3명 중 두 사람은 밭을 갈고 있고(한사람은 나체로 따비질, 다른 한사람은 괭이질), 왼편의 여성은 추수한 곡식을 항아리에 담고 있다는 겁니다. 

농경문 청동기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농경생활을 상징하고, 파종 후와 수확 후에 하늘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의식까지 새겨넣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청동기는 제사를 위해 세운 나무에 걸었거나 혹은 제정일치의 지도자가 가슴팎에 달았던 의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오른쪽 두 남자는 봄날 밭을 가는 춘경(春耕)을, 왼쪽 여자는 수확한 곡식을 저장하는 추수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농경사회의 ‘춘경(春耕) 추수(秋收)’ 장면을 묘사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다른 면에 나타난 ‘솟대’ 그림과 연결시켜 보면 어떨까요.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는 ‘소도’ 이야기와 함께 5월·10월 제사를 더불어 인용합니다.
“해마다 5월 파종을 마친 뒤와 10월 농사일을 끝낸 뒤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 함께 모여 밤새도록 노래 부르고, 춤 추며, 술을 마신다. 춤은 수십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고 땅을 밟고 몸을 굽혔다가 치켜들었다가 한다. 손과 발의 동작이 서로 조응한다.”
그렇다면 이 청동기 앞 뒷면 그림을 종합해서 설명해볼까요. 
이 청동기에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농경생활을 상징하고 파종 후와 수확 후에 하늘신과 조상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의식까지 새겨넣은 것이 아닐까요. 손바닥만한 크기로 보아 하늘 제사 때 제정일치의 지도자가 가슴팎에 걸었던 도구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후 30년 넘게 농경문청동기는 “기원전 4~3세기 생산의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의기(儀器)로 판단된다”고만 해석했습니다.

벌거벗고 따비질하는 남성은 누구?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 한가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었죠.
바로 ‘벌거벗고 밭을 가는 남성의 정체’였습니다.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용 청동기에 왜 굳이 나체 남성을 새겨넣었다는 겁니까.
청동기 전공자인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조선 중기의 문인인 유희춘(1513~1577)의 문집(<미암집>)에서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았답니다. 유희춘은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윤원형 일파가 정적을 모함하려고 양재역에 내건 대자보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를 거쳐 함경도 종성에서 장장 19년간 유배생활을 했는데요. 유희춘은 이곳에서 독서와 저술활동을 펼쳤답니다.
그런 유희춘이 개탄한 현지 풍습이 있었는데요. 바로 나체로 밭을 가는 ‘해괴한 세시풍습’이었습니다.

발가벗은 채 따비질하는 남성의 정체는 조선조 중기 문인 학자인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서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유희춘이 19년간 함경도 유배생활 도중 겪은 일을 언급하면서 ‘나경’, 즉 ‘발가벗고 농사짓기’ 이벤트를 거론한다.

“새해에 옷을 벗고 밭갈이 하는 짓이 가장 해괴한 풍습이다. 해마다 입춘이면 도할사(함경도·평안도의 종 6품 관리)들이 관청의 문 길가에서 사람을 시켜 나무로 만든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농사 짓는 형상을 짓게 한다. 이것은 한 해의 농사를 점치고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이다.”
유희춘이 혀를 끌끌 차는 부분이 바로 ‘이 행사가 나체 퍼포먼스’라는 것입니다.
“밭 갈고 씨 뿌린 사람은 반드시 나체여야 한다. 부들부들 추위를 무릅쓰게 하니 이 무슨 해괴한 작태인가.”
유희춘은 ‘옛 노인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추위를 견디는 씩씩함을 보여주고 그 해 따뜻한 상서로움을 이루기 위해’ 옷을 벗고 밭을 가는 행사를 거르지 않는다고 전했습니다. 물론 유희춘은 이런 퍼포먼스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나체남성상. 고래잡이의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장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연의 조화를 아이들 장난 같은 행사로 빼앗을 수 있는가. 얼고 추운 곳에서 손발을 드러내면 금방 얼어 터진다. 하물며 알몸으로 길거리에 서 있다면 오죽한가…이것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애초롭게 생각한 유희춘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현지 관원들과 백성들은 ‘핑퐁게임’으로 책임을 전가했다는데요.
관원들은 “이곳 백성들의 풍속”이라 하고, 백성들은 “우리는 그저 관원들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 떠넘겼답니다. 
유희춘은 이 대목에서 “이런 악습을 지역 수령들이 없애야 하는데 대체 뭐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고 개탄합니다. 
그런데 실은 함경도 지방 뿐이 아닙니다. 전남 진도에서는 추석 전 어린이들이 발가벗고 나이 수 대로 밭고랑을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구요. 또 일본의 간사이(關西) 지방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농부가 밭을 갈 때는 발가벗은 상태로 괭이질을 하거나 씨앗을 뿌린 후 부부가 성관계를 갖는 풍습도 있었답니다.
어떻습니까. 농경문 청동기의 발견과. 유희춘의 생생증언, 그리고 여러 민속학 자료 등을 토대로 볼 때 이러한 ‘나경 퍼포먼스’가 최소한 기원전 4세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끈질기게 남아있던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문해자>는 “‘사내 남(男)’자는 ‘밭 전(田) 자 밑에 힘 력(力)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자는 밭에서 힘쓴다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남자의 쟁기질 혹은 따비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비와 남성기
따지고보면 원시사회부터 풍요(혹은 다산)의 상징은 여성이었습니다. 
3만5000~2만5000년 사이의 유물인 홀레펠스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등이 대표적인 예죠.

이것이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남성으로 바뀝니다. 지모신을 숭상하던 모권사회에서 부권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인데요. 
남성이 수렵생활을 벗어난 인류가 정착해서 가정을 꾸리고, 농사를 짓고, 마을을 지키는 공동체의 수호자로서 부각됐다는 겁니다. 한자인 ‘사내 남(男)’자에 그러한 인식이 녹아있답니다. ‘남(男)’자는 ‘밭 전(田) 자 밑에 힘 력(力)가 있잖습니까. 
이것은 남자가 밭에서 따비질(쟁기질) 하는 형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추운날 발가벗고 따비질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 민속학자이자 국문학자인 김열규 전 서강대 교수(1932~2013)는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했는데요.
“(농경문 청동기의) 노출남을 보라. 성기가 따비와 나란히 아래를 향해 뻗어 있다. 따비에는 땅을 후벼 팔 수 있도록 날카롭고 뾰족하게 생긴 쇠붙이가 긴 자루 끝에 붙어있다. 성기와 따비는 닮은 꼴이다.”

나경, 즉 발가벗고 농사짓기 이벤트가 일종의 주술이라는 겁니다. 땅에 박히는 따비를 따라서 사내의 성기, 즉 양물이 여성으로 간주된 땅에 영향을 끼친다는 거죠. 결국 나경은 대지의 여신과의 성관계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김열규 교수는 이것을 “대지의 여신에게 정액을 뿌리는 (유사성) 행위”로 표현했습니다. 이로써 대지가 더욱 생산성을 높아지고 그만큼 풍요로워지기를 바랐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한해 밭을 갈기에 앞선 입춘에 말입니다. 
또하나 착안점이 있습니다. 농경문 청동기 같은 방패 모양의 청동기는 지금까지 3점 출토되었거나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모두 대전(2점 추정), 충남(아산 1점) 지역에서 나왔습니다.(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아무래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한국 특유의 작품으로 창조해내기가 한반도 서쪽이 유리했을 겁니다. 당연히 고조선의 영향도 컸을 거구요.  
문양이나 제작기법 상으로는 거친 느낌의 괴정동 방패가 가장 오래된 기원전 5~4세기 정도로 보이고요. 새끼줄 모양의 고리 등 정교한 무늬 새기기가 돋보이는 농경문 및 아산 출토품은 그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4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답니다.
어떤 방패 등 2500~2400년전 이 방패를 매달고 각종 의식을 베풀었을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중 농경문 방패가 가장 작고 앙증맞네요. 저는 세 분의 지도자 가운데 가장 작고 앙증맞은 이 농경문 방패를 가슴에 매단 분이 가장 높으신 분 같다는 데에 한표를 던지겠습니다. 뭔가 세련되어 보이잖아요.(이 기사를 위해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이승오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한병삼, ‘선사시대 농경문청동기에 대하여’, <미술사학연구> 112호, 한국미술사학회, 1971
이건무, <청동기문화>, 대원사, 2000
김열규, <한국신화, 그 매혹의 스토리텔링>, 한울, 2012
권오영, ‘고대의 나경’, <고고학> 7권2호, 중부고고학회, 2008
이종철, <한국의 성 숭배문화>, 민속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