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매미’라는 이름의 태풍을 기억하십니까. 2003년 9월 12~14일 한반도 남부에 불어닥친 슈퍼태풍입니다.
중심부 최저기압이 이전까지 태풍의 대명사였던 ‘사라’(1959년·952헥토파스칼)보다 낮은 950헥토파스칼(h㎩)로 역대 1위를 차지했습니다. 사상자가 130명(사망 117명·실종 13명), 재산피해가 4조 2225억원에 달한 최악의 태풍이었습니다.
‘매미’는 북한이 지은 태풍 이름이었는데요. 1999년 11월 열린 제32차 아시아 태평양 태풍위원회에서 14개국이 10개씩 제안한 태풍 이름 140개 중 하나였죠. 태풍위원회는 140개 이름을 5개조로 나눠 28개씩 차례로 쓴다고 합의했는데요.
그러나 ‘매미’는 2003년 너무나 많은 피해를 준 재수없는 이름이라 해서 ‘불명예 퇴출’됩니다. ‘매미’ 대신 ‘무지개’가 채택되었습니다. 왜 뜬금없이 ‘문화유산’ 기사에서 태풍이야기를 꺼내냐구요.
■매미가 일깨운 8000년 전의 세계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때는 태풍 ‘매미’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았던 2004년 봄이었는데요.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마을에서는 6개월 전 ‘매미’ 때문에 침수된 양·배수장을 수리·확장하는 공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인근지역에서 지표조사를 펼치던 발굴기관 조사원이 공사장 옆을 지나다가 발길을 멈춥니다.
그는 양수장을 확장하려고 파낸 땅의 토층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토층에서 조개껍데기와 함께,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 토기편이 보였습니다. 조사원은 즉각 창녕군에 발견사실을 신고했습니다.
창녕군의 의뢰로 현장에 달려간 경남도 문화재위원들은 ‘신석기~청동기시대 조개무지(패총)’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양·배수장 공사가 긴급 중단되었습니다. 국립김해박물관 발굴팀이 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발굴을 지휘한 당시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유적 발견 자체가 신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유적의 입지부터가 그랬답니다. 청도천(낙동강 지류)을 따라 높게 쌓아올린 제방과 그 위에 놓인 지방도로가 바로 옆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유적 위를 덮고 있었습니다. 유적의 한쪽은 이미 양·배수장 건물이 치고 들어온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유적 위에는 7~8m 가량의 흙이 두껍게 덮고 있었습니다.
만약 태풍 피해 때문에 양·배수장 확장공사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유적이었던 겁니다. 태풍 ‘매미’는 이 땅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그 이름 조차 제명된 신세가 되었지만 그나마 한가지 선물은 남긴 셈이 됩니다.
■“신석기 시대엔 바다였다”
2004년 6월부터 시작된 발굴에서 신석기(8000년전)~청동기시대까지 유물층이 켜켜이 쌓인 조개무지 유적임을 확인했습니다. 나뭇가지, 낚시바늘, 가래와 함께 민물조개인 제첩과 바다에 서식하는 굴, 그리고 상어, 가오리, 복어, 숭어의 뼈가 나왔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비봉리는 바다와 60㎞ 떨어진 육지이거든요. 왜 이런 육지에서 바다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일까,
발굴단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처음에는 ‘비봉리 사람들이 낙동강을 통해 바닷가 사람들과 교류해왔던 것이 아닌가. 혹은 비봉리 사람들이 바닷가까지 나가 어업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나’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사고의 틀을 바꾸었습니다. ‘혹시 신석기 시대에는 비봉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과연 이런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나왔습니다. 즉 습지의 여러 층위에서 흙을 채취, 분석한 결과 식물성 플랑크톤의 일종인 바다규조가 발견된 겁니다. 황상일 경북대교수는 “6800년 전 이전에는 비봉리가 내만(內灣ㆍback bay)의 해안에 있었으며 해안선은 청도천을 따라 인교(나무다리) 부근까지 전진해 있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합니다. 가설대로 신석기 시대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가능성이 제기된 겁니다.
■도토리 전분으로 만든 피자 혹은 파전, 혹은 돈까스
비봉리에서 첫번째 주목할만한 유구가 확인되었는데요. 그것은 18기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였습니다.
저장공의 길이는 52~216cm로 상당히 다양했구요. 이 구덩이에 도토리를 보관했는데요.
여기에 신석기인들의 지혜가 담겨있다는군요. 바닷물에 도토리를 썩지 않도록 보관한 거구요. 무엇보다 도토리에 남아있는 떫은 맛, 즉 타닌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는군요.
즉 바닷물이 드나드는 과정을 몇 번 거치면 도토리의 떫은 맛이 제거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밀물 때는 입구가 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물 밖으로 노출되는 절묘한 곳에 도토리 저장구덩이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답니다.
만약 물밖으로만 노출되어 있었다면 도토리의 타닌 제거도 어려웠을 것이고, 또 야생동물에 의한 피해도 피할 수 없었겠죠. 또 물 속에만 있었다면 도토리를 저장하고, 필요할 때 꺼내는 작업이 곤란했겠죠.
그래서일까요. 18기의 저장구덩이 조성위치가 시대에 따라 해발 0.75m~0.38m~0.26m~0.50m~0.12m로 바뀌는데요. 이 저장구덩이의 해발고도가 당대 해수면의 높이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되는 셈입니다.
도토리 구덩이에서는 초본류(풀), 참나무·소나무로 만든 작은 나뭇가지, 그리고 직경 10㎝ 정도의 굵은 목재가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은 도토리 등이 물에 유실되는 것을 막고, 저장 구덩이의 위치를 파악하기 넣은 여러 장치였음을 알 수 있죠.
그중에는 칼을 거꾸로 꽂아넣은 듯한 나무도 보였습니다. 그걸 ‘아서왕의 엑스컬리버’ 같다고 표현한 발굴자가 있더라구요.
또 일부 구덩이에서 도토리와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망태기와 솔방울 등이 썩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가공시설이었던 구덩이도 보였는데요. 파쇄된 도토리 껍질이 확인된 저장공 2기와, 갈돌과 갈판이 출토된 저장공 1기들이 바로 그런 곳들입니다. 저장구덩이 안에서 도토리를 가공했을 수도 있는 복합기능공간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 도토리를 갈아서 무슨 음식을 만들었을까요. 출토 유물 중 토기 내부에 붙어있는 불에 탄 유기물의 흔적이 그 실마리를 풀어줍니다. 그 유기물 중에는 달래와 같은 양파계 뿌리식물이 있었는데요.
불에 탄 것으로 보아 도토리 전분과 섞어 조리한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그렇다면 어떨까요.
도토리 전분과 달래 같은 파류, 조리기구까지…. 얼핏 파전 같은 부침개 생각이 나지 않나요.
비봉리에서는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조각도 발견되었는데요. 토기편의 위쪽과 옆선에 작살과 줄을 표현한 것 같은데요. 아마도 사냥장면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죠. 당시 발굴을 지휘한 임학종씨가 그럴듯한 상상의 나래를 폈습니다.
“도토리 저장공과 음식물이 눌러 붙은 토기…. 그렇다면 신석기인들은 도토리 가루에 달래, 그리고 돼지의 가슴살을 올려 피자나 혹은 돈까스 같은 음식을 해먹지 않았을까요?”
■사상 첫 똥화석의 발견
한참 음식 얘기하다가 ‘거시기’ 한데요. 비봉리 유물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역시 ‘똥(糞) 화석’일 겁니다.
발굴 때 파낸 흙을 0.2~1㎜ 짜리 그물망으로 일일이 체질한 결과 찾아낸 ‘보물 똥화석’인데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떤 신석기인이 시원하게 배설했는데, 그것이 따가운 햇볕에 굳어져 버렸고, 그 위에 계속 흙이 쌓여 결국 화석으로 변한 거니까요.
“똥화석을 보면 팥알 반 크기의 알갱이가 있습니다. 똥 속에 음식물 잔해가 남아있다는 겁니다.”(당시 이정근 학예사·현 국립김해박물관장)
고고학적 발굴사상 처음으로 ‘똥화석’을 발굴한 조사단이 흥분상태에 빠졌답니다.
이후 발굴현장에서는 “똥 찾았어요?” 하는 게 인사였답니다. 유물을 체질할 때 너도나도 똥화석을 찾는 게 일이었구요.
그런데 어느 날 임학종 실장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데요.
“십자가처럼 생긴 물건 위에 놓인 끈을 잡고 한참 걸었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이상하게 생긴 나뭇조각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임학종 실장은 ‘예전에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면 배(舟)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했었는데요. 그러던 차에 그런 생생한 꿈을 꾸자 임실장은 현장으로 달려가 조사원들을 불러모았다는데요.
“내 꿈에 나타난 십자가가 무슨 뜻일까. 우리가 파놓은 발굴 트렌치야. 십자가 끈을 따라 흙을 파보면 배가 묻혀있을 것 같아.”
임실장의 말에 다른 조사원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장님이 더위를 드셔나보다. 며칠 쉬셔야겠다”고 피싯 웃었답니다.
임실장은 현장 작업 중인 굴삭기(포클레인)를 보면서 “누구든 배를 발견하는 사람은 저 포클레인(현금으로 치면 3000만원)을 사줄 것”이라고 농섞인 공약을 했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올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8000년 전의 배가 출현하다
발굴이 막바지에 이른 2005년 여름이었는데요. 그 날의 현장 발굴 책임자가 급한 일로 현장을 비웠구요. 공교롭게도 임학종 실장이 대신 현장을 지켰다는데요. 그런데 발굴터를 유심히 살피던 임 실장이 숨이 멎는 듯 했답니다.
“발굴 구덩이에서 제일 낮은(오래된) 층에서 나뭇조각 하나가 눈에 띄는 거예요. 순간 심장이 멎는 듯 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저거다!’ 했어요.”
임실장은 4m나 되는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어 떨리는 손으로 흙을 파헤쳤는데요.
나뭇조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꿈에서 보인 완만하게 휘어진 큼직한 배의 흔적이었습니다.
임실장이 환호성을 지르자 조사원들이 모여들었답니다. 현장에서는 “만약 그날의 발굴책임자가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면 3000만원에 해당되는 포클레인을 사줄 판이었는데 그것도 하늘의 뜻이었나 보다”고 농담했답니다.
신석기 시대 비봉리 배의 출현은 그야말로 고고학 발굴 사상 역사적인 성과였습니다. 배는 비봉리 유적의 가장 아래층, 즉 신석기시대 중에서도 조기층(7700년 전)에서 출토됐는데요. 남아있던 배의 최대길이는 310㎝였고, 최대폭 62㎝, 두께 2.0~5.0㎝였습니다. U자형으로, 통나무를 파내 만든 배였습니다.
배의 수종은 소나무였으며. 수령은 200년 정도로 추정됐습니다.
일본 조몬시대(繩文·1만2000년전~2300년전)의 배보다 2000년 이상 빠르고, 중국 저장성(浙江省) 콰후차오(跨湖橋)에서 출토된 나뭇배와 비슷한 시기에 건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조사단은 이 배의 이름을 ‘비봉리 1호’라 했는데요. 그 배의 출토지점에서 약 25m 떨어진 곳에서 두번째 배 조각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봉리 2호’ 배입니다.
또한 2010년 2차 발굴에서는 ‘비봉리 1호’ 출토지점과 약 9m 떨어진 곳에서 배 젓는 도구인 노(櫂)를 찾아냈습니다. 노의 전체 길이는 181㎝이며, 자루(66㎝)와 물갈퀴(115㎝)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었는데요. 이 노는 7000년 전 운항한 배를 저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창녕 비봉리에서 확인된 신석기 시대 배의 흔적은 경북 울진 죽변에서도 발굴되었는데요. 2010년 죽변에서 확인된 신석기유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7500년 전 배의 조각과 노 등을 확인한 겁니다.
■신석기 배의 발견은 만시지탄
사실 이와같은 신석기 시대 배(선박)의 발견은 만시지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 등에서 표현된 고래잡이 모습이나 패총에서 보이는 고래 뼈의 존재, 일본 열도와의 원거리 교역을 알려주는 흑요석의 확인 등은 무엇을 말해줄까요.
신석기 시대에 이미 원양어업에 나설 정도로 배 건조기술이 만만치 않았다는 거죠.
어떻습니까. 비봉리에서는 국내 최고(最古), 최초의 수식어가 붙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죠. 두 가닥의 날줄로 씨줄을 꼬는 ‘꼬아뜨기 기법’으로 만들어 신석기 시대 편물기술을 웅변해준 망태기라든지, 저장공에서 확인된 최고의 칼모양 목제품, 신석기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똥화석, 멧돼지 그림이 새겨진 신석기 초기의 동물그림 등…. 여기에 남해안은 물론이고, 멀리는 일본 규슈까지도 오갔을 지도 모를 선박까지 나왔죠.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8000년전 신석기인들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지 않습니까.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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